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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부처의 길
---김충경 시인의 {마우스 패드에는 쥐가 살고 있다}의 시세계
반경환
1
김충경 시인은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고, 2015년 {인간과문학}으로 등단했으며, 2019년 첫시집 {타임캡슐}을 출간한 바가 있다. 20대 초반부터 오랜 공직 생활 끝에 정년퇴임을 하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목포문학관’에서 시쓰기 수업을 받으며, 현재 ‘문포시문학회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충경 시인은 “‘미쳐야 미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시에 미치고 싶다”고 말하고, “시는 내 존재의 근원이다”([시인의 말])라고 말한다. 시詩는 언어의 사원이고, 시인은 언어의 사제, 즉, 부처이다. 김충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마우스 패드에는 쥐가 살고 있다}는 최하 천민의 삶을 ‘성자의 삶’으로 승화시키면서, ‘시인-부처의 길’을 온몸으로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살아생전
죄 많은 생이었을 것이다
제 안위를 위해
딱딱딱 따그르 딱딱
긴 부리로 나무에 구멍을 판 죄
뾰쪽한 부리로 연한 살 찍어댈 때마다
파란 눈물 안으로 삼키며 나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서리쳤을 것이다
부리로 한 번 찍어댈 때마다
바람결 따라 푸른 숲 흔들리고
푸드덕 새들이 날개를 편다
탁발 나선 새들의 길을 따라
목탁 소리 울려 퍼진다
딱딱딱 따그르 딱딱
오늘도 목탁은 제 머리 부딪혀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고 있다
---[딱따구리 목탁] 전문
진리와 허위가 동전의 양면이듯이, 악이 없으면 선도 없고, 죄가 없으면 공도 없다. 고통이 없으면 기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없다. 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인간들은 선과 공과 기쁨과 성공을 좋아하고, 악과 죄와 고통과 실패를 미워한다. 만일, 이상낙원이나 천국에서처럼 선과 공과 기쁨과 성공만이 있다면 그 세계는 모든 싸움들이 다 종식되고 무의미와 권태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죄를 짓지 않으면 도덕과 윤리와 법률도 필요가 없고, 어느 누구나 모든 일들을 솔선수범하고 정의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네것’과 ‘내것’을 가지고 다툴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은 이 세계가 가장 좋은 세계이다. 이 세상의 삶이란 권력의 결핍, 애정의 결핍, 재화의 결핍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무리를 짓는 동물들의 특성상, 도덕과 법률을 만들고, 다양한 제도와 풍습으로서 그 생존경쟁의 룰, 즉,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악과 죄와 고통과 실패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선과 공과 기쁨과 성공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목표이자 존재의 이유가 된다. 악과 죄와 고통과 실패는 삶의 전부면을 장악하는 일상생활이 되고, 선과 공과 기쁨과 성공은 장마철의 무지개처럼 잠시잠깐 나타났다가 이윽고 사라져 가는 삶의 황홀(환영)이 된다.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고, 죄를 짓지 않으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 이것이 모든 생명체들의 원죄가 되고, 이 속죄제로서 우리들은 생명체들을 찬양하고, 그 감사함과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충경 시인의 [딱따구리 목탁]은 ‘속죄제의 진수’이자 그 아름다움이 ‘부처님의 초상’으로 승화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살아생전/ 죄 많은 생이었”는데, 왜냐하면 “제 안위를 위해/ 딱딱딱 따그르 딱딱/ 긴 부리로 나무에 구멍을 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뾰쪽한 부리로 연한 살 찍어댈 때마다/ 파란 눈물 안으로 삼키며 나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서리쳤을 것”이고, “부리로 한 번 찍어댈 때마다/ 바람결 따라 푸른 숲 흔들리고/ 푸드덕 새들이 날개를 편다.” “탁발 나선 새들의 길을 따라/ 목탁 소리 울려 퍼”지고, “오늘도 목탁은 제 머리 부딪혀/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고 있는 것이다. 초식동물이 줄어들면 육식동물이 줄어들고, 육식동물이 줄어들면 초식동물이 늘어난다. 폴과 나무가 사라지면 벌과 나비들이 사라지고, 풀과 나무가 우거지면 모든 생명체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자연의 먹이사슬은 종과 종들의 ‘투쟁 속의 조화’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따라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처럼 전혀 터무니 없고 허무맹랑한 헛소리도 없는 것이다.
