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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병오년 새해에는 흙을 가까이!
신학교 운동장에는 엄동설한에도 파란 잔디가 돋아 있다. 2014년 새해를 푸름으로 맞이하는 것은 눈으로 볼 때 상쾌한 일이지만, 그 파란 잔디는 사실 인조 잔디다. 작년 여름에 축구장을 건설하면서 인조 잔디가 과연 신학교에 적합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잔디 사이에 깔리는 폐타이어 가루 같은 발암 물질이 건강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자, 업자들은 그것은 과거지사일 뿐 지금은 규소로 만든 소재를 사용하기에 인체에 해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굵은 마사토로 된 울퉁불퉁한 땅에서 축구를 하다 넘어지면 심하게 다치는 일이 생기므로, 인조 잔디를 깔아 학생들을 보호하고 운동장의 먼지 발생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거친 토양이라도 학생들이 흙을 밟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고, 흙먼지 또한 나쁠 것이 없다는 자연주의 논리가 힘을 잃었다. 그래서 신학교에 인조 잔디 축구장이 생겨났다.
과거에 ‘아스팔트 킨트’(아스팔트 거리에서 사는 아이)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된 적이 있다. 흙을 밟지 못하고 평생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야 하는 도시인의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조 잔디 킨트’도 아스팔트 킨트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흙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 2,2에 처음 나온다. 이 흙(adamah) 가운데 부식토가 있다. 숲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땅에 사는 벌레들(1㎡당 1000마리)과 모든 종류의 곤충과 기생충과 박테리아와 원생동물에 의해 분해되어 부식토가 된다. 부식토 1g에는 십억 마리 이상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 이 미생물이 없다면 나뭇잎이나 죽은 식물이 분해되지 않고 점점 쌓여 숲을 짓누르고 말 것이다. 부식토가 1cm 형성되는 시간은 환경에 따라 50년에서 400년이 걸린다.
현대 토양학은 입자 크기를 기준으로 흙을 모래(0.05-2mm), 미사(0.002-0.05mm), 점토(0.002mm 이하)로 구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점토다. 흙이 점토 상태에서 수분을 머금어야, 뿌리를 통해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는 식물이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창세 2,5의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라는 말은 흙이 점토 상태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들풀 한 포기 돋아나지 않았다. 여기서 들풀은 곡식을 의미할 것이다. 3,18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들의 풀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들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들풀 한 포기 나지 않은 이유는 흙을 일굴 사람이 없어서다. 덤불이 없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직 비를 내리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된 점은 흙을 일구는 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책을 쓰셨다. 교황은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에서 사람을 빚으셨다는 창세 2,7이 인간의 지위에 대한 겸손과 위로를 가르친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암흑의 세력으로 구성된 악마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은 흙으로 빚으신 존재다. 모든 사람이 흙의 먼지에서 왔다는 사실은 인종주의나 엘리트주의와 같은 차별주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의 근원적 평등을 일러 준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1918-2013년)의 고난에 찬 삶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주의 철벽을 허문 평등사상의 위대한 증언이었다.
사람이 흙에서 왔다는 사실은 사람과 땅의 깊은 관계를 드러낸다. 사람이 진흙에서 빚어졌다는 것은 고대 문명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바빌론의 창조 설화는 마르둑이 티아맛이라는 신을 죽여 그 신의 살과 피를 진흙과 섞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집트 신화에서도 신(숫양)이 도기용 가마에서 사람을 빚어 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에서는 하부의 신 겔라(Guéla)가 그의 입에서 나온 진흙으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한다. 여신 여와가 흙으로 사람을 빚어 낸다는 중국 신화도, 프로메테우스가 강물에 흙을 반죽해 사람을 만들었다는 그리스 신화도 사람의 기원을 흙과 관련시킨다.
집회 39,26은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 중에 철을 지적한다. 여기서 철은 철기구를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지만, 철분은 요오드, 아연, 구리, 망간, 칼슘과 함께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흙은 이러한 기본 요소를 사람에게 제공하고, 사람의 인분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가 된다.
