홍륜
홍륜은 남양(南陽) 사람이며 시중 홍언박(洪彦博)의 손자이다.
공민왕이 일찍이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 자제를 선발하여 자제위(子弟衛)에 두었는데 홍륜,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이 모두 이에 속했으며 음탕하고 추악한 짓으로 왕의 총애를 얻었다. 홍륜 등은 항상 궁중에서 숙직하였는데 때로는 한 해가 다 지나도 휴가를 주지 않아서 모두 내심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왕이 홍륜 등을 시켜 여러 비빈(妃嬪)들과 간통하게 하여 아들을 낳으면 후계자로 삼으려는 희망을 가졌는데 그러는 중에 익비(益妃)가 임신했다.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어느 날 임금을 따라 변소에 갔다가 가만히 임금에게 고하기를
“제가 익비전(益妃殿)에 갔더니 비(妃)의 말이 임신 5개월이라 하셨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항상 영전(影殿)을 부탁할 데가 없어서 근심했더니 이제 비가 이미 잉태했다니 내게 무슨 근심이 또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묻기를
“누구와 잤다더냐?”라고 하니 최만생이 말하기를
“비의 말이 홍륜이라 합디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은 말하기를
“내일 창릉(昌陵)으로 갈 터인데 그때 주정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이다. 그런데 네가 이 일을 알았으니 너도 마땅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만생은 공포를 느끼고 홍륜,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과 공모하고 이날 밤 3경(三更)에 침전(寢殿)으로 들어가서 왕이 술 취해서 정신 모르고 자는 틈을 타서 최만생이 검으로 치니 뇌수가 벽에까지 튀어 붙었다. 권진, 홍관, 노선, 한안 등도 왕을 마구 쳤다.
이렇게 되니 김흥경(金興慶), 윤선(尹瑄), 윤가관(尹可觀) 등이 “적이 들어왔다”라고 외쳤으나 위병들은 사지를 떨고 꼼짝도 못하였으며 재상 집사(執事)들도 사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내시 이강달(李剛達)이 선참으로 침전에 들어가 피가 방에 가득 찬 것을 보고 왕이 편치 않다고 거짓말하고 문을 잠그고 출입을 금했다. 새벽녘에 태후(太后)가 왔으나 왕의 사망을 비밀에 부치어 발표치 않았고 백관과 시위들은 평상시와 같이 일 보았다. 이강달은 왕의 명령으로 경복흥(慶復興), 이인임(李仁任), 안사기(安師琦)등을 소집하였다. 이들이 역적을 체포 처단할 계책을 비밀 토의했다.
이인임은 중 신조(神照)가 항상 궁중에 있었고 힘도 세며 흉계도 많은 놈이라 혹시 심왕의 아들 탈탈첩목아(脫脫帖木兒)와 내통해서 반란을 꾸민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신조를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직후에 병풍, 휘장들과 최만생의 의복에 피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최만생을 순위부에 가두고 국문하여 그 정형을 모조리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륜 등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더니 모두 다 복죄하였으나 다만 한안, 노선만이 끝까지 불복했다. 그러나 홍륜 등의 증언이 명백했으므로 즉시 한안의 아비 찬성사 한방신(韓方信), 노선의 아비 밀직 노진, 권진의 아비 밀직부사 권용(權鏞), 홍관의 아비 판 각문사(判閣門事) 홍사보(洪師普)를 순위부에 가두었다. 홍륜의 아비 홍사우(洪師禹)는 그때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를 진수하고 있었으므로 홍륜의 형 홍이(洪彛)를 가두었다.
백관들이 저자에 모여서 홍륜과 최만생을 능지처참했고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과 그들의 자식들을 목 베어 죽인 후 효수하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처와 첩들은 관비(官婢)로 편입시켰다.
한방신, 권용, 홍사우, 홍사보는 곤장 치고 먼 곳으로 유배시켰으며 친숙질 당형제들은 모두 다 곤장 쳐서 귀양 보냈다.
