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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인생 탐구를 시작하며
현자, 니체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
다음은 프랑스의 작가 R.롤랑이 한 말이다.
“인생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은 말이다.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어서 두 번 살 수 없으니 제대로 살라는 말이다. 적어도 먹기 위해 살지 말고, 살기 위해 먹으란 말이다.
출처-<The New York Times, Victor J. Blue>
한 번뿐인 인생인데 ‘나’를 포함하여 ‘우리’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세상 그 어떤 현자도 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80억의 사람에게 80억 개의 인생이 있을 터인데 어찌 정답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인생은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상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변수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얻거나, 반성의 내용도 찾거나 혹은 새로운 인생의 방향성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뇌세포 속에 빛나는 영감이라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작가들이다. 그들이 자신들 삶의 경험에 영감을 버무려 만들어 낸 (작품 속) 100개의 인생을 살펴볼 것이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이 연재가 계속 이어진다면, 한 편당 하나의 인생을 다뤄나갈 것이다(반응이 없으면... 시무룩...). 우리 인생의 해답지는 아니어도 훌륭한 참고서는 될 것이다. 청소년기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자녀와 같이 읽어보길 권한다.
소설 『모비딕』
처음으로 다룰 소설은 『모비딕』이다. 『모비딕』은 1851년에 발간된 허먼 멜빌의 장편 소설이다. 19세기 광기의 포경업이 성행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포경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멜빌은 당시 포경선을 탄 경험을 가지고 서사시적 산문체로 소설 『모비딕』을 써 내려갔다.
서두부터 ‘고래’에 대한 ‘어원’ 탐구와 문헌 ‘발췌록’이 등장하고, 작가의 체험과 도서관에서 조사하고 연구한 고래와 포경에 대한 갖가지 지식이 총망라된 이 독특한 소설은 출간 당시에는 어렵고 낯설다는 이유로 외면당했지만 멜빌이 죽고 30여 년 후에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오늘날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 되었다. 그렇게 소설 『모비딕』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19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계의 금자탑으로 평가받으며, 노벨 연구소가 선정한 '최고의 책'이 되었다.
이 글에선 『모비딕』의 등장인물 ‘에이해브’ 선장의 인생을 들여다보려 한다.
우선,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보자 : 19세기 포경의 시대
미국이란 나라의 사악함(제국주의)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위대함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쇼 미 더 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힘’이지 ‘위대함’이 아니다. 미국의 위대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유럽에서도 독하기로 소문난 아일랜드인들부터 성질 더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네덜란드인까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유럽의 하층민들이 가진 거라고는 드넓은 땅덩어리와 기회뿐인 신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생존은 보장할 수 없지만, 생존의 기회는 제공했으니까. 이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래서 19세기에 미국이 가장 많은 고래를 죽였다. 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신흥 공업 국가는 공장과 도시의 어둠을 밝히고 끝없이 기계를 돌리기 위해 막대한 양의 고래기름이 필요했다. 특히, 향유고래의 뇌경유(뇌기름). 이는 가격도 비싸 미국인들에게 대박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석유 개발은 19세기 말에야 이루어진다. 그때까진 고래기름으로 기계들을 돌리기 위해 썼다. 대서양은 물론이고 태평양까지, 어딜 가도 미국의 포경선이 떠 있었다. 미국의 포경선은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포경선의 3배 가까이나 되었다. 고래를 ‘죽였다’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대량 학살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엔진을 단 철선이 아닌 돛을 단 나무 범선으로 대양을 항해하며 고래를 잡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런 일을 할 가난한 노동자들을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당시 포경산업은 미국의 5대 산업 중 하나였고 그 중심에는 북대서양과 카리브해로 진출하기에 최적인 넨터컷(Nauntucket)항이 있었다. 이곳에서 에이해브 선장의 지도아래 절멸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딴 포경선, ‘피쿼드’호가 출항한다.