죄를 짓고 죄악을 참회하는 것, 이 속죄제는 모든 종교와 신화의 근본토대가 된다. 모든 생명체들은 모두가 다같이 종족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만큼 더 큰 죄도 없는 것이다. 모든 종교와 신화의 주제는 ‘속죄제’이며,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하고 성찰하라는 것이 모든 성인군자들의 가르침이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반성과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타인들의 잘못과 인간 전체의 잘못에는 참회를 하는 척하지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사악한 탐욕과 잘못에는 참회를 하지 않는다. 우리 학자들과 우리 정치인들, 우리 사제들과 우리 법조인들은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자신의 직종 이기주의와 탐욕을 위해서 전국민의 혈세와 국가의 재산을 그토록 축내고 있으면서도 그 어떠한 반성이나 성찰은 커녕, 자기 자신들의 더없이 추잡한 욕망과 기득권을 버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반성과 성찰과 참회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참회할 대목에 와서는 모조리 침묵을 하고, 대한민국을 부정부패의 천국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김충경 시인의 [딱따구리 목탁 소리]는 ‘부처님의 목탁 소리’이며, 이 참회의 눈물로 모든 생명체들을 감동시키고 만물의 터전인 숲을 이상낙원으로 창출해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목탁을 두드리고, 최소한도의 살생을 하되, 그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너무나도 엄숙하고 경건하게 속죄제를 지내겠다고 목탁을 두드린다.
“딱딱딱 따그르 딱딱”----.
누가 부처냐? 진정으로 반성을 하고 참회를 하는 사람이다. 누가 부처냐? 모든 생명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 거룩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인은 딱따구리가 되고, 딱따구리는 부처가 된다.
2
모든 역사는 지리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넓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남쪽지방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지만, 차디찬 북쪽지방에서 자란 사람들은 매우 사납고 살생을 함부로 하며, 이웃국가를 정복하고 약탈을 일 삼는다. ‘자원의 저주’라는 말이 있듯이, 넓고 비옥한 남쪽지방에서 자란 사람들은 역사와 전통은 물론, 자기 땅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매우 사납고 거칠은 북쪽지방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웃국가를 정복하고 모든 천연자원과 그 재산을 다 약탈하여 아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전자는 초식동물과도 같고, 후자는 육식동물과도 같다. 남쪽지방의 사람들은 글자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는 야만인이 되고, 북쪽지방의 사람들은 매우 근면하고 성실한 문화인이 된다.
선과 악도 없고, 정의와 불의도 없다. 모든 법률과 제도는 강자들이 만든 것이며, 이 강자들, 즉, 오늘날의 문화인들의 마음에 따라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결정된다. 착한 사람은 너무 일찍 굶어서 죽고, 악한 사람은 산해진미의 음식을 만끽하며 너무나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고, 불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부처를 믿으며 살아간다. 유태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아랍인들은 알라신을 믿으며 살아간다. 이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지리적 환경에서 발생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웃민족과 그들의 종교를 배격하고 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라고 장 자크 루소는 역설한 바가 있고, 그 결과, 장 자크 루소의 모든 책들이 다 불살라지고, 그는 영원한 이단자로서 ‘고독한 산보자의 꿈’을 꾸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최종심급은 기독교이고, 선악을 초월한 기독교인들, 즉, 강자들만이 모든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진도 서거차도와 맹골군도 사이엔 사납기로 소문난 물살들이 사는 물길이 하나 있지요. 어찌나 사나운지 사자, 호랑이, 악어, 늑대들이 흰 이빨로 섬 기슭을 물어뜯는 것 같다 하여 맹골수도라는 이름이 붙었지요. 그래서 이곳 파도 소리는 철썩거린다고 하지 않고 으르렁거린다고들 하지요. 근래엔 노란 풍선 가득 실은 배들이 이곳을 지나다 그만 사나운 짐승들에게 물려 죽기도 했다지요. 이곳 물살이 사나운 이유는 맹수들의 송곳니가 자라는 험한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미역에는 맹수들의 귀가 달려 있고, 물고기마다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찍혀 있다지요. 무수한 세월을 집어삼킨 채 지금도 멋모르고 지나가는 배들을 사냥하기 위해 으르렁거린다는 맹골수도. 죽으면 이 골짜기에 뼈를 묻는다는 세상 모든 맹수의 수중 정글 맹골수도.