신우 2년에 정당문학 이무방(李茂芳)이 경복흥의 집으로 가서 말하기를
“어째서 한방신, 노진의 가산을 몰수하지 않는가?”라고 하니 경복흥은 말하기를
“한안과 노선이 복죄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무방은 또 말하기를
“두 역적이 스스로 대역죄라는 것을 알고 죽을 때까지 불복했다. 그러나 죄상인즉 명백한데 시역(弑逆)으로 논할 때 그 아비가 죄를 면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경복흥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대답치 않았으나 이무방은 더욱 간절히 시비를 가려 말했으므로 경복흥도 부득이 한방신과 노진의 가산을 몰수했다.
집의 김승득(金承得)과 헌납 안정(安正)등이 연이어 글을 올려 청하기를
“최만생과 홍륜의 부모, 처자, 형제는 죽이고 그 친숙질, 당형제는 관직을 삭탈하며 원방으로 귀양 보내고 영원히 벼슬을 주지 말 것이며 또 대역(大逆)은 비단 최만생과 홍륜만이 아니니 홍관, 권진, 한안, 노선 등도 그와 같이 일체 시행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신우(辛禑)가 이 의견을 청종하였으므로 이인임이 찬성 목인길(睦仁吉), 평리 변안열(邊安烈) 정당문학 홍중선(洪仲宣), 판 밀직 왕안덕(王安德), 밀직부사 우인렬(禹仁烈) 등과 함께 적신(賊臣)들의 부형은 이미 모두 먼 곳으로 귀양 가 있으니 사형을 면제하자고 청하였다. 신우는 말하기를
“지금 대간(臺諫)들의 말이 옳은데 어찌 듣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목인길은
“제가 선왕(先王)을 모시고 원나라 조정에 11년간이나 있었으나 남편의 죄로 인해서 처를 죽이고 아들의 죄로 인해서 어미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임금을 시역한 죄를 논할진대 비록 전국이 모두 죽음을 당해도 오히려 한할 바 없습니다. 저희들도 또한 어찌 목이 몸에 붙어 있겠습니까마는 저 부인들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 말이 아주 간곡하고 절실하였으므로 신우가 그 청을 받아들였다. 그때 최만생의 처는 이미 죽였고 홍륜의 처는 사형 집행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면했다.
신우는 홍사우, 홍이, 한방신, 권용, 노전, 홍사보와 한안의 형 한휴(韓休), 동생 한녕(韓寧), 한렬(韓烈), 권진의 형 권정주(權定州), 노선의 형 노정(盧楨), 동생 노균(盧鈞), 홍관의 동생 홍헌(洪憲) 등을 죽이고 홍륜의 족속 홍사원(洪師瑗), 홍언유(洪彦猷), 홍언수(洪彦修), 한천(韓薦), 유용생(柳龍生), 권진의 족속 권호(權鎬), 권적(權適), 권주(權鑄), 권한(權澣), 권담(權湛), 한안의 족속 한수(韓脩), 한리(韓理)등을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그 중에도 최만생과 홍륜은 원흉이라 하여 이모의 아들, 고모의 아들까지 귀양 보냈다.
당시 지윤(池奫)이 역당들의 전민(田民)과 재산을 획득하기 위하여 홍륜과 최만생의 족속들을 법에 빙자하고 모조리 죽였다.
홍륜의 부친 홍사우는 홍륜의 불량함을 알고 죽이고자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 후 홍륜은 대한 총애가 동료들을 압도하게 되자 홍사우가 공민왕에게 말하기를
“홍륜은 외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니 궁중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그 후 홍사우는 전라도에 있으면서 홍이에게 편지를 보내 홍륜의 방자함을 경계케 하였는데 홍륜에 도리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저의 형 홍이가 저의 벼슬이 자기 위에 있음을 질투하여 저를 아비에게 참소해서 저에게 죄를 씌우려 합니다”라고 했다.
홍이가 사형당할 때 말하기를
“홍륜의 극악함이여! 그 악한이 우리 가문을 멸망시킬 줄은 평소부터 예측하고도 차마 일찍이 죽이지 못하고 오늘의 화를 당하는구나!”라고 하였다.
한렬은 말하기를
“나는 갑인(甲寅)년 사변(1374년 공민왕 시해 사건)이 생길 때에는 나이 9세이었는데 무엇을 알았겠느냐!”고 사형 문건에 서명치 않으려다가 다시 생각하고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곧 왕명을 배반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드디어 죽음을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