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극복하는 신앙(고후 4:7-10)
요즈음 신문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위기라는 단어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생존하기”,
“세계 경제 위기에 처하다”,
“한국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모두 최근 신문의 머릿 기사들입니다.
제목만 봐도 마음에 부담을 주는 글들입니다.
어떤 경제학자는 말하길 IMF 때는 갑작스럽게 위기가 왔는데
지금은 서서히 진행되면서 우리를 더 큰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갑작스런 위기도 극복하기 어렵지만
서서히 진행되는 위기가 더 마음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한 사도 바울은 일평생 어렵고 힘든 위기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때마다 주님만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수많은 위기들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7~10에 보면 주님을 의지하는 신자가 이길 수 있는
위기의 상황 네 가지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무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사면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에 해당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초한지를 읽어 보신 분은 사면초가라는 말의 유래를 잘 아실 것입니다.
삼국지가 후한말의 난세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면
초한지는 진나라고 망하고 전한이 세워지는 사이의 난세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 사이에 패권을 다투는 싸움이 있었는데
초반에는 항우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반에 유방의 세력에 밀리더니
그만 마지막 남은 군사가 얼마 없이 사방에 한나라 군사로 포위되고 맙니다.
그때 한나라는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고향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초나라 병사들 마저 고향 생각이 나서 다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항우는 혼자 남아 자결하고 마는데 그의 나이 31세였습니다.
십 수년 전에 유명연예인 고 안재환씨도 사체가 40억이 넘게 불어나
자기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면 초가의 상황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해결할 방법을 주시지 아니하였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비슷한 상황이 있습니다.
열왕기하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입니다.
그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 명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19장에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을 때 하루 만에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모든 앗수르의 군대가 죽임 당하고 도망하게 됩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자기의 자식인 압살롬을 피해
급하게 도망갈 때 지은 시편입니다.
다윗은 시편 3:6에서 “천만이 나를 에워싸고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렵지 아니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기도로 포위망을 뚫으십시오.
사면이 싸여도 하늘은 열려있습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12지파가 나오는데,
11지파에 땅 나누어지고, 1 지파인 레위인에게는 예배와 기도에 전념하게 했습니다.
전쟁할 때도 맨 앞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어떤 기업에서는 이처럼 목사를 고용해서
다른 것 하지 말고 회사를 위한 기도만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두번째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8에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답답합니까?
오랫동안 어떤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 한계를 느끼고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떤 엄마가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합니다.
아이가 계속해서 속을 썩인 답니다.
공부도 좀 잘하고 신앙 생활도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불경기에는 사업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사업이 언제 풀리려나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낙심하지 말고 주님 붙잡고 기도하면 반드시 풀립니다.
만일 우리 인생에 어려운 위기가 닥친다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조용기 목사는 어려운 위기를 극복하는 4차원의 영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4차원의 영성이란 긍정적인 생각, 절대적인 믿음,
하나님이 주는 비전,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이란 생각을 긍정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위기를 당할 때,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란 어렵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넣어서 우리 마음이 불안해지도록 만듭니다.
생각은 바로 영성생활의 전쟁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성령께서 주장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어려운 위기일수록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도 믿음이 상대화되어 선택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입니다. 어려울 때일 수록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위기가 닥쳐올 때,
신자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계속 격려하며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말미에 가보면
사도바울이 탄 배가 광풍으로 인하여
섬에 좌초된 이야기나 나옵니다.
그 때에 사도바울은 깊은 영성을 가지고
배에 탔던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살 수 있다”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긍정적이고 살리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자적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배의 승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승객들에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이 사도바울의 영성이 바로 위기를 당할 때,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이야기하면 답답할 때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입니다.
고린도후서 4:9절에서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더 부흥하지 않습니까?
로마시대, 일제시대 모두 핍박 받으면서 더 강해졌습니다.
승리의 기도, 능력의 기도, 축복의 기도로 유명한 이금희 사모는
무당 딸로서 일찍이 무당직을 세습하기로 점지받아
온 집안의 총애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친구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 믿게 되자
집안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혼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목사를 만나 결혼한 뒤 사모가 되었을 때부터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 둘씩 예수 믿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이 둘째 언니였는데
몰래 그 집 근처로 이사도 하고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갈 때마다 문전 박대를 받았는데
어느 날 그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형부가 지금 말기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꿈 속에서 계속 자기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형부가 그렇게 박대를 해서 내 좇은 광경이 나타난다고 말하며
자기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금희 사모는 당장 찾아가 복음을 전하였고
결국 온 집안이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버린바 되었지만, 핍박을 받았지만 오히려 집안을 모두 구원시킨 것입니다.
네번째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입니다.
고린도후서 4:9에는“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뚜기를 한번 분해해 보면 원리가 간단합니다.
밑이 둥근 내부 중심에 무거운 쇠뭉치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쇠뭉치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고후 4:7 “보배를 질그릇에” 담았다고 합니다.
질그릇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깨지기 쉽고 죄짓기 쉽고
거기 중심에 금과 다이아몬드를 담았습니다.
오늘 말씀 10절에서는 예수의 생명을 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우리의 마음 중심에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쓰러져도 금방 일어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을 보면
위대해 보이지만 다 연약한 질그룻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죄를 연약함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노아는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잘 했습니다.
특히 부인을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모세는 사람도 죽였고 입이 뻣뻣하고 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엘리야는 우울증에 걸려 죽여달라고 호소했던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고
요나는 사명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악한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지요.
우리에게는 어떤 연약함이 있습니까?
우리의 중심에 예수의 생명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