---[맹골수도孟骨水道] 전문
맹골수도란 무엇이고, 맹골수도란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맹골수도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납고 빠른 물길을 말하고, 맹골수도란 진도 서거차도와 맹골군도 사이에 있는 물길을 말한다. “어찌나 사나운지 사자, 호랑이, 악어, 늑대들이 흰 이빨로 섬 기슭을 물어뜯는 것”과도 같고, “그래서 이곳 파도 소리는 철썩거린다고 하지 않고 으르렁거린다고들” 한다. 미역에도 맹수들의 귀가 달려 있고, 물고기들마저도 그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찍혀 있다고 한다. “무수한 세월을 집어삼킨 채 지금도 멋모르고 지나가는 배들을 사냥하기 위해 으르렁거린다는 맹골수도”, 2014년 4월,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는 수많은 학생들을 다 집어삼키고도 더욱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맹골수도----. 오늘날 이 맹골수도를 지배하는 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이며, 이 최종적인 승자는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그리고 티지털 혁명을 창출해낸 서양의 문화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 친다
외계와 내계의 충돌을 기록한 우주의 문장紋章이다
46억 년간 지속된 문명의 충돌이었으니
지금 지구에도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 간, 종교 간, 이념 간, 계층 간, 세대 간, 성별 간
직장에서 학교에서 끊임없이
타자他者와의 날 선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욕망이 넘실거리는 지중해처럼
하느님의 나라 예루살렘에서도
아비규환의 현장 멈출 줄 모른다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이기주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불신의 수심水深 얼마나 깊길래
바닥이 안 보이는 걸까
오늘도 우리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
허우적거리며 익사 직전에 있다
황금빛으로 물든 이 거리에서다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거나
*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 이름에서 따옴
---[문명의 충돌] 전문
그 옛날 전원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재산이 토지였고, 따라서 소유권 다툼 이외에는 그 어떤 고소-고발의 소송전도 없었을 것이다. 황소 한 마리를 가지고도 다툴 필요가 없었고, 이웃사촌들 간에 담장의 경계선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몽고나 부탄같은 국가에서는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도 매매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하고 새로운 기술이 출현할 때마다 수많은 지적 재산권과 특허권과 상표권이 등장하고, ‘고소--고발의 소송전’이 일상화되고 말았다. 변호사나 공인중개사의 입회 아래 매매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가 없고, 그 어떤 독창적인 연구 성과의 결과물도 국가기간에 등록해두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용을 당하고, 오히려, 거꾸로 그 모든 죄들을 다 뒤집어 쓰게 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는 인위적인 사회이며, 이기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그 옛날의 [문명의 충돌]은 종교와 영토의 문제로 국한되었지만, 오늘날의 문명의 충돌은 “국가 간, 종교 간, 이념 간, 계층 간, 세대 간, 성별 간” 그 어느 곳을 구분할 필요도 없이, “직장에서 학교에서 끊임없이/ 타자他者와의 날 선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예루살렘에서도” 그 아비규환의 참상이 일어나고, 동서냉전의 마지막 경계선인 우크라이나에서도 그 아비규환의 참상이 일어나며, 전인류의 치욕과도 같은 한반도에서도 그 아비규환의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나온다.
