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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오세창은 김돈희와 같은 시대(1864-1953)를 살았던 서예인이다. 중인으로서 출생 가문도 비슷하고, 서예계에서 누리고 있는 명성도 비슷하다. 더욱이 서화협회를 비롯하여 서예 운동도 같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는 격동의 세월을 같이 겪으면서도 시대를 살아온 역사관이 달랐기 때문이다.
김돈희가 정치 권력에 의거하여 서예계라는 영토 안에서 안주하면서 문화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오세창은 서예계의 바깥에서, 즉 한국사라는 더 큰 역사의 흐름에서 애국애족을 실천적으로 수행하였다. 예술에서 개인의 역사적 삶을 배제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민족 예술이 민족 역사를 외면하고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오세창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역사 안에서 지탱해온 그의 삶을 조명해보아야 한다. 그의 삶을 한국사와 서예사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한국의 근, 현대 서예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오세창의 선대는 8대가 중국어 역관이었던 중인 집안이다. 조선의 후기에는 중국을 드나들면서 각종 서적과 서화를 수집하여 소장하였다. 오세창은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풍부한 자료로 서화에 대한 안목을 높이고, 감식안을 키웠다. 더욱이 예술적이고, 학문적인 분위기 속에서 숨 쉬고 자라므로 오세창은 서예가라기 보다는 학자적 풍모를 갖출 수 있었다.
아버지인 역관 오경석과 그의 형제들 모두 그림과 글씨를 잘 하였다. 오세창은 어려서부터 서화를 익혔고, 서화에 대한 자신의 예술관을 키웠다. 그 자신도 조선의 많은 서화를 수집하여 수장하였다. 아버지인 오경석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았다. 오경석은 역관이라는 가문 덕택으로 중국을 드나들면서 외국의 발달된 문물을 손쉽게 접하므로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사귀는 인물도 박규수, 유대치를 비롯한 개화사상가 이었다. 오세창은 일찍부터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개화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오세창은 1879년에 역과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880년에는 사역원의 관리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말년에는 박문국 주사와 한성주보(1884)의 기자가 되었다. 1897년에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 외국어 학교에 조선어 교사가 되어 2년 간 머물었다. 그 동안 일본의 선진화 된 문물을 경험하였다. 1902년에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하여 지냈다. 이때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도 일본에 망명하여 머물렀으므로 둘은 친교를 맺었고, 오세창은 손병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6년에도 오세창도 천도교도가 되어서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였다. 천도교가 지원하여 발간하였던 구국운동의 신문인 만세보를 발간하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8년에는 항일운동 단체인 대한협회가 창간한 대한민보의 사장이 되었다.
1908년의 대한회보 제 4호에 실린 글은 그의 서예관을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을지문덕, 윤관, 이순신을 자처할 것이며, 글씨는 한석봉, 그림은 정겸제를 자처하라. ”
위의 글에서 내세운 한석봉은 한국적인 서체로 글을 쓴 서예가이다. 정선은 ‘진경산수’라고 하여 중국과는 다른 한국적인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면 그의 예술관은 중국을 벗어난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을 통항 고증학과 금속학을 익혔지만 한국적인 것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세창은 개화사상을 가지고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서예관에서는 중국과는 다른 한국적인 서예를 모색하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오세창이 ‘근역서회’를 발간한 의도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세창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서예가는 김정희이다. 김정희는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을 자주 다녔다. 김정희는 중국에서 문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의 사대부 계층에 문인 취미라는 것을 유행시켰다. 이동주는 조선 말기에 문인화가 유행한 것을 ‘완당 바람’이라고 불렀다.
“고관대작과 더불어 문인, 역관, 스님에 이르기까지 문인화의 새 바람을 불어 넣고, 심지어는 직업 화가에까지 문인풍을 흉내내게 하는 조류를 만들었다.”
