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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용 목사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 배 한 척이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구명보트로 옮겨 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끝까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명보트에 올라탄 사람들은 모두 안절부절 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기다렸다가 그를 태워서 함께 가야 할 것인가? 배는 침몰 직전에 있었습니다. 큰배가 침몰하면 구명보트도 함께 물 속으로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모두들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런데 큰배로부터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왔는데, 그 사람의 손에는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잊어버리고 왔기에 제가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조그마한 나침반이 들려 있었습니다.
인생의 항해를 하는 우리들에게도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게 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할까? 주저하게 됩니다. 이 길을 걸어가면 내가 사는 길일까? 조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의 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나침반으로 삼아서 인생의 길을 선택하고 계십니까?
지금 공중에는 수많은 전파를 타고 수많은 정보와 말들이 떠돌아다닙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음악이 나오는 방송을 선택합니다.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종교방송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교통의 흐름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교통방송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여러분은 어떤 주파수에 당신의 인생의 사이클을 맞추고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무엇을 나침반 삼아서 인생의 문제를 결정하고 있습니까? 동쪽으로 갈 것인가?
서쪽으로 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 당신을 지탱해 주고 있는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인생의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그리고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창조되었습니다]
말씀은 능력이요 사건입니다.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 길을 찾습니다. 방황하던 사람들이 방황을 멈춥니다. 포기했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송장처럼 움직이지 않고 겉모습은 살아있지만 이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세상을 따라서 타락을 일삼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서 가정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해서 매일 짜증과 원망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내를 사랑합니다. 남편을 존경합니다. 가정이 천국으로 변화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 줍니다. 인생의 등대가 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하운슬로 하드]라는 영국의 산악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주로 말을 타고 다녔는데 한번은 길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웨슬레에게 권총을 겨누며 소리쳤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가진 것을 모두 내놔" 강도는 웨슬레의 짐 보따리를 모두 뒤졌습니다. 그러나 책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강도는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습니다. "오늘은 참 재수가 없는 날이군" 하고 소리치면서 돌아서려고 합니다. 그때 웨슬레가 강도를 다시 불러 세웠습니다. [여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하나 주겠소] 하고 성경책을 불쑥 내밀었습니다. [그 책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과 나의 죄를 정결케 해준다 내용이 있는 책입니다. 그 책의 내용을 믿으시오] 하고 말하면서 성경책을 건네 준 것입니다.
강도는 그 책을 받아서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웨슬레가 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중년신사 한사람이 웨슬레 선생을 찾아와 꾸벅 절을 합니다. 웨슬레는 인사를 받으면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년신사는 웨슬레를 바라보며 [목사님! 제가 바로 10년 전에 목사님으로부터 성경책을 선물 받았던 바로 그 강도입니다. 목사님이 주신 성경책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놀라운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책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책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강도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어둠의 아들들이 변하여 빛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 되는 것입니다.
나침반의 방향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 나가게 될 때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이 주어집니다. 거듭나게 됩니다. 내 생명이 살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어둠의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주파수를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방황 길에서 당신의 나침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일마다 다락방 모임을 갖습니다. 아직도 교인들 중에는 구역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쓰는데 이제는 다락방 모임이라는 말에 익숙해 졌으면 합니다.
다락방 모임을 가질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를 우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락방 모임에 나오십니까?
아니면 성령의 역사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나오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모임을 하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모임 중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락방 모임은 순장과 순리더께서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임 가운데 도와달라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서로 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쏟아 붙습니다. 신경을 씁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최고의 선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에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이 모든 것 위에 반드시 한가지를 더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도움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병을 고치고,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현상만을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일종의 컴플랙스 현상이 일어납니다. 자신은 성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은 성령의 역사를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성령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주눅이 들고 자신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는 누구나 성령께서 내재해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여러분 곁에서 길을 안내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성령의 역사는 마치 연극을 할 때에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을 [프롬프터(prompter)]라고 하는데 연극을 하다가 배우가 대사를 잃어버렸을 때 무대 뒤에서 배우가 잃어버린 부분의 대사를 읽어주면, 배우가 그 대사를 듣고 연극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은 연극에서 대사를 대신 읽어주는 사람과 비슷한 역할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나침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은 등대의 역할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길을 가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아니다! 네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이다]하고 일러주십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욕심이 생겨서 주식을 사서 팔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릴 때 성령께서는 [아니다! 욕심을 내지 말아라]하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창피를 당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모면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성령께서는 [지금 당장 창피를 당한다 해도 진실을 말하라. 진실을 말하면 네가 죄로부터 자유하리라]고 충고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프롬프터와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내가 무대에 서서 인생의 대사를 잃어버렸을 때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의 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의 시험을 당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1절에는 [이때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시중 들더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도우셨다는 말입니다. 떡으로 유혹하고, 명예로 유혹하고, 기적으로 유혹해도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고 성령의 도움으로 바른 길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 이하에는 바울이 아시아로 건너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의 길을 막았습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밤중에 환상으로 마케도냐 지역에서 바울을 청하여 부르는 한 사람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결국 바울은 아시아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유럽 쪽으로 가서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바울의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일러주십니다. 시내산 동굴에 숨어서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눈물짓고 있던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일어주었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오늘도 방황하는 여러분의 인생에 나침반이 되시는 것을 굳게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지혜자의 도움이 여러분의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지혜자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고, 또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 하나님께서는 내 주위에 있는 지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나보다 풍부한 삶을 경험한 인생의 선배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나보다 훨씬 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나와는 다른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주위에 몇 명의 신앙의 동지들을 두고 있습니까?
