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녹수
張綠水
출생 - 사망? ~ 1506
가난해서 시집도 여러 번 가고 자식까지 둔 여인이 왕에게 발탁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바로 장녹수(張綠水, ?~1506) 이야기이다.
‘연산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장녹수는 흥청(興淸)이라는 기생 출신에서 일약 후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연산군 시대의 신데렐라였다고나 할까?
30세의 나이에도 16살 꽃 다운 여인으로 보였다는 동안(童顔) 장녹수는 자식을 둔 후에도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의 길로 나섰고,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탕한 삶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다. 그녀는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발판 삼아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모든 상과 벌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후 장녹수는 반정 세력에 의해 제거 대상 1호로 떠올랐고, 참형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장녹수의 파란만장한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1. ‘흥청’으로 궁궐에 들어오다
먼저 장녹수의 용모와 성격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을 보자.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張漢弼)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첩의 자녀였기 때문에 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다.
장녹수는 가난해서 시집을 여러 번 갔으며, 마지막에는 제안대군(齊安大君: 예종의 둘째 아들)의 노비로 들어가 그곳에서 대군의 노비와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이후에 그녀는 가무(歌舞)를 익혀 이름을 떨쳤다.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다1)”는 표현으로 미루어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춤과 노래에 탁월한 능력을 겸비하여 소문이 자자했던 듯하다.
연산군은 그 소문을 듣고 그녀를
흥청(興淸)으로 뽑아 궁궐에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흥청은 연산군 대에 뽑았던 일 등급 기녀였다. 연산군은 기녀 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창기로서 얼굴이 예쁜 자들을 대궐 안으로 뽑아들였다. 전국의 개인 몸종과 지방의 관비, 그리고 심지어 양갓집 여성들까지 강제로 뽑아 올려졌다.
이때, 기생의 칭호를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특별한 기생을 승격시켜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 하여 ‘흥청(興淸)’이라 불렀다. 흥청 중에서도 왕을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하고, 왕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구분하기도 했다2).
연산군은 흥청과 관련하여 새로운 명칭과 칭호를 많이 만들었다. 흥청의 보증인은 ‘꽃을 보호하고 봄을 보탠다’는 뜻의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하였고, 흥청이 입는 옷은 ‘상서로움을 맞이하는 옷’이라 하여 ‘아상복(迓祥服)’이라 하였으며, 흥청의 식료품을 저장하는 곳은 ‘화려함을 보호하는 창고’라 하여 ‘호화고(護華庫)’라 하였다.
아름다운 여자를 각 도에 가서 찾아내는 자를 ‘붉은 것을 캐는 사신’이라 하여 ‘채홍사(採紅使)’라 하고, 나이 어린 여자를 찾아내는 자를 ‘푸름을 캐는 사신’이라 하여 ‘채청사(採靑使)’라 하였다.
특히, 연산군은 경복궁의 경회루를 흥청들과 즐기는 음탕한 놀이 장소로 삼았다. “경회루 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ㆍ운평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笙簧)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3).”는 기록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생활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경회루에서 국가 재정을 물 쓰듯이 쓰면서 흥청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연산군을 두고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로 저주했다.
이처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며 연산군의 향락을 위해 뽑힌 흥청들. 그런 흥정 중에서도 잠깐이지만 가장 반짝 출세의 길을 걸은 인물이 바로 장녹수였다.
2. 연산군의 총애를 업고 권력의 날개를 달다
궁궐에 들어 온 장녹수는 본격적으로 연산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때로는 노예처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깊이 빠졌는데, 화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喜色)을 띨 정도였다. 장녹수는 요사스러운 행동으로 연산군의 실정(失政)에 기름을 부었다.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냈고, 금은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ㆍ전답ㆍ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그녀 덕분에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金守末)은 계속해서 벼슬이 올라갔는데4), 이는 “왕이 이때 한창 장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승서(陞敍)한 것이다5)”라는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金孝孫)도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에 제수되는 혜택을 받았다6). 1502년(연산군 8)~1503년(연산군 9)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포악한 짓을 많이 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는 크게 근심하였다.
임술ㆍ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狂暴)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왕후가 또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연산군일기] 1506년(연산군 12) 9월 2일
할머니의 근심 어린 충고를 듣지 않고, 연산군은 장녹수를 더욱 가까이 하였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1502년(연산군 8)에 종4품의 숙원(淑媛)으로 있었는데, 이듬해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7).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더욱 권력을 남용하였다. 장녹수는 궁 밖의 사가(私家)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8), 모습이 고운 두 여인을 시기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父子兄弟)를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다9).
옥지화(玉池花)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했으니10),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위세를 믿고 장녹수의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다.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의 경우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는데,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11).
사정이 이쯤 되니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무뢰(無賴)한 무리들이 장녹수에게 다투어 붙어
족친(族親)이라고 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12)”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졌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3. 길거리에서 맞이한 비참한 최후
1506년(연산군 12)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나인들과 잔치를 하다 시 한 수를 읊었다.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읊기를 마치자 연산군은 갑자기 눈물을 두어 줄 흘렸다.
다른 여인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으나, 장녹수와 전비(田非, 숙용전씨, ?~1506)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전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13)”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앞날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이날은 바로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다.
장녹수는 연산군 폭정의 핵심이었던 만큼,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세력은 온갖 비난의 대상이었던 장녹수 체포에 나섰다.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軍器寺) 앞에 끌려온 장녹수는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14).
장녹수가 빼앗아 쌓아두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으며, 장녹수의 하인들은 전일에 기세를 믿고 남의 집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사람을 때려 다치게 했다는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15).
그리고, 대간들은 기생인 장녹수와 전비의 사례를 들어 이를 경계하고 나라에 예법을 세울 것을 간하였다.
연산 때에 큰 예법이 이미 무너져 내외가 구별이 없으므로 청탁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궁문이 저자와 같았습니다. 전비(田非)와 장녹수의 무리가 안에서 고혹(蠱惑)하고 내수사의 붙이들이 밖에서 횡포를 부리며, 안팎으로 결탁하여 간계를 부리고 교묘한 짓 하기를 못할 것이 없이 하며, 심지어 사소한 송사에 이르기까지 연줄을 타 해당 관사를 거치지 않고 궁중에서 결단하면서 반드시 ‘어결(御決: 왕의 결정)’이라 하므로, 감히 누가 무어라고 하지 못하여 하늘이 노하고 사람이 분히 여겨 마침내 패란(敗亂)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니, 이는 신 등이 목도한 바로서 전하께서 경계 삼으셔야 할 바입니다.- [중종실록] 1507년(중종 2) 7월 2일
기생에서 후궁의 반열에 올라 연산군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장녹수. 독재정치로 종말을 향해 치닫던 연산군의 말년 치세, 그녀는 왕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그녀의 선택은 연산군의 음탕한 생활과 악행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다.
정국은 독재와 공포로 이어졌고, 반정의 순간 장녹수는 연산군 정권의 실질적인 2인자였다.
인과응보였을까? 결국 장녹수는 길거리에서 돌무더기에 깔려 온갖 비난을 받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드라마 <장녹수>의 주제가처럼 ‘부귀와 영화도 한 편의 꿈이 되었던’ 장녹수의 삶은 후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