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업적과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적 역사 사실..
단군 :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BC 2333년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동명왕 : 이름 주몽,추모,상해,도모,동명성왕이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칭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온조왕 :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BC 5년(온조왕 14)에는 남한산에 천도하고 백제를 세움.
박혁거세 : 박씨의 시조. 휘 혁거세. 신라를 세움. BC 37년 서울에 금성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광개토대왕 : 이름은 담덕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그가 쓴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이사부 : 일명 태종. 성은 김씨로서 내물왕의 4대손이다.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신라에 귀속시켰다.
백결선생 : 신라 자비왕(재위 458∼479) 때의 거문고의 명인. 몹시 가난하여 어찌나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었던지
세상에서는 “현순백결(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가리 찢어짐)”의 문자를 빌려 백결선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백결선생은 한점 흔들림이 없이 오직 거문고만을 사랑하여 모든 희로애락을 거문고로 풀었다.
의자왕 : 백제의 제31대 왕(재위 641∼660). 백제의 마지막 왕.
계백 : 백제 말기의 장군.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 출전.
관창 :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화랑. 황산벌에서 신라군·백제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 중 관창은 단신 적군 속에 돌입하여 백제의 포로가 되었는데
계백은 그 어린 소년의 용맹에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신라군에게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재차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다시 포로가 되었다.
계백은 그의 목을 벤 후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에게 돌려 보냈다.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
김유신 : (595~673)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본래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
문무왕 : (?~681)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원효대사 : (617~686.3.30) 신라 때의 승려. 설총의 아버지이다.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혜초 : (704~787) 신라의 고승. 인도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 지음.
장보고 : (?~846)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진에 진을 설치.
대조영 : 발해를 세움.
강감찬 : (948~1031) 고려시대의 명장.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서희 : (942~998) 고려의 외교가 ·문신. 993년(성종 12) 거란의 내침 때 중군사로 북계에 출전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안과 서경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는 안 중에서 후자를 택하기로 했으나
이에 극력 반대, 자진해서 국서를 가지고 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정중부 : (1106~1179) 고려시대의 무신. 1173년 동북면 병마사간의대부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의 집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살해하였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 문하시중이 되고 1175년 궤장을 하사받은 뒤 치사하였다.
1179년 같은 무신인 경대승에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최무선 : (?~1395) 고려 말, 조선 초의 발명가. 왜구가 창궐하자 화약제조법의 필요성을 절감.
원나라 이원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1377년(우왕 3)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여 화약을 만들고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육화, 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등 각종 화기를 제조.
김부식 : (1075~1151)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삼국사기를 지음.
지눌 : (1158~1210) 고려의 승려. 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 ·교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의천 : (1055~1101) 고려시대의 승려. 천태종의 개조. 고려의 불교가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를 역설하고, 화엄종인 규봉의 학설로 고려의 교종을 통일한 후,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의 중심사상인 일불승 회삼귀일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유학에도 정통하였다.
이종부 : (1360~1425)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쓰시마섬을 정벌.
정몽주 : (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
문익점 : (1331~1400) 고려시대의 학자 ·문신.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최충 : (984~1068) 고려의 문신. 1047년(문종 1) 문하시중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 때 농번기의 공역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1053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일연 : (1206~1289) 고려시대의 승려 ·학자. 삼국유사 지음.
조선시대
최영 : (1316~1388) 고려의 명장 ·충신. 수차 왜구를 토벌,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했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 북변 일대를 랴오둥에 귀속시키려 하자 랴오둥정벌을 계획, 팔도도통사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이성계 등의 위화도회군으로 랴오둥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성에 난입하자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참형되었다.
황희 : (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맹사성 : (1360~1438)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황희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
장영실 :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고정된 정남일구,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 구리 ·철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이듬해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잡혀가 장형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신숙주 : (1417~1475) 조선 전기의 학자 ·문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응교에 특진하고 부제학 등을 거쳐,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로 계유정난에 참여, 정난공신 2등이 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국조보감, 세조실록, 영모록 등을 찬수했다.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학자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보한재집, 북정록, 해동제국기, 사성통고 등이 있다.
한명회 : (1415~1487) 조선 전기의 문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에 올랐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윤비 사사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가 후에 신원되었다.
이율곡 :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가.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이퇴계 :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 주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 ·기 이원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 것은 7정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을 주제로 한 기대승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신사임당 : (1504~1551) 조선중기의 여류 서화가. 강릉 출생이며,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침공·자수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곽재우 : (1552~1617)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홍의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조헌 :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김시민 : (1554~1592)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를 대신하여
성지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춘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순신 : (1545~1598) 조선 시대의 명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 적선 13척을 분쇄한 것을 비롯하여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고 7월 한산도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대첩의 큰 무공을 세웠다.
