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미의 새로운 이해
- 갈래에 따른 문체미, 그 의미를 찾아서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규범에 맞으면서도 일정한 논리적 체계를 지닌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규범에 맞지 않거나 글에 논리성이 결여될 경우, 자기가 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읽는 이가 그 글을 통해 받아들이는 바가 일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법에 맞고 논리 정연한 글만 쓰면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만족할 만큼 전달되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어법에 맞는 문장은 언제나 여럿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모른다"란 말을 "나는 모릅니다"라고도 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모른다니까요"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문체는 다양하다. 이것은 어느 것이 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어느 것이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 언어적 대응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문체론의 중요성이 놓여 있다.
II. 기존 문체로 비판
기존 문체론의 갈래 구분은 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따온 것이다. 이태준은 이 책에서 문체를 간결체, 만연체, 강건체, 우유체, 화려체, 건조체 등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간결체와 만연체는 문장의 길이에 따라 나눈 것이고, 강건체와 우유체는 글쓴이의 어조가 강경한가, 아니면 부드러운가를 가지고 나눈 것이며, 화려체와 건조체는 수사법을 많이 구사하는가 적게 구사하는가에 따라 나눈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문체의 변증법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다. 이태준이 언급한 문체들은 모두 개성적인 문체에 해당된다. 유형적 문체라는 개념은 아예 설정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의 글은 보편성과 개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글 쓰는 이는 두 가지 문체가 조화를 이루도록 종합하여야 하는데, 이태준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III. 수필의 갈래에 따른 문체
글의 문체는 타율적으로 결정되는 부분과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을 모두 지니고 있다. 곧 이원성을 지니게 마련인 것이다. 앞의 것을 유형적 문체라 하고, 뒤에 것을 개성적 문체라 한다. 유형적 문체에는 시간과 공간에 따른 문체, 계층과 계급에 따른 문체, 글의 갈래에 따른 문체 등이 포함되지만, 이 중에서 가장 갈래가 많고 복잡한 것은 세 번째인 글의 갈래에 따른 문체라고 하겠다. 문학이 현실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작가가 현실을 파악하는 눈과 태도에 따라 표현되는 내용이 달라진다. 문학적인 글의 문체는 복잡하고 또 전문적인 지식과 감각이 요구된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수필의 갈래를 두 부류로 단순화하여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가. 무거운 수필 - 인과 관계가 중심이 되는 경우
무거운 수필은 제목부터가 무거운 느낌을 준다. 말하고자 하는 뜻이 분명하지만 넌지시 내재화해야 한다. 수필의 본성이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것에 비춰본다면, 중수필은 그런 점에서 사회적이고 시사 비평적이며, 논리성에 의해 설득력을 띤다. 무거운 수필은 주로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수필이다. 무거운 수필이란 '우리'를 주어로 하는 수필이다. 사회 현상에 대한 관찰이나 비판이 주가 되거나 개인의 경험이나 사색이더라도 보편적인 논리가 되게 이를 확대한다. 개인적인 수필이 정서적 미감과 섬세한 표현을 중시하는 데 비해 사회적 수필은 지성의 깊이와 논리적 전개를 중시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메시지는 은근히 문맥 속에 간접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이런 비판적인 글에서는 문제점을 더욱 선명히 부각시킬 필요가 있지만, 본격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를 이루어 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논의의 초점을 일관되게 통일시키되, 현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형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예문1 >
햇볕이 들지않는 후미진 곳에 씨를 내린 보잘 것 없는 잡초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정의精誼를 무시한 살생이 난무하면 결국에는 애초에 생명의 씨를 뿌린 절대자의 노여움을 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올림픽 때문에 그런대로 생명의 위협을 덜 받고 살아온 견공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천공을 찌릇 듯 크게 들려온다. 아침 출근길마다 동상동 개시장을 지나와야 되는 것도 큰 시련이다. 문명이려니 하고 체념하기엔 너무 가혹한 형벌처럼 느껴진다.
- 졸작, ⌜개들의 죽음⌟ -
이 수필은 생명존중 사상에서 나온 글이다. 소위 복날을 맞아 특히 우리나라에서 견공들이 죽어 간다고 아우성치는 요즘에 특히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다. 여기에는 '나'가 들어 있기는 해도 개인적인 신변잡사가 주제가 아니고 사회문제, 더 나아가서는 공존에 관심하여 쓴 글이기 때문에 포멀에세이에 속한다. 그러므로 비판적인 글은 첫째 초점이 분명해야 하며, 둘째 설의법 반어법 등을 동원하여 자신의 태도와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되, 글쓴이 자신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고, 셋째 비유와 대조, 유추 등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비판의 효과를 높이며, 넷째 현상과 본질이 변증법적으로 조응되면서 양자가 유기적인 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비판이 비판만으로 끝나지 않도록, 새로운 대안을 형상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 가벼운 수필 - 정서 전달이 중심이 되는 경우
인간은 바깥 세계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반응하거나 대처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도 한다. 수필은 원래 서정성이 짙고 인간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에 수필 작품은 대체적으로 정서 전달이 중심이 된다. 인간의 정이 움직이면 언어로 표현되고 이 이지가 발달하여 문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이 겉으로 드러나면 문장이 유치해지고 정이 허술해지면 내용이 허전해진다. 정으로 가득 채우면 문장에 해가 미치기 쉽고 듬성듬성 서술하면 내용이 헷갈리게 된다. 정서를 전달하는 글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때 글쓴이는 글에 너무 상투적인 표현으로 채워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기쁨, 자랑스러운 느낌 등이 강렬하게 전달되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예문2>
목탄으로 그린 앙상한 나목이 겨울을 이겨낸 기쁨으로 새 생명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초록의 싱그러운 내음은 춘풍의 올에 실려 교정의 여기저기에 너울대고 있다. 이렇게 화사한 삼월의 새아침에, 너희들과 내가 이 아름다운 구월산하, 배움의 전당에서 만나게 된 것을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으리.
- 졸작, ⌜너를 만나고 여기에⌟ -
학생들의 성장하는 모습에서 무슨 즐거움을 느꼈는지 할 수 있으면 자상하고 실감 있게 적으면 된다. 다음에는 제자들을 보면 마음에 어떤 감정의 변화가 생기는지도 이야기하고, 학생들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남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만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나서 아이가 우울할 때면 아이들 교실에 가서 대화를 함으로써 아이의 기분을 풀게 한 일이라든지 하는 사례를 들어 만남의 효용성을 맛볼 수 있어 학생들과의 만남이 즐겁다는 문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난 다음 만남에서 얻는 교훈을 말한다. 또한 만남 덕에 학생을 매개로 해서 살아가는 의미를 얻을 수 있었던 경험이라든지, 학생들이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준 사례를 통해 만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묘사한다.
IV. 로그아웃
본고는 이태준의 문체론이 가지는 단순한 한계를 비판하고, 필자의 수필을 통해 문체론의 새로운 관점이 필요함을 증명해 보려했지만, 지면 관계상 언어 환경에 따른 문체론 및 문체적인 여러 가지 현상을 문체의 형성요인 및 그것과 연결시켜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문체는 표현상의 수법이라는 측면에서 글쓴이의 개성적 표현이라는 특징과 아울러 표현 기술 일체를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개성과 보편의 융합으로서의 문체를 의미하기도 하므로 문체론 정립에서 반드시 이 세 가지가 종합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것임을 밝힌다. 타율적으로 결정되는 부분과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을 모두 지니도록 문체를 유형적 문체와 개성적 문체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수필의 문장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적절하고 효과적인 언어적 대응인가가 문제라는 측면에서, 문체미가 그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