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8. 험담이나 비방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면
“대화할 땐 진실하고 따뜻하게 사실만을 말하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한 주간 내내 성인의 말씀이 저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뇌리 속에 남아 있었어요.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이 대부분 험담과 비방에서 비롯된다는 것. 가만히 돌아보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대부분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면 단골 레퍼토리처럼 떠오르는 것도 역시 말로 짓는 죄였습니다. 화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서럽고 그래서 그 누군가의 흉을 찾아내어 보태고 붙이면서 북받치고 꼬인 감정을 풀어내려 했지요. 하지만 그 순간은 시원하게 털어버린 것 같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우울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요. 궁금합니다. 이 세상엔 정말 남 이야기 절대 안 하면서 말로 죄짓지 않는 사람 있을까요? 사실 남의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 성녀 같은 사람이 제 주변에 있습니다.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이상하죠? 자기에게 엄격한 성인 같은 그 사람의 얼굴은 빛이 나기보다 어두워 보였거든요. 그에게 무척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절대로 그 사람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때론 차라리 욕이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이유가 뭘까요? 정말 험담이나 비방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인의 지혜를 구하는 김 수녀가 여덟 번째 편지를 드립니다.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말’은 선물이며 생명의 도구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이 되고 생명을 죽이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말로 죄를 짓고 말로 상처를 입기도 해요. 물론 이 시대만의 이야기도 아니고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을 하는 우리의 혀는 자칫 뱀의 혀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뱀의 혀는 둘로 나누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험담을 할 때마다 듣는 사람의 귀에 독을 넣어주게 돼요. 또 다른 혀는 물론 비방당하는 사람의 명예에 독을 넣게 되겠지요.
어떻게 해야 험담을 안 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법 같은 해결책은 없지만 우선 자신이 하는 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할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좋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유혹입니다. 그냥 좋다고 하면 나도 좋은 사람인 거 같거든요. 김 수녀가 만난 성녀 같은 그 사람, 절대 험담하지 않고 긍정적인 말만 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하기 때문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남에 대한 흉을 보는 자신이 정직하다고 말하거나, 또 어떤 이는 허영에 빠진 사람에게 트렌디하다면서 부추기거나 둘 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루머에 집착해 험담하거나 반면에 그 루머를 듣고도 모른척하거나, 혹은 좋은 것만 말해도 모두 다 사실과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봐요.
누군가에게 타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때 먼저 판단하기보다 그 말이 과연 사실인지를 알아보면 어떨까요? 혹시 사실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위해 해명도 해줄 수 있고요. 물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겠지만요.
거짓은 거짓이고 악은 악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해줄 때는 정말 많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요. 타인의 흉이나 험담을 하지 않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바로 당사자에게 그 잘못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험담이나 비방을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기에 누구나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으면 해요. 둘째는 마치 수술칼로 힘줄과 신경을 분리하는 외과 의사처럼 가능한 정확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 자체만을 이야기합시다. 사실에 티끌만큼이라도 보태거나 빼서도 안 되겠지요. 그때에는 결코 어제의 일로 현재의 행위를 단정하거나 과거를 추측해서도 안 되고 미래도 상상하지 않았으면 해요. 셋째는 그 사람을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급하게 판단하려 하거나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요.
마지막으로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할게요. 때론 ‘말로 죄를 지을 바에야 차라리 할 말만 할게요’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또한 유혹입니다. 험담을 멈추는 것이 어려우니 아예 안 하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는 피했으면 해요. 사실 현인들이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익하고 해로운 말을 줄이라는 뜻이지요. 말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합니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해야겠지요. 다만 대화를 할 때엔 진실하고 따뜻하게 말해주고, 단순하게 사실만을 말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9. 성인께서도 ‘유혹’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늘 깨어 기도하세요”
- 톨렌티노의 성 니콜라오의 유혹. 신심 생활이나 영성 생활을 하는 데 장애물은 어쩌다 만나는 맹수가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하루살이 같은 유혹이다. 이러한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한동안 불볕더위와 기록적인 폭우로 슬픈 소식이 많이 들렸습니다. 다행히 집중호우는 지나고 가끔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과 따스한 햇볕으로 치유받는 느낌입니다. 그런데요. 그것도 잠시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답니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물가는 계속 오를 것이고,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도 언제 또 어떻게 덮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마음이 불안할수록 유혹이 찾아온다죠. 불평불만이 생기고 우울과 슬픔에 빠지게 합니다.