이러한 고급의 문인 취미는 이하응, 민영익, 정학교 등의 일부 사대부들이 이어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전기, 조희룡, 허유 등의 중인계급까지 퍼트렸다. 이들과 친하였던 오경석도 받아들였고, 오세창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 고급 지식을 획득하고 있는 사대부는 중국풍의 글씨를 임, 모 함으로 이상적인 문인취미에 접해보려는 복고 의식에 자로 잡혀 있었다. 김정희가 몰고 온 바람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대부들은 한국의 서화를 중국의 예술에 종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오세창도 김정희의 영향을 벗어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한국 미술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오세창은 고서화의 수집과 연구를 하였다. 1910년에 김가진, 안중식, 이도영 등과 더불어 서화포 운영을 발기 하였던 내용이 황성신문에 실려있다. 이것은 오세창이 조선의 서화를 의도적을 수집하려던 시기와 맞불려 있으므로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을 참여하였을 것이다. 목적이란 한국적인 것을 지키려는 그의 계획이었다. 이런 이유로 안중식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서 미술운동에 같이 참여하였다.
1915년 1월 13일의 매일신보에는 오세창을 방문한 방문기인 ‘별건서화총(瞥見書畵叢)이 실려있다.
“근대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를 헐값에 방매하며서도 조금도 부끄러워 할 줄 모느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10 수 년 이래로 조선의 고대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일본으로 유출을 말한다.-이구열의 주석) 남는 것이 없음을 개탄하여 재산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천2백75점이요. 그 중에 1천1백25점은 글씨요, 1백50점은 그림이다.
씨는 앞으로 1백 여 점을 더 구득하면 조선의 명(名) 서화는 누락이 없으리라며, 고심하여 수집 중이다. 다만 서화를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필자. 별호, 연대, 이력 등을 상세히 조사하여 참고하였다. 그 목록만 하여도 세상에서 가히 구득치 못한 가치가 있겠더라.
기자는 씨에게 수집품을 사진으로 찍어서 출판하여 조선의 고미술 동호자들에 할애할 것을 권유했다. 씨도 그럴 계획이 있어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며, 우선 그 목록을 정리, 출판하여 서화 동호자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하리라.“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조선의 서화를 수집함으로 일실을 막으려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침탈을 막으려는, 단순히 애국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서화인들이 무분별하게 중국풍에 경도되어 있을 때 조선의 서화에 눈길을 주어서 수집하여 보관하려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더욱이 조선의 미를 강조한 부분에 의미를 주어야 한다. 조선 말에는 중국의 영향 뿐 아니고 서구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서양화가 도입되는 등, 새로운 미의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럴 때 우리의 서화를 보존하고 지킨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오세창은 수집한 글씨와 탁본으로 ‘근역서휘’라는 서첩을 만들었다. 수집한 그림으로는 ‘근역화휘’를 꾸몄다. 역대 서화가, 문인, 학자, 1천3백6인의 시문과 서찰 등의 친필을 모아서 ‘근묵’을 꾸몄고, 역시 서화가, 문인, 학자, 8백50명이 도장인문 3천9백12과를 모아서 만든 인보를 ‘근역인수’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서화사인 동시에 사전의 역할을 하는 ‘근역서화징’은 원고를 한문을 썼다. 탈고된 시기는 1917년이었다. 1928년이 되어서 근역서화사는 ‘근역서화징’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탈고를 하고 출판하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된 까닭은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 때문이었다. 오세창은 손병희와 더불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함으로 옥고를 치루고, 1921년 11월이 되어서야 가석방으로 출옥할 수 있었다.
책으로 출간되기 전에 그의 원고는 1921년 10월에 서화협회에서 기관지로 발간한 ‘서화협회보’에 ‘근역서화사’를 서가열전과 화가열전으로 나누어서 연재하였다. 협회지가 2회를 마지박으로 중단되지 더 이상 발표되지 못 하였던 것이다.