사람과 동물의 공동 기반이 바로 흙과 삼림이다.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는 육지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지역이 사막화된다는 사실에서 더욱 고조된다. 1억 5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막화로 인해 땅을 버리고 이주한다. 가장 피해가 큰 아프리카에서는 대륙의 73%가 황무지가 되었고, 중국에서 사막화된 지역의 넓이는 한반도의 20배가 넘는다.
토양의 유실과 사막화 문제는 인구 증가와 함께 식량 문제로 연결된다. 지금 세계 인구가 70억 명을 넘어섰고, 2050년에는 93억 명이 될 것이라 전망한다. 식량 자급을 위해서는 토양을 보존하고 삼림을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열대우림의 20%가 벌목되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삼림의 33%가 개간되어 사라졌다. 그 결과 공기를 정화하는 능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부식토를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이 열악해졌다.
병오년 새해에는 흙을 가까이하고 싶다. 나무를 심고 가꾸며 정성껏 보살펴 주고 싶다. 한평생 흙 속에, 바람 속에 살다 가신 법정 스님의 ‘흙 가까이’라는 아름다운 시 몇 소절을 읽으며 흙을 가까이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흙을 가까이 하라.
흙에서 생명의 싹이 움튼다.
흙을 가까이 하라.
나약하고 관념적인 도시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흙을 가까이 해야
삶의 뿌리를 든든한 대지에 내릴 수 있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 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접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순수한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법정, ‘흙 가까이’ 중에서)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 동산과 제주도
2014년 청마(靑馬)의 해를 준비하기 위한 신학교 상주 신부들의 연수회가 지난해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제주도에서 있었다. 공항에 늘어선 종려나무들은 늠름한 자태로 열병식을 하여 제주도를 찾은 육지 사람들을 반겨 주었다. 갈매기 떼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창밖으로 보이고, 정원에 종려나무가 늘어선 함덕 바닷가에 숙소를 마련한 우리에게 제주도는 영락없는 남국(南國)이었다. 눈 덮인 한라산의 위용과 300개가 넘는 오름, 거센 바람과 까맣게 그을린 돌과 씩씩한 해녀들이 있는 제주도는 육지에 사는 우리의 답답함을 씻어 줄 가까운 이국(異國)인 셈이었다. 제주도에 올 적마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는데, 이번에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틀간 치열한 토론과 회의를 한 뒤 셋째 날 오전에 섭지코지 바닷가를 산책했다. 진눈깨비가 섞여 몰아치는 거친 바람 속에서 붉은 화산재로 만들어진 고운 흙을 밟으며 해안을 따라 걷는데, 문득 수면 위로 피어오른 해무의 기묘한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바다를 가득 채운 해무의 선명하고 다양한 문양이 신비한 해상 왕국을 연출하는데, 휴대전화 카메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아 그 영원한 찰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이렇게 우리는 해무와 비바람과 붉은 흙속에 새겨진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전율하며 그 평화로움에 젖었다.
산책을 마치고 일본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민트 레스토랑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의 풍미는 섭지코지와 현대 문명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래, 여기까지.’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벌일 수 있는 호사는 ‘여기까지’라고 여겨졌다. 그 이상의 파괴와 건설은 제주도의 자연을 망가뜨리고 제주도를 탐욕의 섬으로 전락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평화로운 자연을 사랑하는 우리의 소박한 바람이 개발과 경제 논리의 거대한 파고에 어찌 맞설 수 있겠는가! 더욱이 개발 논리가 안보와 만날 때 그보다 막강한 이데올로기가 어디 있겠는가!
오후에 찾아간 강정마을은 새로운 사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강정마을은 1km에 걸쳐 펼쳐진 구럼비 바위와 함께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문화재 보호 구역이다. 이어도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로 선정하여 바위를 깨고 항공모함과 크루즈선이 정박할 수 있도록 거대한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밖에서 볼 수 없게 가림막으로 현장을 가린 채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 주변으로 현수막들만 외로운 주장을 토해 내고 있었다.