사실 지난 편지에 성인께서 하신 말씀에서 ‘유혹’이란 단어가 마음에 꽂혔습니다. 유혹하면 뇌물이나 마약 혹은 성적이고 원초적인 그릇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멀게만 느껴졌었지요. 그런데 가만히 멈춰 돌아보면 유혹이 아닌 것이 없는 것 같네요. 어쩌면 유혹인지도 모르고 그저 익숙하게 바라보고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할 때 아담과 하와처럼 달콤한 사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성인께서는 ‘유혹’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유혹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작은 유혹에도 깨어 살고 싶은 김 수녀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군요. 이런 고달픈 현실에서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불안 자체는 유혹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마음속 긴장과 두려움은 유혹을 생기게 하는 원인은 될 수 있어요. 유혹은 저를 포함해서 누구나 언제든지 느낄 수는 있어요. 아주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떤 사람은 유혹을 느끼는 그 감정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느낌과 감정은 아무런 죄가 없답니다. 그런데요. 구별할 필요는 있어요. 유혹을 느끼는 것과 그 느낀 유혹에 동의하여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요.
살다 보면 유혹은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지요. 때론 아주 위험한 맹수와 같이 무섭게 공격하는 것도 있어요. 그럴 때 우린 방어적 경계태세를 갖추고 파괴적인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지요. 역설적일지 모르나 엄청나게 큰 유혹은 쉽게 빠지지는 않아요. 그만큼 우리도 방어태세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루살이처럼 성가시고 귀찮게 찾아오는 작은 유혹이 있어요. 이런 유혹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 하나로 쫓아버리기도 하고 때론 입속으로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의식하지 못해요.
가끔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진짜 죽음까지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를 향한 분노로 인해 험담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는 더 쉽겠지요. 또한, 어떤 사람을 간음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올 때가 있겠지만, 이 또한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아요. 그러나 은밀하게 만나 호의를 베풀고 정담을 나누기는 더 수월하겠지요. 결혼생활을 하면서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아도 작은 말로 상처를 주는 일은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의 물건이 무척 탐나고 갖고 싶다고 하여 훔치려고 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그 사람을 질투하고 시샘할 수는 있겠지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기는 어렵죠. 그러나 일상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이간질하거나 슬쩍 거짓을 끼워 넣는 유혹에는 빠질 수 있겠죠. 평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고 욕할 순 없어도 외면하고 모른 척할 수도 있겠고요.
신심 생활이나 영성 생활을 하는데 장애물은 어쩌다 만나는 맹수가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하루살이 같은 유혹입니다. 눈앞에 아른거려 뺨이나 코에 앉아 성가시게 하는 작은 유혹은 우리의 영혼을 분산시켜 신심 생활을 방해한답니다. 자칫 작고 사소한 유혹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허용하게 되면 일상이 되고 습관으로 스며들어 인격과 삶의 방식에도 문제가 되겠지요.