근역서화징은 학문적 연구를 한 집필물이 아니고, 자료적 요소가 강한 사전류의 책이다. 서화를 하는 사람의 눈이 중국쪽으로, 또는 일본쪽으로 쏠려가고 있을 때 민족 미술에 논을 돌린 오세창의 업적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 오세창에게 김정희의 중국풍 흔적이 남아있다며 폄하를 하더라도 그의 업적이 손상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화협회전이 1921년부터 1936년까지 15회를 계속하였다. 구성원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졌지만 조선인들만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민족사회의 갈채를 받았다. 조선인만으로 협회를 구성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민족미술 단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미에 대한 이념을 설정한 것도 아니었다. 회원들의 성격이나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서 전통적인 서화가 중심을 이루었고, 그 전통성을 고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열의가 식어갔다. 조선미전이 총독부의 후원으로 열리면서 서화가들은 조선미전 쪽으로 몰려갔다. 서화협회는 점차 권위를 잃고 쇠퇴하였다.
1회 때는 3.1 만세 운동으로 옥고를 겪으므로 작품을 출품할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5회 부터는 15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출품하였다. 오세창이 쇠퇴하고 있는 서화협화전에 끝까지 작품을 출품한 것은 민족미술이라는 그의 신념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의 작품 성향이 보수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기사(심영섭, 동아일보. 1929.10.30-11.5)는 당시의 협회에 관하여 어느 정도의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 조선 총독부의 ***기관인 총미전(조선미전)에 대하여 조선미술의 최고 지위인 것 같이 말한 모군의 색맹적 태도는 과연 가탄할 만한 것이었다. (중략) 우리는 협회의 미래를 보고 싶다. 반드시 애국주의적 견해는 아니지만 우리 조선민족으로서는 협전의 미래를 궁금하게 기다릴 것이다.”
이 기사는 당시의 미술가들이 (서가를 포함한) 조선미전 쪽으로 몰려가고, 협전은 위축되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과적으로 선전은 더욱 번성하고 협전의 내용은 빈약해져 갔다. 오세창은 협전을 끝까지 지키고, 서단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으나 선전에서는 소외됨으로 광복 이후에 그의 역할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원로의 자리에 머물고 있을 정도이었다.
오세창은 전각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전각을 깎는 데도 조예가 깊었다. 한국의 전각사에서 오세창은 전통 전각을 이어 받아 현대 전각의 맥을 이었다는 평을 받는다.(김양동) 오세창은 어려서부터 전각을 배웠다. 조선말에는 이미 장승업을 위시한 여러 화가들에게 자신의 전각 작품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전각을 시작한 것은 3.1 운동 이후에 잠시 일본에 머물었을 때에 시작하였다.
오세창의 각풍(刻風)은 편도각에서 오는 예리함과 깔끔한 처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완벽하게 하려는 긴밀성과 방각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꼽는다. 이기우는 오세창에게 전각을 배워서 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 한국 전각의 맥을 오늘까지 잇고 있다. 따라서 오세창의 영향력은 오늘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오세창은 전서와 예서를 잘 썼을뿐더러 전서와 예서를 혼합하여 독특한 서체로 작품을 만들었다. 자신의 가학(家學)으로 배운 서예를 바탕으로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오세창의 서체를 흔히 위창체(葦滄體)라고 부른다(이기우). 와당(瓦當), 고전(古錢), 갑골문 등을 이용한 구성적인 작품도 만들었다. 그는 전통적인 서법에 메달리지 않고 창안적인 작품을 선보이므로 한국 서예의 근대화를 일군 선구자로 불린다.
오세창은 전각가 또는 서예가로 이름을 남긴 것보다는 학자로서 한국 미술사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 김정희의 영향으로 고증학과 금석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 시대의 학자, 예술가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 그도 한예의 비각 문자체를 다양하게 응용하여 작품 제작을 하였다. 오세창의 서예와 전각 작품의 주된 서체는 전서와 예서이다. 이것은 조선말에 청의 고증학과 금석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김정희가 서법의 근원을 예서에 두었던 서예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오세창은 특히 전서에 집착하여 서예와 전각의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한국 서화를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한국 미술사를 확립한 학자이다. 현대에 와서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서예사에서 그의 위치를 새롭게 조명하여 정립하고 있다. 더욱이 광복 이후에 국전을 중심으로 서예사가 만들어지면서 소외되었던 그를, 오늘에 와서 현대 서예의 기점이 되는 인물로 삼으려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첫댓글 옥고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히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