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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9편 9절-14절: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9절: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우리가 지난번에 돈이나 재물이나 물질을 가지고 사람을 구속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을 입게 되고, 구속을 입은 사람은 영존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빨리 죽고,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똑똑하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죽는다고 해도 500년은 사느냐? 금방 죽을 사람도 돈만 주면 천 년은 사느냐? 지금 뭘 말하는 것 같으냐?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온전을 닮은 것은 썩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구속을 입은 우리는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거다. 우리가 신앙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과 다르다면 우리의 구속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내가 이 하나님의 뜻으로 살면 나는 하나님의 속 성품으로 만들어진다. 이게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라는 거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속사람이 성경처럼 만들어지면 너는 그만큼 사는 거다. 이렇게 되면 육신은 정한 날에 죽지만 속사람은 질적인 면에서 주님처럼 성장이 된 거고, 올라간 거고, 영능의 실력자요, 명철하고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이다.
인간 나를 짐승으로 만들지 않고, 돌로 만들지 않고, 나무로 만들지 않고 인격자로 도덕성자로 자유자로 만들어 놓고 가치판단 평가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분명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읽고 배우고 듣고 깨닫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련한 사람으로, 망할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는 건지, 아니면 영원히 존귀 영광자로, 영적인 면의 부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하시는 건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다른 책보다 성경을 많이 읽어라. 이게 너에게 복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인가 열심히 배워놓으니 그 면에 능력자가 되어서 부자로 사는 것을 본다. 이런 일반이치도 무시를 못하겠거늘 주님을 믿는 것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느냐? 네가 무시하며 살아봐라. 하나님께서 너를 무시해서 모든 만물이 너의 대적이 되게 하신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위하면 자기는 올라간다. 성경에 누누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면, 하나님의 진리말씀을 자기 생명보다 귀히 여기면 너를 어떻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되어있다.
성경에 믿음 있는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우리로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을 보고 배우라는 거다. 아브라함과 롯을 역사적으로 데리고 와서 ‘너는 아브라함과 롯을 보고 가치판단 평가를 해서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라고 묻는 거다. 그런데 보통은 어느 쪽으로 선택을 하느냐? 말로는 다 아브라함을 택하는데,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이 좋다고 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신은 롯의 정신으로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이 불탈 때 너도 타버릴 수밖에 없는 거다. 이걸 말해주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속에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어 하는 의욕을 넣어주셨다. 이를 위해서 ‘이것보다 저것’ 하는 가치판단 평가를 할 수 있게 하셨다. 시장에 가서 남의 물건을 왜 뒤적거리는 거냐? 같은 값이면 싱싱하고 많고 맛있는 것을 고르기 위해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일에는 왜 머리를 써서 이치를 깨닫고 옳은 길로 가려고 하지를 않는 거냐?
물질이나 재산이나 재물로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명철한 자로 영특한 자로 만들지 못하는 거다. 돈을 가지고는 안 되는 거다. 그런데 네가 돈을 가졌다고, 물질을 가졌다고, 부자라고 해서 왜 네 형제를 무시하고 사람을 무시하느냐? 자기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기 목숨을 한 치라도 길게 할 수 있느냐? 못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면 그걸로 끝나는 거다.
10절-11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저가 보리로다.’ 무엇을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가 죽는 것도 네가 볼 것이고, 우둔하고 무지한 자가 죽는 것도 네가 볼 것이고,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며 땀을 흘리고 애를 써서 모아놓은 재물을 타인이 가져가는 것도 네가 볼 것이다. 이런 일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느냐? 이런 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부자라고 해서 오래 사느냐? 아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빨리 죽느냐? 아니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 다 부자로 사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다 부자로 사느냐? 그것도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부자인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도대체 뭐냐?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이 늘 올라가라는 법은 없다. 내리막길도 있는 거다. 몸에 병이 든다든지, 사업이 망한다든지, 천재로 인해서 재해를 당한다든지, 사람으로 인해서 재해를 당하기도 하는 거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안 믿는 사람은 돈이 없으면 일어나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세상을 원망하고 남을 원망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원망할 필요가 없는 거다. 왜냐? 하나님께서 그 사건 환경을 나에게 주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로 하여금 어떻게 하라고 이 사건을 주었는가?’ 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올라올 수 있는 거다. 이러면 정신과 마음부터 넘어지지 않고 일어선다. 이렇게 되면 그까짓 물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성경에 ‘나로 하여금 부자로도 살게 말고 가난하게도 살지 않게 해 달라’는 게 있는데, 하루하루 밥 안 굶고 그저 그저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이게 무슨 말이냐? 잘 사는 사람은 하루에 네 끼 다섯 끼를 먹느냐? 이렇게 먹다가는 죽는다. 우리는 하루 세 끼 안 굶고 먹으면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하루 세 끼로 맞춰놔서 아침에 음식이 배로 들어가면 서너 시간이 되면 소화가 되고 찌꺼기는 대장에 저장을 한다. 또 점심을 먹으면 그렇게 해서 또 저장을 했다가 나중에 열어서 빼낸다.