유혹에 대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소한 유혹을 멀리하려고 일일이 대응하거나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는 마세요. 단 한 가지, 사랑을 실천하세요. 사랑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구체적으로 나누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유혹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갖 유혹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명약이 있어요. 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유혹이 밀려들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니까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 내 힘으로 이겨 낼 수 없는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요. 그렇기에 늘 깨어 기도하는 연습을 매일 규칙적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0. 사랑의 삶을 살려면
“자신에게 필요한 덕 꾸준히 수행하고 노력하세요”
- 작은 덕이 쌓여 성덕을 이룬다는 마음으로 내가 잘해낼 수 있는 하나의 덕을 목표로 삼거나 나에게 필요한 덕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 살레시오 성인은 “한 가지 덕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많은 덕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다양한 형태의 성합.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성인께서 지난 편지에 ‘모든 유혹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사랑을 하라’고 하셨어요. 구체적으로 실천하라고요. 아마도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랑인데요. 이 사랑이란 것이 참으로 모호하고 관념적으로 들릴 때가 있답니다. 그럼에도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너무도 익숙해서 사랑한다고 말만 해도 마치 내가 진짜 사랑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미움과 시기 질투와 험담이라는 유혹 앞에 깨어 기도하고 주님을 사랑하라는 성인의 말씀이 너무 당연한데요. 순간 어린아이가 된 듯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노래 가사와 영화는 사랑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말합니다. 끝없는 예술의 원천이기도 한 사랑, 어쩌면 예술인들의 직업이 사랑을 말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전문가라 하면 종교인들이겠고요. 그런데 가끔은 ‘사랑’이란 말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인께서는 정말 어떻게 사셨기에 ‘사랑의 성인’ ‘애덕의 박사’ ‘우정의 성인’이라 불리게 되었을까요? 사랑의 실천가이신 성인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김 수녀의 말처럼 사랑이란 말을 많이 듣고 말하다 보면 관념에만 사로잡혀 그렇게 산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네요. 아마 나의 두 번째 편지에서일까요? 신심은 애덕에서 피어나는 불꽃이고 완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깐 사랑은 애덕으로 드러나요.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은 생물처럼 움직여 그 누군가를 향한 애덕으로 꽃피우니까요. 그럴 때 신심이고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 애덕이란 단순히 누군가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아요. 여왕벌이 날 때에 수많은 일벌에 둘러싸여 비행을 해요. 사랑은 사령관이 병사와 함께 움직이듯 다른 수많은 덕들을 이끌고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요. 그런데 사랑은 저마다 때에 맞춰 튼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덕도 저마다 아주 다르게 다뤄져야 해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애덕의 색으로 옷을 차려입기 때문이지요.
덕이라고 하면 왠지 크게 느껴지고 어렵게 생각을 할 것 같아 작은 덕(little virtu)라고 말할게요. 평범한 작은 덕은 일상에서 꼭 필요한 덕이며 어디서나 필요한 덕이지요. 누군가 나에게 물었어요, 작은 덕행 하나 실천해서 언제 성덕에 이를 수 있냐고요. 그럴 때마다 난 힘주어 말했지요. 일 년, 십 년이 걸리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하려는 노력이라고요, 단 매우 구체적인 아주 작은 덕,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하나의 덕을 목표로 연습하기를 바란다고요. 하느님을 향한 그 어떤 것도 작은 것은 없답니다.
물론 덕 중에는 인류역사에 영향을 주는 위대한 덕이 있겠지요.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리는 덕도 있겠고요. 엄청난 기부를 통해 가난한 이들을 살리는 덕도 있겠지요. 요즘처럼 유명한 연예인들이 재능기부도 있겠고요. 내가 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행자 중에서도 온유나 친절 겸손과 같은 내적 고행보다 금식과 맨발수행이나 매질과 같은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외적 고행을 더 선호하기도 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대단한 자선이나 기부 그리고 자극적인 외적 고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하지만 남의 이목을 끄는 것보다 나에게 정말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해요. 예를 들어 성격이 급해 기다리지 못하고 쉽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인내의 덕이 필요하겠지요. 평소 자기주장이 강해서 사람들과 자주 부딪친다면 겸손의 덕을 수행하고요. 스스로 교만하다고 느끼면 아주 쉬운 첫걸음, 단순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하세요. 친절함은 사랑의 꽃이랍니다. 화를 잘 내는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온유함의 덕을 구해요. 가능한 한 부드럽고 조용하게 이웃에게 다가가는 연습부터 하고요.
이렇게 내게 필요한 덕을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신심에 유익하고 이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어떠한 덕이든 노력하다 보면 유혹도 죄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모든 다른 덕과도 만나게 돼요. 욥이 인내의 덕을 쌓음으로써 많은 유혹과 싸워 다른 덕들을 살아갈 수 있었듯이 한 가지 덕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많은 덕을 만날 수 있어요.