도처에 맹골수도가 있고, 이 맹골수도의 물살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다. 자본주의는 맹골수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이며, 이 지구촌의 종말을 재촉하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봉건군주제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산업혁명에서 컴퓨터 혁명으로, 컴퓨터 혁명에서 인공지능의 혁명을 주재한 것은 우리 인간들의 탐욕이며, 이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은 오늘날 그 어느 누구도 중단시킬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맹골수도의 법칙에 의해서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고, 문명의 충돌의 성과에 의해서 ‘빅테크 기업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빅테크 기업들’이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와 장벽을 다 허물어버리고, 맹골수도에서 ‘만인 대 만인의 싸움’, 즉, 김충경 시인의 [문명의 충돌]을 주재하게 되었다.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 맹골수도의 최종적인 승자로 군림을 하게 된 자본가들은, 예컨대 대통령과 장관과 국회의원들과 모든 공직자들을 그들의 영원사업원으로 거느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 어떤 국가도, 종교단체도 이 자본가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미국의 백악관도 자본가들이 장악했고, 미국의 국방부도 록히드 마틴이 장악했고, 미국의 항공우주국도 일론 머스크가 장악했다.
문명의 충돌은 맹골수도에서 일어나고, 이제 이 사생결단식의 싸움은 인공지능(AI)이 담당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들보다도 천 배나 만 배는 더 뛰어나고, 그 모든 일들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해치운다. 미국의 국방부의 비밀문서도 다 훔쳐내오고, 연방준비제도의 금융정책도 다 훔쳐내오고, 수많은 대작가들의 지적 재산도 다 훔쳐내온다. 모든 국가기관과 모든 연구소들의 연구 성과도 다 훔쳐내오고, 이 빅테크 기업의 자본가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그 모든 짓을 다하게 된다. 경제의 문제는 탐욕의 문제, 즉, “돈을 버느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비닐 까마귀]도 문제가 안 되고, [어느 노동자의 죽음]도 문제가 안 되고, “폐그물에 걸려 죽은 물개”도 문제가 안 된다. “검은 기름을 잔뜩 뒤집어 쓴 황새”도 문제가 안 되고, “폐비닐을 먹고 죽은 고래”도 문제가 안 되고, 이 지구촌이 쓰레기로 몸살을 알아도 문제가 안 된다. 이상기후로 인한 가뭄과 홍수도 문제가 안 되고, 지구의 허파 아마존이 폐섬유화 증상으로 다 죽어가도 문제가 안 되고, [나 어떡해]라고 모든 생명체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도 문제가 안 된다.
김충경 시인의 [맹골수도]는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을 주재하는 자본의 법칙으로 되어 있으며, 이 싸움의 최종적인 승자는 인공지능을 동원한 자본가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눈물도 없고, 피도 없고, 감정도 없다. 소위 세계적인 부자들은 맹골수도 위에서 문명의 충돌을 주재하며, 그 결과, 그 모든 이익들을 다 독식하게 되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나 민주주의 사회의 그 모든 가치관들을 비웃으면서, 더욱더 노골적으로 은밀하게 빈곤을 생산해내고 또 생산해내면서 그들의 부의 축적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만물의 영장이고 인공지능을 거느린 부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치심이 없고, 수치심이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들을 강제노역장의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상과 비정상, 정의와 불의, 부자와 가난한 노동자를 만드는 것은 자본의 법칙이며, 따라서 이 사회 자체가 거대한 강제노역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구입한 지 10년이 넘은
