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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하여 판결하는 솔로몬의 재판 / 열왕기상 3:16-28
어느 날 아침 한 초등학생 아이가, 부지런히 학교에 등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다가오더니, 아이를 꽉 잡는 겁니다. 아이는 순간적으로 “이게 말로만 듣던 유괴범인가” 싶어 너무 겁이 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이를 잡고는 고작 머리카락을 몇 개 뽑아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오늘 이런 일을 당했는데, 이상하게 그 아저씨가 내 머리카락만 뽑아갔어. 큰일 날 뻔 했어.” 그런데 너무 다행이라고 할 줄 알았던 엄마가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얘, 어떻게 하면 좋니. 정말 큰일 났구나.” 사연인즉, 그 아이는 어떤 유명 인사의 숨겨놓은 자식이었습니다. 범인은 이 아이가 친자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간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이 달린 문제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몇년 전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아이가 과연 친자로 판정이 났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이렇게 머리카락 한 올만 있으면 친자확인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약 이런 놀라운 기술이 솔로몬 시대에 있었다면, 솔로몬의 명재판도 필요 없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시대에는 이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이 아이가 누구 닮았나 정도였겠지요. 세상에서 어린아이를 보고, 아빠 닮았다, 엄마 닮았다 하면 참 좋아 합니다. 그런데 간혹 아빠도 별로 안 닮고, 엄마도 별로 안 닮은 아이가 있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할아버지 닮았다, 할머니 닮았다” 하면 됩니다. 그도 아니면 “삼촌 닮았다.” 하면 됩니다. 그런데 정말 이도저도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누굴 닮은 것만 가지고는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보세요. 솔로몬이 판결을 내리기가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참 어렵습니다.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도 못 하고, 그렇다고 누굴 닮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간난 아이가 “제가 이분 아들입니다” 하고, 스스로 증언을 할 수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여인이 다 직업이 창기니, 이 아이가 어떤 남자 아이인지도 확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하니, 증인 서 줄 사람도 아예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지극히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명쾌한 판단을 내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솔로몬의 지혜’란 무엇을 말하는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좋아, 그럼 한 가지 예를 들어 가르쳐 주지. 어느 커다란 아궁이에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중 한 사람만 새까만 그을음을 묻혔다면, 대체 둘 중 누가 세수를 했을 것 같으냐?” “물론 얼굴에 새까만 그을음을 묻힌 사람이겠죠?” “그게 아니다. 얼굴이 새까맣게 된 사람은 깨끗한 사람을 보고, ‘나도 깨끗하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한 사람이 씻게 되겠지.” “내가 다시 한번 질문할 테니 맞추어 보아라. 이 두 사람이 다시 아궁이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번에는 어느 쪽이 씻었을 것 같으냐?” “그야 물론, 말짱한 쪽이겠죠.” “허허, 그대는 아직도 지혜를 얻지 못하였구나. 깨끗한 사람은 씻다 보니 별로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것이고 더러운 사람은 상대방이 왜 씻었는지를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더러운 사람이 씻었다는 것이 맞는 답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질문하겠다. 두 사람이 세 번째로 아궁이에 들어갔다 왔다면 누가 씻겠느냐?” “이번에는 확실히 답할 수 있습니다. 바로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정말 지혜가 없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두 사람이 똑같이 아궁이에 들어갔다 왔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고, 한 사람은 더러울 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솔로몬의 지혜니라.”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는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재판의 내용은 한 집에 사는 창기인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두 여인은 각기 3일의 간격을 두고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밤에 한 여인이 자면서, 아들을 눌러 죽이게 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죽은 자신의 아이와, 다른 여인의 아이를 바꿔치기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죽은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고, 살아있는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두 여인의 쟁론에 대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라 하여, 살아있는 아들을 둘로 나눠서 두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살아있는 아들의 진짜 어머니 되는 여인은, 아들을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죽였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바꿔치기한 여인은, 내 아들도 저 여인의 아들도 되지 못하도록 나눠 달라고 합니다. 두 여인의 각기 다른 반응을 보고, 솔로몬은 아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재판과 하나님의 지혜를 연결하여 이해함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재판은, 어렵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곤란한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곤란한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의 수준이라면, 솔로몬이 기도하여 받은 지혜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문제 해결의 능력이 지혜의 가치이겠습니까? 솔로몬이 기도하여 받은 것이라면, 세상에는 없는 것이고, 인간의 능력으로도 얻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처럼 어렵고 곤란한 재판을 해결하는 지혜가, 세상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지혜를, 세상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하여 해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재판이 증거하고 있는 지혜의 가치를, 문제 해결의 능력에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재판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 세상에서는 얻을 수도 배울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지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두 여인이 한 아들을 서로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에 대해, 솔로몬의 해결 방법은, 칼로 아들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두 여인 중 진짜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가 아닌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기에, 아들을 죽여 나눠준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여서 나눠 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아들은 죽고 상대방 여인의 아들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분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기에, 칼로 나누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가짜가 누구인가를 증명한 것입니다. 아들이 죽을 것을 불쌍히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 그것은 곧 긍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지혜로운 마음에 의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있어서 재판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본래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선악은 하나님만이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고자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분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의 분별은, 단지 착하고 나쁜 것을 가려내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재판에서, 단순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여인을 가려내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혜가 없을 때는, 거짓말하는 여인을 가려내는 것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어머니의 긍휼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재판이 보여주는 선은 긍휼이며, 악은 긍휼을 무시한 채 자신의 욕망만을 내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재판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 이스라엘을 살렸음을 보여주는 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에, 순종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선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무시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갖고자 하고, 세상의 힘에 기대는 것이야 말로, 악이라고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답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할 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그대로 주어진 원칙입니다. 