“4·3에서 인간이 학살을 당했다면 강정에서는 자연이 학살당한 것이다.” “강정아, 너는 비록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에 평화가 시작되리라!”(강우일 주교 강론에서) ‘바람이 분다’라는 시를 쓰기도 한 영화감독 조성봉은 “강정은 바람이다. 파괴에 맞선 생명의 바람이다. 전쟁에 맞선 평화의 바람이다. 권력과 자본에 맞선 역사의 바람이다.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하다”라고 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새긴 현수막도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원합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이 이어도와 그 주변의 해상 교역로, 수산 자원을 수호하기 위한 국가 안보 차원의 전략적 결정이라는 정부의 주장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맞서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서야만 동북아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정치와 외교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나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고 끔직한 4·3 사건을 겪은 제주 사람들을 생각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 물론 해군기지는 예정대로 건설될 것이다. 민간 차원의 반대와 염원이 그 공정(工程)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미사는 날마다 오전 11시에 바쳐진다. 문정현 신부님은 민주화 보상 기금으로 산 자그마한 땅에 평화 센터를 짓고 앞으로도 평화를 위해 가르치고 기도할 것이라고 한다.
‘제주의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기도문’은 “풍성한 바다로 저희를 축복해 주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아름다운 오름과 돌과 숲으로 제주를 빚어 주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주님, 이 제주가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낙원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끝을 맺는다.
제주도를 평화의 낙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도문에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가 들어 있다. 창세 2,8은 주 하느님께서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고 말한다. 에덴 동산은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수 있는 특정 장소라기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과 평화가 만개한 곳이 에덴이요 인간의 죄로 그것을 잃어버린 상황이 실낙원이다. 에덴이 이상적인 까닭은 창세 1,29-30에 따라 하느님께서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 탐스럽고 먹기 좋은 그 열매를 먹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 금령이 생명을 지키는 생명선이 된다.
에덴 동산 이야기는, 모든 것의 시작에 온전한 생명과 평화가 있었지만 불순종으로 그 생명과 평화를 잃어버린 상실의 신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 실낙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 ‘토후 보후(tohu-bohu)’의 상황(창세 1,2 참조)은 광야와 사막의 모습이기도 하다(예레 4,23; 이사 45,18 참조). 그러나 이사야서는 하느님께서 광야로 오시어(이사 40,3 참조) 광야가 과수원이 되고 숲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말한다(이사 32,15 참조).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짐승과 함께 지내시어 광야를 메시아의 평화가 이루어지는(이사 11,6 이하 참조) 복낙원으로 변화시키셨다(마르 1,13 참조). 하느님의 창조는 이처럼 실낙원을 복낙원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4·3 사건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은 제주도가 실낙원이 되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제주의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기도문’은 제주도를 다시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낙원으로 복원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아울러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참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저희가 물질적인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주시고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지 않게 하여 주시며 인간들이 의지하는 군사력이 결코 이 땅의 평화를 지켜 주는 보증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불완전한 만남의 시작
입춘(2월 4일)과 더불어 청말 띠의 해가 본격적으로 봄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말띠 여자는 드세다’는 속설처럼 띠의 동물과 사람의 운세를 연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에서 곰은 단군의 어머니이다. 시베리아의 북방 민족(한티족 · 에벤족 · 에벤키족)은 곰을 형제요 자매로 여기면서 신성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물과 인간의 연대성은 열두 동물의 띠 개념으로 여전히 우리 의식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사실 창세기도 동물을 인간의 짝으로 고려한 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창세 2,2-25은 하느님, 인간, 동물(자연)의 상호 관계를 그린다. 여기에 생태신학의 밑그림이 담겨 있다. 생태신학의 세 가지 축은 하느님, 인간, 자연이다. 창세기 저자는 동물을 신성시한 토템 신화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벗겨 낸다. 하느님은 모든 관계의 근원이요 시작이다.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인간과 자연을 만나신다.