넨터컷(Nauntucket)항 위치.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의 도전과 인생
에이해브 선장은 어떤 사람일까? 캐릭터란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그 사람의 유전자가 상호작용한 총체적 결과물이다. 쉽게 말하면 ‘관상은 과학’이라는 건데, 소설 속에 나온 그의 풍모에 대한 묘사로 그의 캐릭터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불길은 옹골찬 노인의 강건함을 눈곱만큼도 손상시키지 않았다. 키가 크고 딱 바라진 몸은 온통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첼리니가 주조한 페르세우스처럼 한점의 변형도 허용하지 않는 형상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에이해브 선장은 강한 육체와 굳은 의지, 그리고 드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이런 캐릭터라면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가 사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것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가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을 죽이기 위해서이다.
그가 모비딕에 이토록 깊은 원한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에이해브의 섬뜩한 풍모와 줄무늬를 이룬 납빛 흉터를 보고 받은 충격이 하도 커서, 나(주인공이자 피쿼드호의 선원 ‘이슈메일’)는 이 압도적으로 닥쳐오는 섬뜩한 기분이 그가 몸의 일부를 의지하고 서 있는 거칠고 하얀 다리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상앗빛 한쪽 다리는 항해 중에 향유고래의 턱뼈를 갈아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이해브 선장
에이해브 선장은 과거 모비딕에 패해 한쪽 다리를 잘라내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고 평생을 외다리로 살아야 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초반으로, 귀족들이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던 시대이다. 가위와 칼을 능숙하게 다룬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은 이발사들에게 외과 수술을 맡기던 때이다. 포경선에 진짜 의사가 있을 리 없다. 부상 선원이 발생하고 외과 수술이 필요하면 독한 술 한잔 먹이고 입에 재갈 물리고 경험 있는 선원 누군가가 칼을 잡았을 것이다.
당시 외과 수술 모습.
강인한 노인,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고 이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는 고통과 함께 분노와 치욕감에 온몸을 떨었을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의 모비딕을 죽이겠다는 인생의 목표가 충분히 이해된다.
당시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풍랑만큼 두려워했던 것은 전염병이다. 목선은 기본적으로 방수가 되지 않는다. 늘 습기 찬 환경에 미숙한 의학지식과 약품, 그리고 좁은 공간의 집단생활은 필연적으로 전염병을 발생시킨다. 중간중간 항구에 들러 신선한 야채를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이유이다.
바다를 홀로 떠도는 유령선 이야기는 괴담이 아니고 실화이다. 항해 중 선원들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여 주인 없는 빈 배가 바다를 떠도는 것이 바로 유령선이다. 그래서 전염병이 돌고 있는 배를 만나더라도 구조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저 물이나 식량 정도를 던져 주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에이해브 선장의 집념은 전염병마저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염병 따위는 두렵지 않소.”
에이해브는 바다에서 만난, 거의 유령선이나 다름없던 제로보암호의 선장 메이휴가 고물 보트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어서 올라오시오.”
(당시엔 포경 대포가 없을 때라 고래에게 가까이 접근한 후 작살을 꽂아 사냥했다. 그런데 돛을 단 범선은 방향 전환이 힘들어 범선을 타고 있다가 고래를 발견하면 작은 보트에 갈아탄 후, 고래에 접근해 사냥했다. 방향 전환이 쉽고 고래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서 범선보다 고래 사냥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에이해브 선장이 전염병조차 무시하고 얻고자 했던 것은 모비딕에 대한 정보였다. 전염병이 돌고 있는 제로보암호는 모비딕을 만났고 모디빅에 작살 하나를 꽂은 일등항해사 메이시는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아! 바다에서 거대한 하얀 형체가 솟아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잡이들은 놀라서 잠시 숨을 죽였다. 다음 순간 격렬한 활력에 넘쳤던 그 불운한 항해사는 공중으로 획 내던져졌다가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와 50미터쯤 떨어진 물속으로 추락했다. 보트는 나무토막 하나 상하지 않았고 노잡이들은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항해사는 영원히 물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메이시의 최후였다.