‘사랑합니다’란 말은 ‘애덕을 실천할게요!’라는 의미의 사랑 고백이란 걸 기억해주세요.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1. 온유의 덕을 살려면
“주님께 의지하며 자신에게 먼저 온유하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쓸쓸해지는 가을입니다. 자칫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적정 온도의 우울감은 오히려 고요함을 유지하게 해주나 봅니다. 마음의 양식을 쌓기에 참 좋은 9월에 받는 성인의 편지는 영혼단련을 위해 뭔가 막 해보고 싶어집니다.
성인께서 지난 편지에 사랑을 하려면 애덕을 실천하라 하셨어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자신에게 부족한 내적인 작은 덕들(little virtues) 중 하나만 구체적으로 시작해보라고요. 사실 제가 성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덕을 성인께서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격도 급하고 표현도 직설적이라서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참 부럽습니다. 물론 어떤 이는 타고나게 부드러운 성격과 친절한 태도를 지녔지요. 성인께서는 타고난 것이 아닌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온유의 꽃을 피우셨습니다. 그렇기에 저 자신에게도 희망을 봅니다.온유의 덕을 쌓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력하다 보면 정말로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온유의 덕을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점점 짧아져 가는 그래서 더 보석 같은 가을, 마음의 일을 하면서 영혼의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온유의 덕을 쌓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무엇보다 김 수녀 자신에게 먼저 온유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떻게요? 자신이 부족하고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자책하고 비난하지 마세요. 그러니깐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았으면 해요. 자칫 가파르고 높은 오르막길에서 열심히 오르다가 용기를 잃고 포기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불완전함에 너그러워지세요.
때론 잘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으로 자신의 잘못에 화를 내고 또 이 화낸 것에 대하여 짜증 내고 짜증 낸 것에 대해 또 짜증을 낼 때가 있어요. 마치 평정심을 잃은 재판관처럼 재판할 때 죄에 대한 신중한 식별이 아닌 분노감정에 휩싸여 자신을 과시하는 잘못된 판결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가 잘못할 때 화를 내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부드럽고 다정하게 하는 훈육이 훨씬 더 유익하지요.
자신에게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격정에 사로잡히기보다 자신에게 연민을 가지고 부드럽게 조용히 타이르세요. 화를 내고 요란스럽게 하는 반성보다는 더 깊은 성찰을 이뤄낸답니다. 가끔은 괴팍하게 굴거나 급한 성격에 화를 낼 수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말해요. “내 불쌍한 마음아, 그렇게 결심을 했는데도 피할 수 없었구나. 그래도 용기를 내자. 다시 일어나서 이 구렁에서 빠져나가자. 주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두 번째는 온유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심을 해요. 필요한 덕을 간절히 구하면서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계심을 믿어요. 그런데도 결심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마음이 현란할 때는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외쳐보세요.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2,6)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을 낮추면 나의 불완전함이 놀랍고 새로운 것도 아니에요. 설사 나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요. 어쩌면 덕행을 쌓는 여정에서 불완전함은 좋은 징조일 수도 있어요. 반면에 완전한 것 같은 상태를 경계할 필요도 있고요. 태어나면서부터 부드러운 성격을 지녀 많은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완덕에 이른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러니 조용히 자신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 주세요. 그리고 결심한 덕행의 길로 다시 발을 내딛어요.
세 번째로 온유하려면 겸손을 친구로 삼으세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겸손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온유는 이웃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게 해요. 참된 겸손과 온유의 덕을 지닌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해도 아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요. 특히 그 어떤 일에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으면 해요.
누군가의 잘못을 단호하게 바로잡아야 할 때에도 온유하고 차분하게 대하세요. 성난 코끼리를 달래는 데는 어린 양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요. 총알에 의한 관통을 막는 데에는 방탄복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요. 아무리 이치에 맞는 바른말이라도 화를 내어 말을 하면 그 말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요.