인간이 만나는 첫 번째 현실은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노동이다. 하느님께서 흙에서 온갖 탐스러운 나무를 자라게 하시면 사람은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을 한다. 동산을 돌보는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동산의 나무 열매를 먹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먹어야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핍을 의미한다. 이 결핍은 관계를 통해 채워진다.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먹을거리로 생존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생명의 공급원이다. 그러나 그 공급을 선물로 허용하는 질서를 하느님께서 세우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창세 2,16). 생명은 먹을 것을 받아들이면서 꽃을 피운다. 결핍이 선물로 충족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두 번째 명령은 선물에 제한을 두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7). 모든 것에서 따 먹을 수 있되 모든 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허용과 금기는 인간에게 결핍을 충족시키는 복의 기회요 한계에 대한 자각의 계기다. 선물이라는 복은 이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지속되는데, 이것이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방식이다.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너’
인간의 자의식은 자신을 상대로 받아 주는 타인의 존재를 통해 생겨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처음으로 ‘너’라고 불러 주셨다. ‘너’라는 2인칭 단수 동사는 생명을 배려하고 양육하는 긍정적 명령과 금기의 명령 안에서 발설된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가장 원초적인 현실로 의식한다. 창세 2장이 제시하는 인간의 근원적 현실은 바로 하느님과 나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나’로서 인간을 ‘너’로 불러 주신다. ‘나’라는 절대적 주체는 오로지 하느님이시다. 마르틴 부버가 발견한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의 근원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신 그 원초적 만남에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아담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담의 무반응과 무응답은 저마다 아담의 처지에서 하느님께 드려야 할 응답의 빈자리로 남아 있다.
동물은 인간의 협력자?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고 말씀하셨다. ‘좋지 않음’의 이유는 바로 ‘홀로 있음’이요, 인간에게 관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흙으로 만든 온갖 생물을 인간에게 데려가셨다. 인간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대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언어 능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생명과 달리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생명의 숨이 언어 능력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창세 2,7.19 참조). 인간은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 그들과 부드러운 지배 관계를 맺는다. 부드러운 지배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처럼(창세 1,29-30 참조) 두 번째 창조 이야기도 사람의 먹을거리로 식물이 주어진 조건(창세 2,16 참조)에서 비롯한다.
이 부드러운 지배는 생물의 이름을 불러 그 고유한 위치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명들에게서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했다(창세 2,20 참조). 언어를 갖지 못한 생명체와 소통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알맞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kenegdô는 ‘상대자로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원으로 볼 때 neged는 ‘마주 대하다’를 뜻한다. 마주 대하여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동물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이 인간을 그렇게 대하기란 어렵다.
하와는 아담의 협력자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깊은 잠에 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시고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셨다. 사람이 여자를 보고 난 반응이 놀랍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아담의 이 감격적 토로는 실로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사랑 고백’이라 할만하다. 이어서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남자에게서(’îš) 나왔으니 여자(’iššâ)라 불리리라”(창세 2,23). 아담은 하와를 통해 남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다. 하와의 탄생은 아담과의 근원적 동질성과 성적 이질성을 통해 남자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아담의 고백은 하와의 응답 없는 독백으로 그치고 만다. 게다가 아담은 하와에게 2인칭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담은 상대자(kenegdô)로 창조된 하와를 너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아담도 하와를 상대로 자신을 ‘나’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단수 1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여 자신의 뼈와 살에서 나온 하와를 지칭할 뿐이다. 나아가 아담은 하와를 만드신 하느님의 업적도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일부처럼 하와를 소개한다.
바로 여기에 관계의 불완전함이 존재한다. 갈빗대(tsēlā‘)는 한면(side)을 가리키는데, 아담은 자신의 한 면을 상실하는 대가로 자기 상대역을 만났으나, 하와는 여전히 그의 일부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하와를 ‘너’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담의 ‘나’라는 주체성도 성립되지 못한다.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응답을 듣지 못했고, 동물의 이름을 불러 준 아담은 동물의 답을 듣지 못했으며, 하와를 너라고 부르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소개한 아담은 하와와 대화하지 못했다. 창조의 처음부터 관계의 불완전함이 존재한 것이다. 아마도 이는 아담과 하와가 장차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앞으로 세상에 폭력이 들어오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이러한 소통의 부재가 낳은 결과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에덴의 동쪽
봄기운이 대지를 감돌아 하늘로 피어오른다. 낙산 마루의 나무들에 아기 손 같은 새순이 돋아난다. 창조의 신비가 축제처럼 도처에 번진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세상에 온통 하느님의 사랑과 복이 현현한다. 이 은총의 꽃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하와와 아담의 이야기는 창조 질서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누리는 가장 원초적 복은 ‘먹는 일’과 ‘성적 결합’이다. 그런데 복에는 제한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성적 결합으로 한 몸이 되었다고 한다. ‘한 몸’은 일치의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구별이 없어진 혼융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담이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고 외친 것처럼 하와를 자신의 일부로 환원하는 것이 성적 결합이다. 본래 한 몸이었는데 다시금 한 몸이 되는 것이 부부의 성적 결합인 셈이다.