성도답다는 것은, 그가 행하는 행위로 인해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것으로 증거됩니다. 긍휼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에, 그에게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원칙 아래서, 교회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 곧 긍휼의 마음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교회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긍휼입니다. 그런데 긍휼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 받음으로, 사망에서 건짐 받은 존재들이기에, 그런 관계에서 맺어져야 하는 것은, 불쌍히 여김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 받음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해롭게 하는 것이야 말로, 긍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기에, 악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언약 아래 존재합니다. 다윗언약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윗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의 원칙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했던 것이고, 이것을 위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28절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두 창기 사건의 재판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솔로몬의 권위가 백성들의 마음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하나님, 하나님의 솔로몬이 된 것입니다. 상승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권위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의 표징은, 재판의 지혜로운 판정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의 지도자들이, 군사적 승리로서 권위의 표징을 보여 주었던 것에 비해,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요구되는 권위였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왕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백성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유익을 주고 죄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무엇도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삽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목적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광고가 붙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 임금님이 60회 생일을 맞아, 모든 백성들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어떻게 되신 것 아냐?” “여기엔 분명 무슨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맞아. 우리의 소원을 그대로 적어 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사람들은 아무도 임금님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명이 내려진 지 일주일이 지나도,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소원을 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해서 밑질 것은 없을 거야.’ 그리고는 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논이 100평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 당장 논 200평이 주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따라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앞을 다투어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큰 것을 말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까 봐 아주 조심스러워했습니다. “저는 소가 한 마리 필요합니다.” “저는 집이 한 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작은 소원을 한 가지씩 성취하여 온 동네가 기쁨으로 떠들썩했습니다. 그때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지혜로운 청년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도 임금님께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임금님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잠시 후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마침 나에게 후손이 없어서, 누구에게 왕좌를 물려주어야 하나 걱정하고 있던 참이오. 당신은 정말 현명한 사람 같구려. 모든 소원을 들어 주기로 약속했으니, 당신의 소원도 물론 들어 주겠소. 자,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아들이오. 동시에 당신은 이 왕국 전체를 갖게 되는 셈이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보다 더 큰 응답을 주셨습니다.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구원과 천국과 면류관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대보다 더 크고, 영화로운 것으로 주십니다. 언제나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10-11절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이 내용을 보면,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여겼다면, 부와 장수를 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강과 강함은, 곧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마음을 간절히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목사나 장로, 인간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다스려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의 원칙 아래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기준 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긍휼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 밖에 있는 것이고, 교회로 여겨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긍휼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세상에서 배울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는, 십자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에 의해서 드러나는 악은, 인간이 인간의 것을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잃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을 고집하는 것도, 결국은 긍휼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긍휼 앞에서는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도, 헛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 지혜로 세상과 교회와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세상의 것이 아니고, 내 능력도 내 열심도 내 희생도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게 될 때, 긍휼에 대한 감사함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지혜는, 오히려 뭘 아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솔로몬이 고백한 것처럼, 아이 같아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찬송가 375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2. 아무 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3. 아이 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이 고백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성경은 물론 지혜를 문제해결능력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어디 내 머리나 지식에서 나온 능력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물어서 나오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문제해결 능력’이 아니라 ‘문제해결 믿음’이다. 곧,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기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철저하게 그 분만 의지하고 의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참된 지혜를 주십니다. 그 지혜를 통해 내 앞에 닥쳐온 어려운 일들, 중요한 문제를 넉넉히 해결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보내신 곳, 맡기신 일을 잘 해결하여, 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펼쳐나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시대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는 마음, 듣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지혜롭게 섬기는 이 시대의 솔로몬 같은 성도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행한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날이 있음을 잊지 말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충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솔로몬의 꿈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지혜와 절대권력과 부귀와 명예도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헛된 꿈, 자기성취의 욕망에 불과합니다. 참된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참된 지혜임을 알게 하옵소서. 그것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만 ‘선악 분별’을 넘는, 궁극적인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혼을 온전히 맡기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