임금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나라를 순방하면 백성은 이를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지만 무장한 군대들을 이끌고 돌아다니면 비록 그 목적이 안녕과 질서를 위한 것이라도 백성은 달가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군대로 말미암은 폐해까지 겪게 되니까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2. 분노감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분노가 일면 주님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한 주간을 지내면서 ‘온유하려면 먼저 저 자신에게 온유하라’는 성인의 말씀을 자주 떠올려보곤 했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매일 하는 성찰의 중심에는 많은 경우 내가 아닌 남에게 향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도자인 저는 함께 사는 자매를, 부모는 자녀를, 부부간에는 배우자를 향한 기대와 요구로 불협화음이 일어나면 상처를 받게 되는데요. 그러면 내가 상대에게 잘못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나, 상대가 나에게 준 상처로 인해 분노가 생깁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잊고 살았네요.
인간에겐 부족하다 싶으면 욕구가 생기지요.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물을 찾게 되고요. 그런데 마음이 허기질 때는 타인을 향한 불평과 비난을 하게 돼요. 그런데요. 이상하게도 내가 잘못해도 남이 문제를 일으켜도 똑같이 돌고 돌아서 오는 것은 무엇보다 저 자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남 탓을 하는 그 순간에도 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온유의 친구가 겸손이라고 하셨지요? 아마도 온유의 적은 ‘분노’가 아닐까요? 온유와 친절이 무너지는 자리에는 늘 분노란 놈이 화약고를 들고 찾아옵니다. 물론 머리로는 한발 물러서 인내하기를, 멋지게 참아내기를 상상하지만 치밀어오는 분노는 막을 도리가 없답니다. 온유의 적, 분노감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마음속 분노를 잘 다스리며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누구에게나 ‘분노’란 감정이 있지요. 그런데 한번 화를 내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요.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밤이 되면 그 분노가 미움으로 변하기도 해요. 내 마음에 화가 들어와 터를 잡으면 마땅히 내쫓을 방법도 없고요. 화를 내면 자신이 왜 화내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와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이게 돼요. 게다가 자신이 화를 내는 정당한 이유를 자꾸 찾게 됩니다. 그렇게 합리화시키는 것에 머리를 쓰다 보니 스트레스가 올라오겠지요. 그러느니 차라리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을 배우면 좋지 않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도, 아주 작고 사소한 화라도 일단 마음 안에 들어오면 처음에 작은 씨앗처럼 떨어지지만 결국 큰 나무가 되어 물리치기 어렵다고 해요. 그러니 화가 들어오면 가능한 한 빨리 몰아내는 것이 좋아요. 분노는 마치 뱀과 같아서 머리만 들이밀면 온몸이 그 틈으로 들어가니까요.
그렇다고 화가 날 때 화를 억지로 누르려고는 하지 마세요. 과격하고 거칠게 자신을 다루려 하지 마세요. 누군가 “시끄러워요. 조용히 하세요”라고 고함치면 그 주변을 더 소란하게 만들잖아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서 화가 올라오는데 ‘시끄러워! 잠자코 있어’라고 하면 내 안의 좋은 감정들까지도 혼란스럽게 해요.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 분노를 통제하긴 더 어렵지요.
모든 덕이 그러하듯 자신의 결핍에 집중하기보다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쪽으로 마음을 주면 어떨까요? “하지 말자!”가 아닌 “하자!”라는 마음이요. 그런데 화가 나는 순간에는 조절하기 어려워요. 그러니 평온한 보통의 날에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요. 기분 좋은 날에 온유와 친절의 덕을 쌓았으면 해요. 그래야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조금은 평온한 마음으로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요?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하거나 웃으면서 친절하게 행동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집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행동하면서 집안 식구들은 모질게 대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실 그의 마음에는 온유함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어쩌다 한번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은 진짜 친절함이 아니니까요. 늘 만나는 가족과 친구에게 한결같이 온유하고 친절할 때 비로소 사랑의 꽃이며 덕 중의 뛰어난 덕행인 온유함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평소에 나 자신과 가족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다면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 분노감정을 손님처럼 잘 맞이하고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화가 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조용히 눈을 감고 성경 장면(마르 4:38-39)을 떠올려 봐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초대해요. 그런데 호수 한복판에서 거센 돌풍이 일자 제자들은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며 호들갑을 떨자, 주님께서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고 한마디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게 됩니다.