내가 인생의 문제로 고심하고, 힘들어 할 때,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에 몇 명이나 있습니까?
내가 가야할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바다를 표류하는 배처럼 길을 잃고 있을 때, 나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에는 과연 몇 명이나 있는 것입니까?
내가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힘들어할 때 나의 신앙의 안내자가 되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내가 곤경에 빠지고 어려움에 빠졌을 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자라고 하기도 하고 요즘 말로는 [맨토]라고 하기도 합니다. 맨토는 나의 인생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멘토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성장을 돕는 사람을 말합니다.
멘토 라는 말은 오딧세이에서 나온 말인데 기원 1200년 전에 고대 그리스의 오딧세이가 트로이를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전쟁에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또 전쟁터에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오딧세이는 자기의 아들 텔레마쿠스가 걱정되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을 두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딧세이는 자기의 친구에게 자기 아들 텔레마쿠스를 부탁했습니다.
오딧세이가 전쟁을 무사히 치르고 돌아올 때까지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의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오딧세이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에게 학문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세상사는 모든 지혜를 가르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오딧세이는 전쟁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무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딧세이는 자기 아들 텔레마쿠스가 어떻게 변했을까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키는 얼마나 컸으며, 학문은 얼마나 깊어졌으며, 성격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딧세이가 무려 10년 동안 자신의 아들이 변화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은 무려 10년 동안 자기 아들 텔레마쿠스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준 일이 없고, 자기의 친구에게 자기 아들을 맡긴 상태 가운데 있었으니, 오딧세이로서는 너무나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딧세이가 10년만에 돌아와서 자기 아들 텔레마쿠스를 보니까 그 아들이 너무나 탐스럽고, 씩씩하고, 건강하고, 지혜롭게 성장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딧세이가 없는 동안에 오딧세이의 친구가 자신의 아들 텔레마쿠스를 위해서 때로는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친구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상담자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스승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딧세이가 무려 10년 동안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자신의 아들은 아주 훌륭한 왕자로 성장했던 것입니다. 텔레마쿠스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 바로 멘토입니다. 오딧세이의 친구 멘토. 그는 자신의 친구가 없는 동안에 그 아들을 훌륭한 인격자로 키웠던 지혜자요. 조언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로 멘토란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 주는 조언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문제도 우리가 다 해답을 풀어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사의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을 100% 우리가 다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100%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나보다 신앙의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목회자와 장로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락방의 순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리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전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의 곁에서 멘토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미련한 사람은 혼자 의인인 척 행동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지혜자의 도움을 구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멘토가 필요합니다. 멘토는 아이큐가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멘토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지혜와 신앙과 믿음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을 때 멘토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려고 하면 사탄의 유혹이 찾아와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할 때, 신앙의 멘토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헌금을 하려고 하면 인색한 마음이 생기고, 아까운 생각이 들 때에는 멘토를 가까이 하십시오. 예수님은 작아 보이고 자기 자신은 한없이 커 보여서 자신의 교만이 용솟음칠 때에는 멘토를 가까이 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을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운명론에 자신을 맡겨서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운명을 점치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어느 방향으로 이사를 할까요? 부적을 사서 몸에 지니면 수능시험에 높은 점수를 올리겠습니까? 궁합이 잘 맞는 배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서 거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운명론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의 파도와 풍랑 속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나침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힘은 세상의 사주와 운명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의 중요한 반려자는 때로 멘토와 지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을 벌도록 해주는 사람보다도, 명예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사람보다도 신앙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실패의 자리에서 반드시 일어설 것입니다.
잠언 16장 3절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