“그대의 포경 보트! 구멍이 나서 가라앉을 거요. 무서운 꼬리를 조심하시오!”-
우리는 이 섬뜩한 경고에 대한 에이해브 선장의 대응을 짐작할 수 있다. 에이해브의 캐릭터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이 얻는 것이 바로 의지와 용기이다. 기어코 모비딕을 잡겠느냐는 제로보암호 메이휴 선장의 질문에 에이해브는 “물론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에이해브 선장의 피쿼드호에 승선하여 함께한 우리의 여정도 이제 끝이다. 에이해브 선장이 기어코 거대하고 아름다운 영물, 모비딕을 찾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옆구리에서 둘로 갈라진 물결은 일단 흰고래를 씻어 내린 뒤에는 넓게 퍼져서 멀리 흘러갔다. 그 빛나는 양쪽 옆구리에서 고래는 유혹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평온함에 형언할 수 없이 도위되고 유혹당한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공격한 사냥꾼이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래여! 너를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미끄러져 가는 고래여! 너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똑같은 수법으로 파멸시켰는가.”
에이해브 선장은 작살을 움켜쥐고 한쪽 다리로 보트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실은 작살을 모비딕의 한쪽 눈에 꽂았다. 이 거대한 고래는 작살에 연결된 밧줄을 끊어버리고 몸을 돌려 배를 향해 돌진해 왔다. 하얀 이마로 뱃머리를 들이받았고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광경을 보트 위에서 지켜보던 에이해브 선장은 더욱 격렬한 투지를 불태웠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에이해브 선장은 다시 작살을 던졌고 모디빅의 몸부림에, 작살에 연결된 밧줄이 에이해브 선장의 목을 감았다. 에이해브 선장은 보트 밖으로 날아갔고 이어 피쿼드호도 침몰했다. 모두가 죽었다. 단 한 명, 이 이야기의 전달자인 선원 ‘이슈메일’만이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누군가는 ‘광기와 집착’이라고까지 표현했던 에이해브 선장의 인생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작용의 힘과 반작용의 힘은 비례하는 것이다. 추구의 집념이 강했던 만큼 실패의 결과도 가혹했다.
에이해브 선장은 실패한 인생일까
우리에게는 공무원 시험에 계속 떨어져도 9년 정도는 끄떡없이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게 해주는 돈 많은 부모가 없다. 그래서 ‘실패’가 무섭고 두렵다. 작은 실패는 우리의 삶을 위축되게 하고 큰 실패는 내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에 차압 딱지를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머지 팔은 절대로 주지 않겠어. 이제 흰고래는 딱 질색이야.”
“놈을 죽이면 대단한 영광이겠지. 그건 나도 알아. 놈의 머릿속에는 귀중한 기름이 배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놈은 가만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야.”
ㅎㄷㄷ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 ㄷㄷ
모비딕에게 한쪽 팔을 잃은 ‘새뮤얼 엔더비’호의 선장이 에이해브 선장에게 한 말이다. 실패의 전제 조건은 ‘추구’이다. 추구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으니까. 팔을 잃은 영국인 선장은 깨끗이 포기했고 다리를 잃은 에이해브 선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목숨까지 잃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추구하는 바를 포기하거나 축소하며 살아간다. 나이를 먹어가며 인생을 산 햇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보수적으로 삶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 때문이다.
“사람은 욕망이 충족될수록 더 큰 욕망을 갖는 유일한 동물이며,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유일한 동물이다.”
명저 ‘진보와 빈곤’의 저자 ‘헨리 조지’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짐승의 삶은 생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인간의 삶은 욕구보다 더 높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면서도 자꾸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 거야. 천벌이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에이해브 선장의 강렬한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는가. 욕망과 추구,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도전과 실패의 연속. 여기서 삶의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원동력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제 첫 번째 인생 탐구를 마무리해도 될 것 같다. 실패한 인생의 가치, 그것은 ‘실패’ 그 자체이다. 고래를 잡으려다 실패하는 것보다 더 문제인 것은 잡고 싶은 고래 한 마리조차 없는 삶이 아닐까. 실패하는 삶보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조차 없는 삶’이 아닐까.
오늘도 크고 작은 실패 앞에서 좌절해 있을 수많은 ‘나’와 ‘우리’에게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얻어들은 말로 첫 번째 인생탐구를 마무리한다.
“나의 실패담을 가득 모아 가서는 밥 한 그릇 먹고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실패를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거다. 희망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희망을 낳는다. 그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미국 민주당 좌파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 책에서 마주친 인생 100개
딴지일보 2022-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