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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감 야마시타(山下)
5층 친교룸(親交 Room) / 옥상 빨래 말리는 곳
나는 2009년 2월 말, 만 40년간의 교직(敎職) 생활을 마치고 정년 하자마자 2009년 3월, 곧바로 미국(텍사스주)에 사는 딸의 초청으로 딸네 집에 도착하여 며칠 쉬다가 3개월간 미국 전 지역을 혼자 돌아다니며 관광을 했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와서 남미 멕시코를 두루 돌아보았고, 페루는 집사람과 함께 패키지로 다녀오는 행운도 있었다. 다시 꿈에 그리던 인도와 네팔을 포함한 서부 아시아 여행을 위하여 2011년 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홀로 고국 땅을 출발했는데 계획은 총 3개월간의 배낭여행이었다.
우선 동남아지역을 잠깐씩 들르기로 하고 처음 도착한 곳이 자유중국 대만(臺灣)이었다.
처음 숙박지로 정한 곳이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臺北) 시내에 있는 해피 패밀리 호스텔(Happy Family Hostel)이었는데 대만인 죤 리(John Lee)가 운영하는 호스텔로, 우리나라로 치면 거의 민박(民泊)수준이다. 조그맣고 옹색한 5층 건물로, 좁고 높아서 방도 많지도 않고 입구도 허술하여 볼품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행객들로 항상 방들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좋은 숙박시설이었다.
5층에 투숙자 친교룸(親交Room)이 있는데 몇 개의 소파와 탁자도 있고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도 있다.
하루 여행일정이 끝나면 투숙객(여행자)들은 친교룸에 모여서 즐거운 대화시간을 갖는다.
층마다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 더운물이 나오는 생수통, 공동 세탁실과 다리미 시설, 빨래걸이 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 별로 불편이 없다. 독방도 있고 여럿이 공동으로 쓰는 방도 있는데 독방이면 600위안(元), 공용이면 400위안(元)인데 3일 이상 있으면 50위안(元)씩 깎아도 준다. 여행을 많이 했다는 60세의 독신 남성인 주인 존(John)은 매우 친절하고, 손님이 불편이 없도록 항상 체크하며, 내가 떠나는 마지막 날 섭섭하다며 아침 식사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미국인, 아일랜드인 다섯 명을 만났는데 모두 원어민 영어교사로 장기투숙하고 있었고, 그중 뉴욕 출신의 30대 미국 녀석은 나만 보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해서 웃곤 했는데 부산에서 1년간 영어교사를 했다고 한다. 대만보다는 한국이 보수를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훨씬 더 나았다고 말하는 그는 김치와 순창고추장을 한국에서 가지고 와서 식사를 시켜다 친교 룸에 앉아 고추장에 비벼 김치로 식사를 하곤 했다.
또, 댓 명 정도의 일본인도 있었는데 72세의 야마시타 미노루(山下楤)는 정년하고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후(부인은 작고) 1년여 여행을 다니다가 일본에 돌아갔는데 공항에 내리고 5분 후에 쓰나미(海溢)가 덮쳐 고향 후쿠시마(福島)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공항에서 이틀 자다가 대만으로 왔다고 한다.
미노루는 세계인을 놀라게 했던 저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로, 일본은 자식에게 얹혀사는 것이 안 되는지 아들이 결혼해서 도쿄에 산다는데 그곳은 가지도 않고 벌써 20여 일이나 혼자 대만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이 일본영감의 안내로 아주 저렴한 식당을 안내받아 수시로 그곳에서 식사했는데, 50위안(2천 원)만 내면 닭고기나 생선에 밥, 그리고 야채 반찬 3가지를 골라 먹을 수 있다. 우리는 ‘50원 식당(Fifty Restaurant)’ 이라 부르며 자주 다녔다.
이 영감은 그 이후로 나와 친해져서 이따금 메일을 주고받는데 영어로, 일본어로 써서 주고받는다.
또 한 가지 즐거웠던 일은 꼭 1년 전, 멕시코 여행 때 만났던 대만 처녀 밍후이(陳明慧), 일본계 브라질여성 자씨라(하루미)를 만나 이틀 동안 셋이 주오펀(九份)과 야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나는 대만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말레이시아와 스리랑카, 인도로 배낭여행을 계속하였고, 야마시타 영감은 먼저의 여행에서 체코(Czech)가 너무 좋았다고 체코로 갈까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내가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체코의 제2 도시 부르노(Brno)에서 메일이 날아왔다.
