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모내기를 끝내고 자리를 잡은 무논은 아름답다. 아직 갈메빛이 들지 않아 부드런 연초록의 잎이 바람에 보들보들 흔들리며 황혼에 젖어 있다.
비가 막 갠 냇둑 너머 하늘이 가득했다. 하늘엔 하늘이 가득하다. 바람도 가득하고, 구름도 가득하고 햇살도 가득하다.
모리밭은 누렇다못해 고동빛이 감돌았다. 까끌한 아비의 모리수염이 생각난다. 화분 가득 모리를 심어 놓고 싶다.
갈대밭에서 물뱀이 놀라 무논에 뛰어들어 능숙한 몸짓으로 달아난다. 검은 빛의 띠를 몸에 두르고 흐늘흐늘 헤엄쳐 갔다. 너무나 유연하다.
가끔 거대한 하늘을 가로지르며 구름의 하얀 운적이 보였다. 하늘의 용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나친 것인가 싶게 신기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꽃밭동 가는 길 도로 표지판에 영원이라는 곳이 보였다. 영원으로 가는 길은 메타세콰이어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동진강 너머 그 영원에는 가지 않으리라, 영원으로 가는 길에서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 때론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벌레들이 많다. 금방 볏모를 갉아먹던 곤충이 들켰지만 나는 그놈의 이름을 정확히 모른다. 그저 딱정벌레라 하니 아쉽다. 비단빛이 아름답다. 볏모에서 떼어내려니 가시 달린 발로 악착같이 붙들고 놓질 않는다.
지렁이도 거머리도 유연한 몸을 가지고 있다. 뼈없는 것들의 삶은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또랑에 사는 거미들을 보니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소금쟁이보다 여 잘 물 위를 걷고 뛴다.
오랜만에 땅강아지를 봤다. 땅강아지는 정말 땅빛이다. 퇴화한 날개인가? 등에 오그라붙은 날개 같은 게 보인다. 땅강아지의 눈은 참 작다. 땅을 오물오물 파고 노는 어린아이 막내손가락을 닮았다.
하늘의 운적을 본 날, 꿈에 수증기 가득한 하늘의 구름이 마구 불었다. 시속 4,50 키로로 달려 들었다. 온천지가 폭풍의 전야처럼 요동했으며 그 구름의 장관 앞에 나는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언젠가 이런 꿈을 꾼 듯한 기시감이 든다. 옛날, 구름에선 밥냄새가 났다.
빈집들이 곳곳에 눈에 들어왔다. 퇴락해 무너져 가는 것들의 모양이 호젓하고 쓸쓸하다. 방앗간집 미친 아저씨가 살았던 집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그 집 버려진 항아리에 간장을 들여보면 크고 슬픈 눈을 가진 미친 아저씨의 얼굴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는 낫을 들고 뛰어다녔으며 수풀에 숨곤 했다고 한다.
이 맘 때 논에 비료를 주다 비료를 짊어지고 쓸러져 죽은 할머니가 있다고 한다. 전주서 택시를 몬다는 아들의 택시가 마을에 들어왔다.
첫댓글 산문시를 읽은 것처럼 시골냄새 솔솔나는 풍경화 한장이 그려져요~ 문예글이 아니고 생활글이 맞는 거에요? ^^
^^ 그냥 보고 들은 것의 파편을 주워 모은 것입니다. 프리즘님의 예쁜 프리즘으로 읽어서 좋게 느끼신 게지요.^^ 실은 문예니 생활글이니 나누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관례상 그렇게 한 것 뿐이랍니다. ^^
잘 그려집니다^^ 물을 가득담은 논. 하늘 그리고 황급히 달아나는 땅강아지. 마을과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