기실 창조란 분리의 과정이 아니던가! 하느님께서는 꼴을 갖추지 못한 혼돈에서 빛과 어둠을 가르시고 궁창의 위와 아래를 가르셨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었다는 것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하는 ‘자웅동체설’의 성경 버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너’라고 불러 주셨듯, 하와를 아담의 상대자(kenegdo)로 삼아 주셨다. 개체의 탄생은 자유의 출현과 상호 존중의 인격적 만남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은 한 몸의 원초적 기억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상대방을 내 안에 동화시키는 파괴의 특성도 지닌다. 그 중심에 남자가 있다. 하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상실하고 아담의 아내로 불린다(창세 4,25 참조).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부의 결합에 결핍이 없음을 의미한다. 수치심(bushah)은 지연이나 늦어지는(boshesh) 상황과 관련이 있다. 탈출기에서는 모세가 늦어지자 백성이 기다렸고(탈출 32,1 참조), 판관기에서는 시스라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의 어머니가 기다렸다(판관 5,28 참조). 만남과 결합은 만족을 주고, 기다림은 초조함과 근심을 준다. 기다림의 가장 애절한 대상은 나의 상대자이다. 그러나 성적 결합은 상대자를 나의 일부(한 몸)로 만들어 버려 자기중심적 일체감과 자아의 확장을 경험케 한다. 여기서 타인을 나의 일부로 소유하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시작된다. 이처럼 성적 결합은 분리되기 전의 한 몸으로 복귀하려는 근원적 동작이요 만남이 주는 혼융의 향연이다.
이런 현상은 먹는 일에서도 발생한다. 하느님께서는 먹는 복을 주셨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즐기라는 것이 첫 번째 법이다. 즐거움과 기쁨이 하느님의 최초 율법인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즐김과 동화의 과정에 한계가 있다고 금령으로 제시하셨다. 그렇다면 왜 금지가 필요한가? 존재는 욕망이며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들은 욕망의 장례 예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금령을 통한 인간 능력의 제한은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보여 준다. 먹을거리는 혀를 자극해 기쁨을 주고 육체의 활력으로 이어지면서 심리적으로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드는 철저한 소유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먹는 행위는 음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체화 작용이기에 세상을 온통 먹을거리(소유의 대상)로 봐서 탐욕을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 동기가 된다. 아기가 모든 것을 입에 넣으려는 행위가 이 점을 상징한다. 재물에 대한 한계 없는 탐욕은 먹어서 내 것을 만드는 섭생의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이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음으로써 내가 선과 악 자체가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을 내 안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의 결정 기준을 정하려는 유혹, 이것이 창세기가 지적하는 인간의 교만(Hybris)이요 원죄의 실상이다. 그것은 자신을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환상일 뿐이다. 명정(酩酊), 곧 만취 상태가 환상을 만들어 낸다. 환상에 빠진 인간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절대상태를 추구한다. 마약은 나르시즘적 자아도취를 강력하게 일으키는 물질이고, 나치즘은 히틀러의 자아도취적 기만과 환상주의가 만든 만취의 종교이다.