그 이후 이따금 메일을 주고받았으니 벌써 4년이나 체코에 머무는데 오늘 받은 메일(2014년)에서는 일본 도쿄에 사는 아들이 첫 손녀딸을 보아서 손녀 보러 일본으로 간다는 메일이었다.
75세에 첫 손녀라고 무척 좋아하면서....
이제는 영어를 제법 잘 구사해서 영어로 쓰는 메일의 문장이 아주 매끄럽고 벼라 별 이야기를 다 써서 보낸다. 얼마 전에는 열흘간 아프리카 북단의 모로코(Morocco)를 다녀왔다고 사진도 여러 장 보내오기도 했다. 처음 나보고 영어를 잘한다고 부러워했고, 편지를 주고받을 때 일본어로 써서 주고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영어로 쓰는 편지 문장이 제법 매끄럽고 하고 싶은 말은 다 쓰는 것 같으니 신기하다. 오늘 메일(2014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 멘델에 관해 썼기에 함께 공유하고자 옮겨본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멘델의 유전법칙’.... 바로 그 멘델이다.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은 오스트리아 출생인데, 당시는 체코의 부르노(Brno)도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고 하며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의 수사였던 멘델은 세레명이 그레고르(Gregor)였다고 한다. 부르노(Brno)는 수사(修士)가 된 후 ‘성 토마스 수도원(St. Thomas's Abbey)’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수도원의 밭에 완두콩을 심어서 여러 가지 교접(交接)을 통하여 유전의 법칙을 밝혀내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날 식물의 ‘유전자(遺傳子)’를 발견하여 인류 과학(유전학) 발전에 공헌한 분이다. 함께 보내온 사진을 소개한다.
(1) 성 토마스 수도원 안에 있는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St. Marie's church)
(2)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St. Marie's Church)의 멘델 박물관 앞에 있는 멘델의 동상
(3) 시민 공동묘지(Civil Cemetery)에 있는 멘델 묘의 묘비명(墓碑銘)
야마시다 영감은 저 시민 공동묘지의 묘비명이 너무 더러워서 4년 전부터 브러쉬(Scrub brush)와 걸레를 가지고 가서 꾸준히 닦았더니 묘지기(Tombkeeper)가 매우 고마워했다고 한다. <웃기는 영감!>
그 야마시타 미노루(山下楤) 영감이 금년(今年) 만 83세로 일본 동부 센다이(仙台)에 혼자 살고 있는데 정월 초하루 새해 축하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왔다.
홋카이도(北海島)가 고향인 야마시타 영감은 고등학교 시절 야구팀 투수로 고시엔(甲子園) 구장(球場)에서 경기했다고 하고, 철강회사에 취직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던 모양이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딸이 어렸을 때 쓰나미(海溢)로 인해 마누라와 딸을 잃고 2005년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평생의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실행에 옮겨 세계 이곳저곳 혼자 배낭여행을 시작했는데 2010년에 아프리카 동쪽 바다의 마다가스카르섬 여행을 시작으로 1년여 세계여행을 했다고 한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海溢)가 동북해안을 강타하여 고향 집이 있는 후쿠시마(福島)현 이와키(いわき)가 가장 큰 피해를 입어 고향 근처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고는 곧바로 대만으로 날아왔다고 했었다.
2011년 3월 11일, 현지시각으로 오후 2시 46분에 일본 혼슈(本州) 센다이(仙台) 동쪽 179km 떨어진 해역에서 일어난 지진은 리히터 9.0으로 역대 4번째로 크며,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모두들 동영상으로 보셨겠지만, 어마어마한 해일(海溢)이 해안을 완전히 집어삼키던 장면이 생생하다.