컴퓨터 마우스 패드 위에 쥐가 살고 있다
주인의 심중 따라 하루 종일 움직이다
밤이 되면 검은 눈망울 지그시 감고
잠시 숨을 고르는 생쥐 한 마리
밥도 안 주고 월급도 안 줘도
하루 종일 눈 깜박거리며
전깃줄 한 가닥에 묶여
주인 손아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싫다는 말 한번 못하고
기껏해야 패드에 남긴 수많은 발톱 자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뼘 공간에서 맴돌고 있다
지난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가장家長'이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생쥐로 일생을 살아왔다
패드에 몸을 뉘고 있는 생쥐를
온기 가득한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본다
주름지고 윤기를 잃어 까칠하다
그래,
너나 나나 별반 다르지 않는 인생이구나
---[마우스 패드에는 쥐가 살고 있다] 전문
생명이 생명을 먹는다는 것은 원죄가 되고, 이 원죄의식을 통해 속죄를 하며, 모든 생명체들에게 고마움과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 ‘시인—부처의 길’이라면, 오늘날은 이 ‘시인-부처의 길’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소위 ‘자본가-악마의 길’이 그 모든 권력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정상과 비정상, 정의와 불의,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가들이며, 그 결과, 죄도 없이 죄를 짓고 한평생 감옥에서 강제노역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은 악마가 만든 걸작품이며, 어느 누구도 이 자본가들의 전면적인 감시체제와 그 노역의 사슬을 벗어날 수가 없다. “컴퓨터 마우스 패드 위에 쥐가 살고” 있고, “밥도 안 주고 월급도 안 줘도/ 하루 종일 눈 깜박거리며/ 전깃줄 한 가닥에 묶여/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싫다는 말 한 번 못하고/ 기껏해야 패드에 남긴 수많은 발톱 자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 뼘 공간에서 맴”돈다. 너도 “가장家長이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생쥐”처럼 살아왔고, 나도 “가장家長이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생쥐”처럼 살아왔다. 작업현장에서 일을 해도, 밥을 먹고 소주 한 잔을 마셔도 자본가들이 이익을 다 챙겨가고, 영화구경을 가도, 야구구경을 가도 자본가들이 이익을 다 챙겨간다. 자동차를 타도, 비행기를 타도 자본가들이 이익을 다 챙겨가고, TV를 시청해도, 컴퓨터로 물건을 사고 팔 때에도 자본가들이 이익을 다 챙겨간다. 너무나도 완벽한 감시와 관리체제, 너무나도 완벽한 강제노역과 착취체제----, 이처럼 너무나도 완벽한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자본가들이고, 어느 누구도 이 ‘컴퓨터’라는 ‘맹골수도의 법칙’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패드에 몸을 뉘고 있는 생쥐를/ 온기 가득한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보지만 그러나 그와 나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자본의 법칙은 맹골수도의 법칙이고,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와 그 희생만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미래는 참으로 암울하고 참담하기만 하다. 엘리뇨와 라니냐에 의한 대참사, 수많은 지진과 화산폭발, 점점 더 뜨거워 지는 지구와 생태환경의 파괴 이외에도 인간보다도 천 배, 또는 만 배나 더 뛰어난 인공지능의 등장은 오직 단 하나의 법칙, 즉, 최고 이윤의 법칙에 따라 이제까지의 인간의 역사와 전통, 그 모든 가치들을 다 파괴시키고, 곧 가까운 시일 내에 지구촌을 대폭발시키고 말게 될 것이다.
자본의 법칙은 맹골수도의 법칙이고, 무서워하는 사람들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너무나도 사납고 험상궂게 짖어댄다.