유혹자 뱀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영리한 동물로 소개된다. 들은 들짐승의 폭력과 위협, 죽음과 투쟁이 존재하는 무법 지대다. 에덴은 평화와 질서의 세계다. 본문은 에덴과 동물의 세계를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뱀으로 대표되는 세계는 본시 아담의 본질적인 면이 아닌가? 인간은 여섯째 날에 동물과 함께 창조된 존재이다. 뱀은 아담 안에 숨겨진 동물성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뱀의 유혹은 다른 말로 전능에 대한 유혹이다. 이는 전체주의 형태로 나타나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의지이다. 그러기에 초인이 되고 싶은 인간, 신이 되고 싶은 인간, 절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에게 뱀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다. 뱀은 본질상 다신론자(多神論者)이다. 그의 미끼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고유한 법이 있고 자신이 자기 영역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다.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에 뱀의 유혹은 사람들에게 인간 능력의 위대함을 고취시키며 다가온다. 그러나 절대 진리의 보편적 원칙이 없을 때, 개별적 원칙은 힘겨루기를 통해 패권주의와 전체주의로 치닫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책임은 평화가 갈등과 전쟁으로 바뀌는 저주로 나타났다. 자연과 인간이 적대 관계가 된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인간과 동물의 전쟁이 시작된다.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남자와 여자의 전쟁이 불붙게 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그러면 남자의 노동과 여자의 산고 등 인간 삶의 고달픔이 과연 저주인가? 에덴의 동쪽에서의 삶은 선과 악의 도가니 속에서 하느님의 법에 따라 헤쳐 나가야 할 가시덤불이다. 세상은 에덴에 비해 삶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 인간의 삶은 이어지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도 계속된다. 뱀은 여전히 인간을 유혹하는 악한 경향으로 다가온다. 뱀이 지닌 숫자의 가치(nahash=50+8+300=358)는 메시아(mashiha=40+300+10+8=358)와 같다. 뱀은 그리스도의 적이고 그리스도는 뱀의 적이다. 에덴 동산과 에덴의 동쪽은 동일한 실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성과 음식을 통해 주신 생명의 축제를 교만과 탐욕으로 저주의 향연이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사람, 동물, 식물, 하늘, 땅, 바람, 물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주적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
프랑스 철학자 로제 다두엥은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라고 창세기를 소개한 바 있다. 늘 제기되는 질문은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는가’이다. 토마스 뢰머는 《모호하신 하느님》에서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더 좋아하시는 데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편애를 설명할 유일한 근거는 하느님의 자의성이며,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탈출 33,19)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뢰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공평함을 체험하는데, 그것이 바로 ‘카인의 경험’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이 과연 본문이 의도하는 바일까?
먼저 성경 본문은 카인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하와는 카인을 낳고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창세 4,1)고 말한다. 직역하면 “내가 하느님과 함께(’et) 남자를 얻었다”이다. 성경은 남자 아기를 남자(’ish)로 표현한 적이 없으므로, 여기서 ‘남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하였다는 창세 2,23을 염두에 두고 쓰였을 것이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를 얻은 하와가 남자의 어머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드러내는 독백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카인은 처음부터 불공평을 체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어머니의 자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특권적 지위를 누린 것이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는가? 카인이 농부이고 아벨이 목자라는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구약성경은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경 생활을 가치절하하거나 유목 생활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거쳐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정된 농경 생활을 하기를 희구하였다. 더욱이 최초의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땅을 일구는 농부였기에 농부가 오히려 이상적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농경 생활과 유목 생활에는 인간의 두 가지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농부는 일정한 땅과 집을 소유하는 소유주로 살아간다. 반면 목자(牧者)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성경이 목자의 생활 방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러한 비집착성과 개방성, 하늘을 향해 열린 마음과 초월을 향한 비상한 감수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휴일이나 주말이 되면 광야에 나가 도시생활에서 잃어버린 무한과 영원의 그림자를 다시금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의 가슴에 대고 말하리라고 한다(호세 2,16 참조). 하느님의 유혹이 이루어지는 곳, 하느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은 도시가 아니다. 자기 실존의 헐벗은 모습으로 무한한 하느님의 음성을 가슴으로부터 엿듣는 광야인 것이다. 유목 생활의 또 다른 장점은 생명과 늘 만난다는 것이다. 유목민의 광야에서는 생명과 교감이 이루어지지만, 도시에서는 기계화와 전산화로 비생명체와 상대하게 된다.
