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재봉틀이 두 생명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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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추기경은 정부가 6ㆍ25 전쟁 참전 유공자에게 수여하는 국가 유공자 증서와 호국 영웅 기장증을 받았다. 정 추기경은 회고록 ‘추기경 정진석’을 통해 이를 외부에 처음 공개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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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추기경이 받은 호국 영웅 기장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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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장정들. |
“쾅!”
갑자기 지뢰가 터졌다. 앞서 가던 장병들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다. 일행은 모두 넋이 나간 듯 혼비백산했다.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천주님! 살려 주세요. 우리 죄인들을 당신 품에 거두어 주세요!”
지뢰 터져 아수라장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기도를 했다. 생사를 오가는 기로 속에서 하느님께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진석도 조금만 앞서 갔다면 지뢰를 밟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말 죽음과 삶은 종이 한 장보다 못한 차이로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폭발이 있어서 주변이 아수라장이 됐을 때는 못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런 확신이 더 생겼다. 또 하느님은 왜 나를 살려 두실까 하는 묵상도 자주 하게 됐다.
진석의 일행은 마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마산의 북쪽에 위치한 함안에 집결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으로 온 것이었다. 서울에서 1950년 12월 20일 떠나 해를 넘겨 1월 13일에야 최종 도착지에 이른 것이다.
25일 정도를 걸어 행군하면서 많은 장정이 희생되고 다쳤다. 당시 유례없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가 군인으로 소집했으니 알아서 먹여 주고 입혀 주지 않겠나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던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은커녕 식사조차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장정은 긴 여정에 발이 부르트고 몸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부상과 굶주림, 추위로 건강 상태가 점점 나빠져 갔다.
더구나 먹을 것이 부족하고 극한 추위에 잠자리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병자나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해도 이들을 돌봐주는 준비나 병력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서울에서 출발한 행군은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차출돼 온 이들도 있었는데
“그래도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불평할 정도였으니 군기가 말이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진석은 힘든 길을 걸어 드디어 다른 장정들과 함께 함안의 초등학교 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한겨울에 텅 비어 있는 초등학교는 밖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나마 눈바람을 막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막사가 된 초등학교 교실 바닥에 짚을 깔아서 추위를 막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이불도 없고 요도 없이 그대로 자야 했는데 추운 날은 이가 덜덜 떨리기도 했다.
며칠 지나면서 아침이 되면 옆에 시체가 생겼다. 추위에 동사한 것이다. 한창 젊은 장정들의 식사라고는 하루에 세 번 소금을 조금 뿌린 주먹밥이 다였다.
크기도 테니스공 정도만 하니 식사라 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고 모두가 배고픔에 허덕이며 훈련을 받았다. 얼마 후에는 작은 주먹밥조차도 배식이 잘 안 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주먹밥 반 개를 잘라 담배 한 개비와 바꾸어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있었다. 주는 주먹밥을 다 먹어도 굶어 죽는 판인데 반을 잘라 담배와 바꾸니 진석의 눈에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이들은 금방 죽게 됐다. 담배가 도대체 뭐길래 목숨과 바꾸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독이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나왔다. 그러자 개인적으로 돈이 있거나 값어치 있는 물건을 지닌 사람들은 철조망 근처에서 김밥이나 떡 등 요깃거리를 사다가 연명했다.
진석에게도 어머니가 피란 가면서 남기고 간 재산 1호(?)였던 재봉틀을 판 돈이 주머니에 있었다. 어머니께는 무척 미안했지만 어차피 적 수중에 들어갈 물건이었다.
행군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동네 친구 한 명이 같이 생활했는데 그 아이는 몸이 무척 재빠르고 성격도 쾌활하고 임기응변이 강했다. 많은 국민방위군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친구였다.
“진석아! 내가 철조망 밖으로 가서 김밥을 사올게!” 진석이 돈을 주면 그 친구가 잽싸게 철조망 근처에 가서 김밥을 한 줄씩 사왔다. 그러면 진석과 친구는 김밥을 한 개씩 똑같이 나눠 먹었다.
돈이 모자라니 세 끼는 아니고 한 끼만 보충해서 먹었다. 그래서 둘은 살았다. 아마도 그 친구와 하루에 한 끼씩이라도 김밥을 안 먹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재봉틀은 그렇게 유용하게 두 생명을 살렸다.
그러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졌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로 배를 채우고 가마니로 이불을 삼는 참상 속에서, 소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자ㆍ동사자ㆍ병자가 수천 명이나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951년 1월 15일 부산에서 열린 피난 국회는 첫날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추궁했다.
그에 따라 정부는 2월 17일 36세 이상 나이가 많은 장정들을 귀향시켰으며, 결국 국회 결의에 따라 5월 12일 국민방위군은 해체됐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국고금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국회 진상조사단에 의하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105일 동안 인원을 조작해 24억 원어치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 2000섬의 양곡을 부정 처분했다.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려 착복했는데 국회 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 원 또는 60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지도자들의 작태… 국민 공분 사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가는데 국민방위군 수뇌부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흥청망청 뿌리고 다녔다.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것이었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때 장정 5∼8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인할 수 없다. 참고로 미국 통계를 보면 6ㆍ25 전쟁 내내 한국군 사망자는 14만 명 정도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준장 등 5명이 그해 6월 고등군법회의에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고 8월 12일 총살이 집행됐다.
국가의 위기가 눈앞에 닥쳤는데도 지도자란 사람들이 개인의 배를 채우기 위해 많은 젊은 장정들의 목숨을 희생시켰다는 데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