우리도 마음속에서 돌풍 같은 분노가 일 때, 주님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요. 그리고 주님께 청해요. 그분께서 잠잠해지라 명하시면 마음속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깊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3. 겸손의 덕을 살고 싶어요
자신의 결점마저 수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짜 겸손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수녀원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덕 중의 하나가 ‘겸손’인데요. 사실 솔직함을 좋아하는 제겐 때론 꽤 부담스러웠던 말이기도 했지요. 예의상 상석을 양보하고 낮은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나 마음에 없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것도 위선처럼 느껴졌지요. 겸손은 마음속의 욕구를 통제합니다. 그렇기에 때론 솔직하지 않고 허위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그럴 수 있죠’라는 말을 하면서도 속으론 괜찮지 않고 이해 안 되고 그럴 수 없을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과 행동이 억지스러운데도 겸손하다 하니 혼란스러웠습니다. 때론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이 저지당하고 억압받는 그런 느낌도 있었고요.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그들만의 당당함이 느껴지는데요. 가끔은 ‘조금만 겸손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저 자신에게 화들짝 놀랄 때도 있습니다. ‘나도 꼰대가 되어가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편으론 자기애가 충만한 오늘 이 시대, 자기 자랑을 대놓고 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겸손’이란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겸손의 덕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우린 겸손을 자기를 낮추고 사회적 구조의 종속을 인정하는 표시로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지요. 욕구를 통제하니 인위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위선처럼 느껴질 수는 있겠어요. 때론 애써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도 겉으로만 꾸민 위세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비록 속마음은 상대를 존경하지는 않더라도 아니 미워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존중의 말과 태도는 나쁘다고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누군가를 존중하려고 애쓴다는 차원에서 그런 태도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린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만약 자신이 진짜 겸손한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스스로 “난 결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말했어요. 그런데 듣고 있던 사람이 “맞아요. 당신은 정말 결점이 많아요”라고 말했을 때 김 수녀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만약 화를 내면서 “당신이 더 결점이 많아요!”라고 소리 지른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거짓 겸손을 보여준 것이지요. 하지만 “맞아요.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아요”라고 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낮춘 진짜 겸손이고요.
교만은 거짓 겸손과 나란히 갈 때가 많아요. 겸손으로 가장하여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려 하기도 하고요. 거짓 겸손과 진짜 겸손의 차이는 애덕을 행하느냐 혹은 애덕을 손상하느냐에 달려있는데요. 누군가 “자매님, 요리를 잘하시던데 노숙자들을 위해 봉사를 해보실래요?” 하는데 “아이고, 전 요리 못 해요. 그리고 그런 봉사를 하다 보면 제가 뭐 큰일이나 한 것처럼 교만해질까 봐 아예 하지 않으려고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악의가 숨어있는 겸손입니다. 겸손을 구실 삼아 자기애와 교만을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것이니까요.
또 어떤 사람은 화려한 옷을 입고 멋진 말을 타고 뽐내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가 자랑해야 할 것은 깃털의 주인인 새와 그 옷을 만든 재봉사와 자신을 태워준 말이죠. 허세란 바로 내게 없는 것, 내게 있어도 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인 양 자랑하는 것이죠. 모두 하느님께로 받은 것인데 자기 것인 양(1코린 4,7) 허영에 빠진 것이죠.
또 어떤 사람은 교만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리석은 척하기도 해요. 이는 순수함과 진심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물론 위대한 삶을 살다간 성인들 가운데 일부러 아둔한 척을 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이유가 있기에 모방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다윗 임금은 권위를 내려놓고 주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요. 당시 미칼과 사람들은 임금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비웃었지요.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더 천하게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해요.(2사무 6장 참조)
그렇다고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어 열등의식을 느끼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가짜 겸손입니다. 진짜 겸손은 자신의 결점과 천함마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하면서 열등감이 아닌 자존감을 얻는 행위입니다. 살다 보면 분명 손가락질당할 때가 있는데요. 그것이 진심으로 나의 잘못이 아니라면 안심하고 다윗 임금처럼 춤을 추며 기뻐해도 좋지 않겠어요.