이러한 생활 방식의 차이가 제물을 바치는 태도의 차이로 나타났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 수확의 맏배를 바쳐야 했다(탈출 22,28-29; 34,19-20 참조). 그것은 인간이 먼저 하느님께 첫 소출을 정성껏 바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훔친 도둑과 같다고 하는 탈무드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카인은 소출의 맏물을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의 일부를 바쳤을 뿐이다. 하느님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이 삶의 전부인 아벨과 하느님이 자기 삶의 일부만 차지하는 카인의 차이가 결국 하느님의 선택을 결정한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결과가 하느님께 돌아간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아벨의 피는 땅에 뿌려져 땅을 오염시키고 소출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벨의 피가 땅을 오염시켜 카인이 에덴의 동쪽 땅으로 쫓겨났듯, 카인의 후예로 산 이스라엘 역시 땅을 잃을 것이다. 탈무드는 기원전 578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유로 살인, 우상 숭배, 부정한 결합을 들었다.
한편 카인이 뿌린 아벨의 피는 복수로 나타난다. 왜 복수를 아벨의 ‘피들’이라고 말할까? <미쉬나>에 의하면 아벨의 피와 그에게서 탄생했을 후손의 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련하여 아우슈비츠의 한 생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600만 명의 희생자 외에도 더욱 공포스러운 일은 그들에게서 태어났을 유다인 어린이들, 그 후손이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의 잘못으로 수많은 미래 가능성이 죽임을 당한다. 오늘날 낙태가 그 대표적 예에 속한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면 마치 세상의 생명을 구한 듯하고 하나의 생명을 죽이면 마치 세상의 생명을 죽인 것과 같다”는 탈무드의 말은 곰곰이 새겨봐야 한다.
카인은 마침내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한다. 그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에녹을 낳는다. 도시를 건설하고 아들의 이름을 빌어 그 땅을 ‘에녹’이라고 부른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본시 ‘hanokh’이고, ‘교육하다, 개시하다’는 뜻을 가진다. 카인은 과거의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인 인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유다인은 스탈린그라드, 알렉산드리아, 티베리아 등 사람의 이름을 도시 이름에 갖다 붙이는 것을 꺼린다. 인간 중심의 이름 부여보다 신적 프로그램이 담긴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 예컨대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카인과 아벨, 그 이름에서부터 미래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카나(qana, 창조하다)’에서 파생된 카인이란 이름은 ‘대장장이, 장인’을 의미하며, 장차 인간 문명의 창시자가 될 것을 암시한다. 아벨은 히브리어로 ‘hebel ’이며, ‘수증기, 연기, 허무’를 뜻한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이름이다. 목자 아벨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농부 카인은 인간 중심의 삶을 대표한다. 카인의 이야기는 폭력이 인간 중심의 삶에서 발단하였고 인류 문명이 폭력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하면 그 다음이다. 창세기가 말하는 죄의 기원은 아담이나 카인의 경우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 모든 것의 중심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을 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훼손된다.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세상과 인간의 창조, 죄의 기원과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대홍수와 노아의 계약
‘홍수’는 고대 근동 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홍수를 인구 문제와 관련하여 설명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아트라하시스 서사시(Atrahasis Epic)>이다. 이는 기원전 17세기 바빌론의 서기관 쿠 아야(Ku-Aja)가 1245절로 구성한 기록이다. 이 서사시에 홍수가 일어난 원인이 나와 있다. 신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지만, 인간의 수가 크게 늘어나 소음으로 시끄러워지자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와 달리 창조된 인간을 신들의 노동 대리역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설명한다. 홍수를 인구 조절을 위한 신적 통제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악이 땅에 만연되어(창세 6,5 참조)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셨다고 이야기한다. 자연 현상을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홍수 설화에 앞서 거인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거인족(나필족)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하느님의 아들들은 어떤 신적 존재가 아니라 우월한 권력을 가진 특권층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파라오(창세 12,10-20 참조)나 다윗(2사무 11장 참조)처럼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여자를 취하는(창세 6,2 참조) 등 욕망대로 움직일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도록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거인족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 자기 강대성, 힘에 의한 타인 지배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보여 준다.
결국 대홍수가 일어난 원인은 인간의 악이 세상에 많아진 탓이다(창세 6,5 참조). 구체적으로 세상이 타락하여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창세 6,11 참조) 때문이다. 폭력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폭력이 홍수로 인한 심판의 근본 이유라면 과연 폭력의 기원은 무엇일까?