사람을 보면 지구의 축소판이다. 또 사람의 마음을 쳐다보면 하나님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지? 우리 속에 들어있는 영적 상태와 영적인 신령천국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지? 그러면 자기가 하면 잘 될까? 금방 도통이 나버린다. 그 예로 하나님께서 자기 얼굴을 어련히 알아서 잘 만들어 놓은 건데 왜 찢고 꿰매고 하는 거냐? 눈이 붙어서 안 보인다면 쨀 필요가 있는 거지만 잘 보이는 눈을 이쪽저쪽을 찢어놓으면 사람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산이 많은 부자들은 은근히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보고, 가난한 사람들은 은근히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이라고 본다. 그러니 이렇게 보는 눈이 바로 박힌 거냐, 잘못 박힌 거냐? 잘못 박힌 거다. 사람을 보는 지식이 잘못 됐다 그 말이다. 아닌 말로 이런 눈을 가지고 신랑감을 고른다면 어떤 사람을 고를까? 첫째는 돈 많고, 그 다음에는 인물 좋은 것으로 고르게 된다.
부자가 이런 식으로 해서 배우와 결혼을 한 후에 왜 헤어지는 거냐? 세상에서 행복할 조건이 다 갖춰져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사람을 보는 눈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세상의 재산이나 재물에서 행복을 맛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에 붙은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 정신과 정신에 있는 거다.
돈 많고 부자라고 해서 영리하고 똑똑한 게 아니다. 신문에 나는 걸 보면 무슨 학박사니 무슨 재판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돈 몇 푼 때문에 법 앞에 서고 감옥에 가고 하는데, 이건 똑똑한 게 아니다. 사람이 진리말씀의 이치를 모르면 자기의 사고방식이, 인격이 자라지를 못한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세상의 명예나 영광이나 부귀를 가졌다고 해도, 아무리 물질이 많은 부자라고 해도 인격 면에서 속사람이 망했구나. 하나님의 온전을 닮아가는 것을 속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속사람이 망했구나.
일반적으로 못 배운 사람은 이 사람 속에 배움이 안 들어있다. 배운 사람은 가득 들어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속에 든 게 있어야 한다. 그 든 것에서 지혜가 나오고, 지식이 나오고, 세상을 이겨나가고, 자기 마음을 다스려나가고, 남이 아무리 쿡쿡 찔러도 다 이겨나가고, 물가바람 전쟁바람 세상바람 환난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이겨나갈 수 있다. 이게 없다면 그 사람은 망한 거다. 우리는 사람이 망한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재산 다 털리고, 집안 망하고, 사업 망하는 것만 보지 말아라.
12절: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짐승에게는 인격이 없다. 개를 키우거나 닭을 키우는 사람이 개와 닭에게 ‘너 내 말 알아 듣느냐?’ 라고 해 봐라. 인간은 개나 닭이 인간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개나 닭은 인간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의 존귀성이 무엇일까? 인간 자기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모양을 닮았다. 이건 인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외모, 껍데기, 육신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속사람, 즉 성품, 인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본문의 성도에게 성령으로 감동을 시켜서 사람은 존귀한 존재라고 기록하게 했다. 이 말은 ‘인간아, 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말이다.
인간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마귀의 형상이 아니다. 돼지의 형상이 아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는 사람 중에도 인간 자기가 누구의 형상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세상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이렇게 말을 하지만 믿는 우리는 더 고차원적으로 들어가서 속사람이 누굴 닮았는지 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자기가 들을 때 ‘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너는 원숭이의 형상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좋은지?