이어 정헌대부에 오르고 다시 가토 요시아키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었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격파, 남해안 일대의 적 수군을 완전히 일소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확충 ·난민구제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에 앞서 명 ·일 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 때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겨 철수하는 적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적군을 기습하여 혼전중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저서에 《이충무공전서:난중일기》가 있다.
태조이성계 : (1335~1408) 조선의 제1대 왕(재위 1392∼1398). 원나라의 나하추가 함경도 홍원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의 삼선 ·삼개가 함경도 화주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서울을 한양으로 옮겼다.
정종 : 조선 제2대 왕(재위 1399∼1400).
태종 : (1367~1422)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세종대왕 : (1397~1450)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1442년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함.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
문종 : (1414~1452)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유학 및 천문 ·역법·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몸이 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였다.
단종 : (1441~1457)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
세조 : (1417~1468) 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 경제정책에서 과전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과전을 폐하고 직전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역학계몽요해, 훈사십장, 병서대지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 동국통감 등의 사서를 편찬하도록 했다.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 속육전, 원육전, 육전등록 등의 법전과 교령 ·전례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그의 치적 중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 ·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필인하기도 했다.
사육신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한 조선 전기의 6총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을 말한다.
생육신 :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다.
논개 : (?~1593) 임진왜란 때의 의기. 임진왜란 때 그녀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전사한 장군들의 원한이라도 풀어주고자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꾀어
벽류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권율 : (1537~1599) 조선 중기의 명장.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홍길동 :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1440년(세종 22) 장성군에서 태어난 역사상
실존인물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홍길동 출생지를 복원한 관광마을도 있다.
임꺽정 : (?~1562) 조선시대의 의적. 양주의 백정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삼학사 :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세 학사. 홍익한 ·윤집·오달제 등을 말한다.
박문수 : (1691~1756) 조선 후기의 문신.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들을 적발했다.
한석봉 : (1543~1605) 조선 중기의 서예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 서예계에서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다.
단원 김홍도 : (1745~?) 조선시대의 화가. 1788년 스승 김응환이 왕명을 받고
몰래 일본의 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떠날 때 그를 수행, 부산까지 갔으나 김응환이 거기서 병으로 죽자
홀로 쓰시마섬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해 가지고 돌아왔다.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모습을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 많다.
김삿갓 김립 : (1807~1863) 조선시대의 방랑시인.
김정호 : (?~1864)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대동여지도 완성.
영조대왕 : (1694~1776)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속대전을 속오례의와 함께 편찬한 것은 왕조의 법치체계 전반을 재정비하는 의미를 가졌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 즉 청개천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정조 : (1752~1800) 조선의 제22대 왕.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사도세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홍씨다.
규장각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정약용 : (1762~1836)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저서에 《정다산전서》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마과회통》 《모시강의》 《매씨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상례사전》 《사례가식》 《악서고존》 《주역심전》 《역학제언》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이 실려 있다.
조선 말기 ~ 근대사회
전봉준 : (1854~1895)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별명 녹두장군.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전봉준은 순창에 피신, 동지 손화중·김덕명·최경선 등과 재거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김대건 : (1822~1846)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황진이 : 조선시대의 시인 ·명기. 별칭 : 일명 진랑, 기명 명월. 주요작품 :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봉별소양곡시.
홍경래 : (?~1812)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난의 최고지도자. 평서대원수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하였다.
안중근 : (1879~1910.3.26) 독립운동가.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 동양평화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
이완용 : (1858~1926) 한말의 정치가. 1896년(건양 1) 아관파천 때 친러파로서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윤동주 : (1917.12.30~1945.2.16) 시인.주요저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주요작품 : 서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지석영 : (1855~1935) 조선 후기의 의사ㆍ문신ㆍ국문학자. 주요저서 : 자전석요(1909) 주요작품 : <신정국문>(1905)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손병희 : (1862~19220)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 ·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사망했다.
유관순 : (1902.11.17~1920) 한국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즉각 고향으로 내려갔다.
4월 1일 아오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과 어머니 이씨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서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중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갖은 악형에 시달려 옥사하였다.
안창호 : (1878.11.9~1938.3.10) 독립운동가 ·사상가. 호는 도산.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3 ·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방정환 : (1899.11.9~1931.7.23)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주요저서 : <소파전집>(1940) <소파 동화독본>
김두한 : (1918~1972.11) 정치가. 3·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아들이다.
서울 교동국민학교를 마치고 협객으로 활동하면서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하였다.
광복 후 한독당 재정위원·대한민주청년연맹 부위원장·대한노조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지냈고
반탁운동과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선거소송,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및 국회발언대에서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미리 준비한 오물을 투척한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 등 독특한 정치생활을 하고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72년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이상 : (1910.9.14~1937.4.17) 시인·소설가. 주요작품 : <오감도> <날개> <봉별기>보성고보를 거쳐
경성고공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후에 거기서 나와 문학활동에 전념한다.
이중섭 : (1916.4.10~1956.9.6) 주요작품 : <소> <흰 소>작풍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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