어떤 사람은 “나는 겸손의 덕이 없어요. 그것이 저의 한계에요”라고 솔직하게 말해요. 물론 내가 원한다고 겸손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청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어요. 겸손의 덕도 그러하겠지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4. 겸손의 삶이란
“겸손은 자신의 비천함 인식하고 이를 사랑하는 덕”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편지를 읽으면서 진심으로 겸손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순간에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뒷자리에 가면서도 앞으로 불러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려 노력하는 순간에도 그 겸손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요. 저만 그럴까요? 어떤 상황에 있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거든요. 무소유로 덕망이 높은 법정 스님도 가장 힘들었던 것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그 욕망의 끈을 내려놓으려 스스로 바보가 되려고 부단히도 애쓰셨나 봅니다.
수도자이기에 신앙인이기에 겸손은 기본이며 으뜸이 되어야 하는 덕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요. 타인의 힘으로 낮춰진다고 느낄 때 올라오는 저의 감정, 바로 굴욕입니다. 모멸감과 수치심까지 총동원되고, 억울함과 분노까지 밀려오면 감당하기 어렵답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고 또 자책하게 되고요. 그러고 보면 겸손(humble)과 굴욕(humiliate)은 참으로 묘한 교차점이 있네요. 어원인 땅(humus)은 발아래 내려가 밟힐 수도 있는 존재라는 의미인데요. 결국, 생명의 근원인 흙과 하나가 되어야겠지요?
겸손에 대한 성인의 지혜를 배우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겸손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이며 근본이 되는 덕행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넘치는 은혜에 비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지 인정하는 것이고요. 그런 진실을 신앙으로 고백하여 삶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겸손이지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겸손으로 드러냅니다.
그래요. 겸손과 굴욕은 발아래로 내려간다는 점에서 유사하고 또 함께 있어야 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겸손은 굴욕을 품는 행위에요. 누군가에 의해 모멸감과 굴욕감을 느낄 때, 그것을 품을 수만 있다면 진짜 겸손이겠지요. 악어는 상대가 겁에 질리거나 도망치면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다고 해요. 굴욕감은 악어와 같아서 두려움과 저항이 클수록 독사의 독처럼 빠르게 번져 나를 지배하고 맙니다. 그럴 때 마음을 가다듬고 침묵과 기도로 버티어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굴욕의 독소가 스스로 소멸함을 경험할 수 있어요.
당연히 굴욕이란 감정은 수치심과 모욕감을 동반하면서 죽기보다 더 힘들 수 있어요. 그런데요. 도망갈수록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돼요. 그럴 때일수록 버티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스스로 그 굴욕을 기꺼이 끌어안아 보세요. 처음엔 어렵겠죠. 하지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쁘게 품어 안게 돼요. 그러면 완벽한 겸손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어요.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고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고 기도한다면요.
어떤 수도자들이 다 해진 옷으로 추위에 떨기도 해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경의를 표하겠지요. 그런데 똑같이 다 떨어지고 해진 옷을 입은 가난한 노동자나 노숙자들에겐 멸시와 조소를 보내는 경우도 있어요. 다 해진 옷을 입고 수도자들이 걸인들에게 가지 않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 더 눈에 띄고 더 큰 명성을 얻을 수도 있어요. 이상하지요? 똑같이 낡은 옷인데 수도자가 입으면 존경을 받고 걸인이 입으면 굴욕을 얻어요. 그러니까 비천함으로 인한 고통도 천한 것이 있고 명예스러운 것이 있는 거지요.
우리는 이런 명예스러운 고통은 잘 참아 받으면서 자부심을 얻게 돼요. 천한 고통은 모욕과 비웃음을 얻고 열등감을 얻게 되고요. 진짜 겸손은 바로 이 천한 고통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명예와 지위는 발에 밟히면 더 튼튼해지고 더 풍성하게 자라는 꽃과 같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명성을 얻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살아가는데 활력을 주는 ‘멋진 장식’일 수도 있어요. 자라는 어린아이들과 무언가 해보려는 영성 초보자들에게도 좋은 활력을 주니까요. 하지만 이런 명성을 지키기 위해 신경이 과민하고 불안해진다면 주의해야겠지요. 자칫 더 큰 명성에 집착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마치 큰 강 위에 허술하게 다리를 만들어놓고 비만 오면 불안에 떠는 것과 같아요. 점차 자신감은 줄어들고 나약해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더욱 의존할 명성을 찾아 헤매면서 더 큰 불안을 안게 되고요.