일반세상에서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가 된 거라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하다. 원숭이가 진화가 되어서 인간이 된 것이라면 지금 산에 살고 있는 원숭이를 잡아다 문화 문명이 발달된 나라의 아파트에 살게 하면 처음에는 꼬리가 서서히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몸의 털이 다 빠져서 사람이 되어 구청에 호적신고를 하러 가게 되느냐? 진화론은 이런 식의 주장인데, 이런 말을 하면 어린아이라도 믿을 사람이 없을 거다. 그러니 진화론은 미련한 소리다. 원숭이가 진화가 되어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지음 받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거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만들기 전에 이미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영화는 인간이 원숭이의 노예가 되어서 원숭이가 인간을 부려먹는데,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내면 속에는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는 생각이 잠재해 있는 거다. 그러니 이게 다 마귀의 짓이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만드는 거다.
우리 인간은 인격자로 지음을 받았지만 원숭이들은 우리와 같은 인격이 없다. 이렇게 인격을 주신 것은 우리 인간이 나그네 세상에서 창조된 물질을 이용하고 응용하고 활용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을 받고 나도 하나님의 온전을 닮고 너도 하나님의 온전을 닮으라는 거다. 그리고 이 물질세상은 믿는 우리가 나그네 세상을 살면서 말씀으로 훈련 연단을 받아서 믿음의 실력, 영능의 실력자가 되어서 이 실력대로 신령천국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다. 원숭이들은 이런 자로 짓지를 않았다.
짐승은 무엇이 사는 건지, 무엇이 죽는 건지, 왜 멸망을 받는 건지를 모른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 건지, 왜 죽는 건지 전혀 모르는 세계가 짐승의 세계다. 인간 자기는 존재적 가치가 귀하고, 사는 가치가 존귀하고, 죽는 것도 존귀하고, 죽음 이후는 더 존귀한 건데, 인간이면서 이 존귀한 내용을 모른 채 산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거다.
본문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했는데, 자기 존재의 가치성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신령세계의 누림이 있다. 그럼에도 어느 누가 ‘이 세상을 다 줄 테니 네 목숨을 다오’ 라고 한다면 바꿀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을 하면 자기 목숨을 세상 것과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겠지만 자기가 살면서 부분적 지엽적 순간순간마다 자기 목숨을 세상과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기가 세상을 살며 닥치는 현실 속에서 바로 판단을 못하고 자기를 버리고 세상을 택하는 일이 많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가진들 그것을 가지고 뭘 하겠느냐? 목숨도 그렇고, 아닌 말로 나에게 천만금을 줄지라도 내가 그걸 쓰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자기 자식의 목숨을 돈과 바꾸는 부모가 있느냐? 없다. 그런데 이치적으로 보면 이런 일이 많다. 구약성경에 산 자식을 우상에게 바쳐서 불에 태우는 일이 있었는데, 오늘날도 이치적으로 이런 것과 똑같은 짓을 하는 부모가 많다. 그럼에도 이치를 모르니, 어기며 사니 부모가 자식을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집어넣어서 불에 태우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치가 어두우면 미련한 사람이 돼버린다.
13절: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우매함’이란 일반적으로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불타질 물질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자기의 물질을 자손대대로 물려주면 자기의 이름이 영영히 기념될 줄로 알고,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산 사람을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기념한다는 거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인간을 지으신 원인 동기 목적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다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자들을 향해서 우매하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신령한 것을 아는 존재요, 우리 인간은 영생할 자요, 우리 인간은 심판성이 있는 존재다. 자기에게 심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사에 사리가 밝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왜 지었는지를 바로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경은 이걸 모른 채 살면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한다.
성경을 나에게 주신 것은 ‘내가 인간 너를 부정모혈을 통해서 만들어 놨으니 너는 이 말씀대로 살아라’ 라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니까 성경을 안 보고 버리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하느냐? 어디에 처박아 두고 있다가 주일날이 되면 꺼내서 교회에 들고 오는 게 아니냐? 우리는 성경을 봐야 한다. 짐승이 아니면서 짐승처럼 사는 사람이 참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14절: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음부’란 무덤이요, 육신의 생명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공동묘지라 그 말이다. 죽으면 활동도 없고 오각의 오감성도 없다. 죽은 이것을 영적 신앙 면으로 보면 신앙성장이 없는 생명은 죽은 상태다. 예수를 믿으면서 속사람이 자라지 못하면 병든 상태이거나 죽은 상태다.