창세 1,22에서 물고기들과 새들은 번성하여 바다의 물과 땅 위를 채우도록 하느님께 복을 받았다. 인간 역시 번성하여 땅을 채우도록 복을 받았는데, 땅 위에 사는 짐승들은 ‘번성하라’는 말씀도 하느님의 복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불공평한 축복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동물의 복이 인간의 행위 결과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에게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의 과일을 식량으로 주셨다(창세 1,29-30 참조). 이러한 초식 생활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들을 지배하라는 사람의 소명에 근본적 제한을 가한다. 인간은 동물에게 일을 시킬 수는 있어도 먹기 위해 그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동물에 대한 지배’는 폭력적 수성(獸性)을 풀의 연약함으로 무마하는 이른바 ‘부드러운 지배’이다. 그것은 폭력이 걸러지고 서로 죽이지 않는 평화로운 공존을 가리킨다. 이 질서가 깨진 것이 폭력의 기원이며, 홍수는 폭력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었다.
노아가 홍수 기간 동안 먹은 식량은 창세 1,29-30의 기준에 따라 풀(식물)이었을 것이다(창세 6,21 참조). 노아가 방주에 들인 동물은 홍수 기간 내내 살아서 종류별로 방주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창세 8,19 참조). 노아가 초식의 계명을 온전히 지킨 것이 그가 의인이라 불린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대홍수로 인간이 죽고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았으나 그 후손이 나중에 바벨 탑을 만들어 하느님을 거스른다면 홍수의 심판은 결국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인간이 악을 저지르는 것은 심판으로도 근절할 수 없는 생래적(生來的) 현상임을 인정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 8,21)고 다짐하신다.
이처럼 생명이 악의 현실보다 소중하고 생명의 축복이 죄에 대한 징벌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은 창조의 근원적 복에 속하기에 하느님께서는 홍수가 끝나자 노아와 계약을 맺으신다. 이 계약으로 자연과 역사의 새로운 출발(창세 9,1-17 참조)이 가능해진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약의 표지는 무지개다. 그것은 태초의 혼돈 위를 비추는 우주적 질서와 안정성을 반복하여 확인시키는 상징이다.
최근에 상영된 영화 [노아]에서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에게 선과 악의 이중성을 부여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을 멸절하는 데 있다고 이해하여 며느리 일라가 낳은 두 손녀딸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해치지 못하고 살려 줌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노아에게 선은 인간이 없는 유토피아적 세상을 위하여 인간을 멸절하는 것이었으나 인간의 후손을 허용하여 악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어긴 이 선택으로 노아는 자책하였으나 노아가 자손을 축복할 때 무지개가 떠올라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인류 구원임이 드러난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악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시어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라는 창조 질서를 확인하게 하신다. 추위와 더위, 밤과 낮이라는 창조의 이중적 질서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지니고 사는 인간의 모습과 맞물려 있다. 선과 악의 기로에서 아담이 지식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악을 선택했다면, 노아는 하느님께서 주신 초식을 지속하는 선을 선택했다.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노아의 아버지 팔뚝에 감긴 뱀 껍질이 노아의 팔뚝에도 감기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는 노아와 그의 후손이 겪어야 할 악의 유혹을 상징한다.
한편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신다. 그분은 창세 1,28에서처럼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는 소명을 주신다(창세 9,1 참조). 그리고 창세 1,29과 달리 육식이 허용된다. 그러나 동물의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 9,3-4 참조). 살의 죽임과 먹음은 허용하되 피의 섭취는 금기시키는 이른바 ‘노아의 법’이 공표된 것이다.
창세기는 동물의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결국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폭력의 확대 현상을 시사한다. 생명 존중의 뿌리는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모든 생명 특히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데 있음을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준다.
지난 4월에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과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이 사건은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풍조에서 배금주의에 빠진 어른들의 행태가 만들어 낸 전형적 인재人災다. 노아의 대홍수를 이겨 낸 생명의 힘과 하느님의 복을 믿기에 이 참극을 통해 생명 존중 의식이 각성되어 모든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