3
만일, 그렇다면 사회 전체가 강제노역장인 맹골수도에서 어떻게 빠져나와 ‘시인-부처의 길’을 걸어갈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 자체를 사랑하고, 모든 이기주의와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속죄제는 생명존중의 사상이고, 일 자체의 사랑은 ‘자본가와 악마의 길’을 거절하고 ‘시인과 부처’가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바다에는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들고난다
물때는 태양과 지구와 달이
힘겨루기 끝에 만들어 낸 삼각관계
물때는 어민들의 숨결이다
바다에 몸을 기대고 사는 어민들은
바다 생물들의 심장과
같은 주파수를 갖고 태어난다
---[복길리 바닷가] 부분
간장독에 푸르고 둥근 하늘 내려온 날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竈王神도 빙긋 웃는다지
씨간장은 피와 땀의 결정체였으니
어머니 가슴에도 응어리진 씨간장 한 줌
보석처럼 숨겨져 있겠다
---[침묵의 꽃] 부분
매화, 연꽃, 국화, 작약, 목단, 무궁화 등
온갖 꽃이 오랜 고행 끝에 활짝 피었다
어느 불심 깊은 장인이
꽃밭 채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을까
---[대웅전에 핀 꽃--논산 쌍계사 대웅전 꽃 문살] 부분
연어는 발갛게 충혈된 알 낳자마자
이역만리 대장정의 삶을 마감한다는데
암수 한몸 되어 뽀얀 분비물 뿜어내며
천 일 밤낮 품어왔던 분신을 쏟아내고 있다
생의 마지막이 이렇게 황홀할 수 있다니
---[모천회귀를 꿈꾸다] 부분
김충경 시인은 시를 그의 ‘존재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언어의 사제이며, 그의 언어는 그의 생명의 숨결과도 같다. 풀과 나무와 사슴들이, 고래와 연어와 물고기들이 돈을 바라고 숨을 쉬는 것이 아니듯이, 일 자체의 사랑은 자연의 터전에서 숨을 쉬고 꽃을 피우는 것과도 같다. “물때는 어민들의 숨결”이고, “바다에 몸을 기대고 사는 어민들은/ 바다 생물들의 심장과/ 같은 주파수를 갖고 태어난다”는 [복길리 바닷가]가 그렇고, “씨간장은 피와 땀의 결정체였으니” “어머니 가슴에도 응어리진 씨간장 한 줌/ 보석처럼 숨겨져 있겠다”라는 [침묵의 꽃]이 그렇다. “매화, 연꽃, 국화, 작약, 목단, 무궁화 등/ 온갖 꽃이 오랜 고행 끝에 활짝 피었다// 어느 불심 깊은 장인이/ 꽃밭 채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을까”의 [대웅전에 핀 꽃]이 그렇고, “이역만리 대장정” 끝에 “암수 한몸 되어 뽀얀 분비물 뿜어내며” 그 생의 마지막을 황홀하게 장식하는 [모천회귀를 꿈꾸다]가 그렇다.
김충경 시인의 언어는 복길리 바닷가의 물때이고, 어머니의 씨간장인 침묵의 꽃이다. 또한 그의 언어는 대웅전에 핀 꽃이고, 모천회귀의 연어이다. 시인의 언어는 그의 숨결이고, 대자연이고, 그의 삶의 텃밭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이윤법칙’이 침투해 들어올 여지가 없다. 바다와 같은 주파수를 갖고 태어난 어민들이나 피와 땀의 결정체로 침묵의 꽃을 피운 어머니도 최하 천민의 삶을 ‘시인-부처의 길’로 승화시킨 사람들이고, 오랜 고행 끝에 ‘대웅전에 핀 꽃’을 공양한 장인이나 이역만리 대장정 끝에 이 세상의 삶을 황홀하게 장식하는 연어도 최하천민의 삶을 ‘시인-부처의 길’로 승화시킨 사람들이다.
김충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마우스 패드에는 쥐가 살고 있다}는 최하 천민의 삶을 ‘시인--부처의 길’로 승화시킨 시집이며, 그것은 그가 그의 언어로 숨쉬고, 그가 그의 언어로 티없이 맑고 깨끗하게 꽃을 피워낸 시적 열정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어는 시인의 생명이고 숨결이고, 언어는 시인의 삶의 터전이고 그 꽃밭이다. 언어는 대자연의 생명체들과도 같고, 시는 대자연의 삶의 텃밭과도 같다. 온갖 더러움과 오물을 다 받아들이고도 그 더러움과 오물을 발효시키고 승화시키는 대자연의 꽃밭----.
시는 언어의 꽃이고, 염화시중의 미소이고, 시의 역사는 영원히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될 것이다.
날마다 휴대전화로 문안 인사 오는 아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내 마음 손녀를 통해 만져본다
갓 깨어난 아기 부처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는 나의 분신이여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여!
----[염화시중의 미소] 부분
첫댓글 오늘 비로소 반경환 평론가님의 해설을 전부 읽어봅니다.
많이 부족한 제 시집에 해설이라는 방점을 찍어주셔서 마침내 완전한 생명체로 제 시집이 탄생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