아들이 도쿄(東京)에 산다는데 왜 아들 집으로 가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일본 풍습으로는 아들 집에 얹혀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손녀 사진(7세) / 門松(かどまつ:설날 문 앞에 세우는 나무) / 鏡餠(かがみもち:설날 또는 부처님께 드리는 떡)
그리고 먼저 여행했던 체코(Czech)가 너무 좋아 다시 체코로 갈까 한다고 했었는데 나중 메일이 왔는데 체코슬로바키아 제2 도시인 브루노(Brno)에서 4년여 머무르다가 다시 고향인 센다이로 돌아와 살고 있다고 한다. 금년(2022) 벌써 83세로 여행은 이제 하지 않고 천체관측에 취미가 있는지 벼라별 천체 사진들을 보내오거나 아름다운 센다이 풍경 사진들을 보내오곤 하는데 센다이역 근처의 아파트에 살고 있단다. 올해 1월 1일 새해를 축하한다며 사진을 보내왔는데 위 첫 번째 사진이 아들이 낳은 유일한 손녀로 금년 8살이라는데 위 사진은 작년에 찍은 시찌고상(しちごさん:七五三) 잔치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나의 큰손녀는 20살로 대학교 2학년(2022). 영감은 나보다 7살이나 더 먹었는데 손녀가 이제 8살이라니...
일본 전통인 시찌고상(しちごさん:七五三)은 남자아이는 3세와 5세, 여자아이는 3세와 7세에 행하는 축하행사로 우리나라로 치면 돌잔치 비슷한 풍습으로, 3,5,7은 길(吉)한 숫자 홀수로 행운을 의미한다.
이 잔치는 생일날 하는 것이 아니고 11월 15일에 행한다고 한다.
門松(문송/かどまつ:카도마쓰)은 설날 문 앞에 대나무를 세우는 풍습인데 꽃으로 장식한 신기한 모습이다.
鏡餠(경병/かがみもち:카가미모찌)는 설날이나 길일(吉日)에 신·불(神·佛) 앞에 올리는 둥근 거울 모양의 동글납작한 모양의 떡인데 크고 작은 떡 두 개를 겹쳐 올린다. 일명 円餅(원병/まるもち:마루모찌)
일본영감 야마시타 미노루(山下楤)는 2005년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아프리카 동쪽 바다의 마다가스카르섬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는데 순전히 사진으로 보았던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 나무 군락지’를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바오밥 남는 신(神)으로부터 벌(罸)을 받아 뿌리째 뽑혀 거꾸로 박혔다는, 또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그림으로 나오는 나무이다.
영감은 신기한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고 특히 달을 좋아해서 성능 좋은 카메라로 일식, 월식 사진을 찍어 보내오는가 하면 달 표면에 대한 상당히 전문적인 해설을 곁들인 장문의 글을 보내오기도 한다.
다음 글은 내가 야마시타 영감과 주고받은 편지 중 내가 보낸 편지로, 영어와 일본어로 뒤섞어 쓴 글인데 한글로 번역(飜譯)하여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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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유군(64세)의 어머니는 올해(2014) 91세로 일본인인데 이름은 시라카미 시즈꼬(白神靜子)다. 그녀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고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나이에 한국으로 왔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는데 내 친구인 유군이 2남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일본인들은 서둘러 귀국했지만, 당시 남편과 아들 하나가 있었던 그녀는 당연히 귀국을 포기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그녀는 고향을 가고 싶었지만 연이어 아이들이 태어났고, 고등학교 교사이던 남편이 그녀가 50세 즈음에 암에 걸려 재산을 몽땅 날리고 죽는 바람에 아이들 다섯 데리고 가난에 허덕이느라 고향 오사카(大阪)를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과일 행상, 가정부 등 그녀는 자녀 다섯을 키우느라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는데 특히 일본인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숱한 고난을 겪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언젠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에서였는지 일본 국적(國籍)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고향 오사카에도 친척들도 거의 없고 조카들은 얼굴도 모르고......
가벼운 노년성 치매(老年性 痴呆) 증상을 보이던 그녀는 2008년 자녀들의 권유로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었는데 내가 그 신원 보증인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도 일본 소설들, 시(하이쿠/俳句), 일본 노래(렌카/演歌)를 즐겨 읽고 듣는다고 하며, 현재 미혼인 막내딸이 모시고 있다.
그녀 시라카미 시즈꼬(白神靜子) 또한 우리 시대 역사의 피해자(歷史の被害者) 중 한 명이 아닐까?
이렇게 써 보냈더니..... 야마시타 영감은 그런 지나간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한다.
*유군의 어머니는 2017년(94세) 사망
야마시타 영감과 아들 부부 / 바오밥 나무(마다가스카르) / 영감 선물 문송(門松/카도마쯔)
♣ 마지막 사진은 2021년 1월 1일 0시에 보내온 야마시타 영감의 새해 선물(門松/카도마쯔)
♧야마시타(山下) 영감이 살아있다면 금년(2024) 85세인데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아직 살아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