진리는 산 역사를 하는 것이니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먹었다면 신앙 믿음이 살아나야 하고, 영적 기능과 지능 면이 살아나야 하고, 영적 지혜지식성과 도덕성이 살아나야 하고, 말씀을 깨닫고 써먹어 나가야 하는데 이건 없이 하나님보고 ‘돈 달라. 밥 달라. 부자 되게 해 달라’ 하고 있으면 이 사람은 속사람이 자라지 못하고, 이렇게 되면 깨달은 말씀을 자타의 구원에 써먹지 못하니 믿음의 활동을 못한다. 그러니 이 상태는 마치 죽은 상태와 같은 거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학습세례도 받았다면 신앙 믿음이 자라야 한다. 그래야 사랑스럽다. 예수님도 자라가면서 사람들 보기에 사랑스러워졌다고 했다. 사람은 자라야 좋은 거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지 않은 채로 1년이 지나도 그대로, 10년이 지나도 그대로, 늘 누워서 똥오줌을 싸고 있다면 부모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겠느냐?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펴지 못하고 신앙 믿음성이 자라지 못하는 상태는 가둬진 상태다. 이러면 힘든 사건 환경이 오면 그만 거기에 싹 가둬져서 꼼짝을 못한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 마음을 어디에 딱 가둬놓은 거다. 이건 창살 없는 감옥이다. 자유가 없다. 자유인인데도 자유를 못한다. 신앙에 자유하지 못하고 가둬진 사람은 생각도 펴지 못하고, 마음도 펴지 못하고, 근심 걱정으로 속에 안개가 가득 차인 것처럼 답답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육신이 무언가에 딱 가둬지면 답답하고 근신 걱정에 빠지는 것은 잘 아는데 영적인 면에서 감옥에 가둬진 것은 감지를 못하고 있다. 이러면 남이 이 사람을 볼 때도 ‘왜 저렇게 믿을까?’ 하며 답답하다.
진리는 사람을 가두느냐, 자유하게 만드느냐? 자유하게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케 한다는 여기에는 죄를 이기고, 유혹 미혹을 이기고, 모든 사건 환경을 이기는 게 들어있다. 모르는 상태에서 알게 하고, 무능력에서 능력자로 되게 하니 자유하게 되는 거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가둬져 버린다. 자기가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모르고, 자기의 신앙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남의 신앙상태도 모르면 답답하다. 이런 상태에서 사건 환경의 바람이 몰아치면 그 사건 환경의 파도에 떠도는 신세가 된다. 예수 믿는 목적이 없다 그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이 되는 거다. 이 안에는 다른 것은 다 들어있다. 쉬운 예로 내가 주님을 차지하면 이 안에는 신령계와 물질계가 다 들어있다. 사람도 들어있고, 돈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다. ‘부자 부자’ 외치지 않아도 다 들어있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느냐, 나가게 되어 있느냐? 들어오게 되어있다. 기술자로 부지런한 사람은 돈이 이 사람을 부른다.
신앙에 자유하지 못하고 가둬진 사람은 영은 죽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생명적 신앙활동이 죽은 것처럼 활동을 하지 않으니 이는 죽은 것과 비슷한 거다. 그러니까 내적인 면에서 질적으로 생명적 신앙활동이 죽어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가둬버리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죽지는 않았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환경이 와서 이 사람을 밀고 간다. 즉 환경의 소산이 돼버려서 환경이 와서 ‘울어라’ 하면 지질 울고, 환경이 ‘웃어라’ 하면 ‘헤헤’ 하며 웃고, 주머니에 돈 몇 푼이 있으면 막 웃고,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어찌 살꼬?’ 하며 우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말씀에서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신앙이 힘이 없다. ‘예수 믿어 부자 되자.’ ‘복 복.’ 천만의 말씀이다. 신앙은 이런 게 아니다. 이치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