겸손은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이를 사랑하는 덕입니다. 이러한 겸손의 덕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분은 바로 성모님이시지요.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자신의 비천함을 천히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하며 노래한 성모님이야말로 참된 겸손의 모범이십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5. 겸손의 덕과 굴욕감
“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척’하지 마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청년의 질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저는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직장 상사에게 심각한 지적을 받았어요. 그때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굴욕감’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살레시오 성인께서 굴욕감도 끌어안으라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그래서 더 괴롭습니다. 역시 전 겸손하지 못한 것일까요?” 순간 성인의 말씀은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절망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당황하시지는 마세요. 각자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주어진 메시지를 이해하니까요.
그렇기에 행간 속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새 부대에 담아서 지금 여기에서 각자에게 맞는 처방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가끔은 성인들의 말씀이 박물관에 있는 박제된 유산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니까요.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지 끊임없이 교감이 이루어져야겠지요.
젊은이의 질문이 저에겐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겸손’이란 덕이 지금 저희가 사는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도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굴욕감을 품고 적극적으로 기쁘게 끌어안으라는 성인의 말씀이 얼마큼 공감을 불러일으킬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희에게 ‘겸손’에 대한 지혜를 한 번 더 나눠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인의 덕을 닮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세상은 겸손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외적 태도로만 쉽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면 무시 받을 거로 생각해요. 그렇기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거만해지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기도 하지요.
굴욕감을 끌어안을 수 없어 괴롭다는 청년의 성찰이 담긴 질문,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과연 겸손의 덕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느냐는 김 수녀의 의문도 충분히 공감이 가요. 내가 살던 시대에도 겸손이나 온유를 덕행으로 보지 않으려 했으니까요. 오히려 무시하기도 했지요. 김 수녀가 사는 세상은 종교보다 트렌드를 따라가고 성인들의 덕행보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더 관심이 쏠린다고 하지요. 내가 살았던 세상도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사회의 풍습과 관습 그리고 세속의 정신이 더 우세했어요. 물론 자기애가 충만한 지금의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산다는 것은 더 어렵긴 하겠지요.청년의 질문으로 돌아갈게요. 누군가에게 받은 지적이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는 건데요. 그런데 묻고 싶어요. 그 지적받은 내용에 동의하는지요. 만약 동의할 수 없는데 “네, 알았습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요. 그 굴욕감은 상대에서 온 것과 그런 말을 한 자신의 비굴함에서 온 것과 합쳐지면 굴욕감은 배가 되겠지요.
그런데 상대방의 말이 당장은 모욕적이고 수치심을 느꼈지만 맞는 말이라면 ‘네,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진실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더 완벽하다면 그런 지적이 오히려 기쁨이 될 수도 있어요. 그것을 저는 ‘완벽함’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성덕의 관문인데요. 물론 쉽지 않아요. 혹시 상대방의 태도에 대한 문제는 그 사람의 몫으로 남기면 어떨까요? 나의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상대에 대한 불편한 감정으로 스스로 자책한다면 교만일 수도 있어요.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그만큼 더 용기를 얻게 돼요. 그리고 자신의 결점을 아는 데서 더욱 한 발 진보하게 되고요. 우리의 약함을 통해 주님께서 더 크게 일하시고 우리의 한계 안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어요. 겸손은 ‘척’하는 외적 태도를 의미하지 않아요. 겸손의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겸손의 말을 하는 것도 내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척’이겠지요. 낮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낮은 자리를 원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그리고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낮은 자리를 이용하는 것도 모두 ‘척’이지요.
물론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행동을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나의 안일을 위해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척’인 거지요. 사랑은 모든 덕행의 태양입니다. 사랑이 명령할 때만 덕행은 움직여요. 만일 겸손의 덕을 실행하는 데 사랑에 손상이 간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어리석은 척도 지혜로운 척도 하지 말아야겠지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