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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심 감사(시23편 5- 6)
성경본문: 시편23:5-6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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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은 왜 우리를 ‘원수의 목전’에 두실까요?
오늘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닉네임을 정해 봤습니다. “역전의 명수!”
사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것은 통쾌한 복수입니다.
완전히 상황을 역전시키신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역전의 순간이 오기 전, 원수를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You serve me a six-course dinner right in front of my enemies.”
사실 원수를 안 만나는 것이 우리 인생에 더 복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삶의 원수를 만나지 않으면 ‘감사’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위험 가운데서 건져내신 것에 대해 감사는 절절히 느끼지만,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시는 손길은 감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생생하게 우리의 삶에서 함께하고 호흡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생의 원수를 만날 때, 우리의 인격과 삶은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에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수현이 돌보던 환자 중에 금속 공예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입·퇴원을 반복하던 환자와 함께 욥기의 말씀을 나누게 되었답니다. 환자가 말합니다.
“그 말씀 있죠? 왜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는. 제게 그 말씀은 참 다르게 다가와요.”
그 환자가 안수현에게 물었습니다.
“금속 공예를 하는 과정에서 주형에 쇳물을 붓는 단계가 있는데, 이때 불순물이 섞여 들어간다거나,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환자의 대답입니다.
“다시 녹여서 원하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반복합니다.”
정결케 하는 불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심에 감사를 고백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말이죠. 승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듬어 가시고 있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도하심을 모르기 전에는, 운명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거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운명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도하심을 감사”한다는 고백 속에는, 우리의 전 삶과 인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인도하심을 감사한다는 말속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의 인생을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팔자타령)
하루는 국어 선생님이 아무 말도 없이 칠판에 여덟 팔(八) 자를 크게 쓰셨습니다.
“이게 무슨 글자인가요?”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八字(팔자)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八자 앞 획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선생님, 八자가 나쁩니다.”
이번에는 뒤 획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선생님, 八자가 늘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늘어뜨린 것을 지웠습니다.
“선생님, 八자가 좋아졌습니다. 八자가 좋습니다.”
그제야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여러분, 인생 팔자는 이렇게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팔자타령을 하다니요?”
팔자를 누가 만들고 있습니까?
글자를 쓰는 사람에 따라 글자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누구에 의해 인도함을 받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만 산다면, 운명을 따라, 환경을 따라 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는 우리는 주어진 것 때문에 불평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인도하심을 고백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인도하심을 고백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
우리 인간들에게는 미지(未知)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한 번 살아본 적이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미지의 삶을 살기에 불안한 것이고, 불확실성에 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은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험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형제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군 생활 때문에, 결혼하는 신혼부부들은 익숙하지 못함으로 떨게 됩니다.
저도 처음 결혼 주례할 때, 신랑 신부보다 더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무서운 것은 아직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합니다.
미국의 침례교회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키신 분입니다. 어느 정도 인원이 되면 또 개척하고 부흥을 시키는 아주 잘 알려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술집의 바텐더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이 목사님이 결심하고 그 술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아주 간곡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순순히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오는 추수감사절부터 너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마”라고 말입니다.
이 목사님은 정말 기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듣고 집으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추수감사절을 몇 주 앞두고 아버지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제야 자신이 사단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앞일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면, 이 목사님이 그렇게 여유를 주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그 순간 펼쳐질 일에 대하여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 누가 자신 있게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 근원적인 두려움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좋은 선생님들을 만납니다.
선생(先生)이란 인생을 먼저 산, 먼저 경험이 있는 사람이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도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에는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완전한 인도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분은 우리의 전 생애를 완전하게 아실 수 있는 분, 즉 창조주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에 살고 있으나, 과거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누구도 우리의 인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겪었던 일인데, 조크로 많이 나돌고 있지요.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어떤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나에게 교회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니?”
그 아이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 목사님은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너 그 교회에 오지 않겠니? 내가 오늘 너에게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줄게” 그랬더니 이 아이의 하는 말이 “교회 가는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쥐요”라고 말입니다.
한번 우리의 문제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기 원합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분이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윗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IMF>가 와서 회사가 부도 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말로 인생이 막막해지는 때를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데, 그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를 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병원에 가 보았더니 암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일인데, 글쎄 우리 아이가 술 담배가 문제가 아니라, 마약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글쎄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남편이, 그렇게도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여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배신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내가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내가 인생을 멋지게 계획한다고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인생을 자신 있게 인도할 수 있노라고, 네 장래의 일을 내가 책임지겠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다윗은 아주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불확실한 미래에서,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 다윗의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인도하심을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목자이신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게다가 “머리에 기름을 바르신다.”라고 말입니다.
<Living Bible>에 보면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You provide delicious food for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것은, 어려운 적을 만나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밥맛을 잃는 것이지요.
참으로 이상하지요.
저도 이번에 아버님이 아프시면서, 왜 제가 밥맛이 없는지 모르겠더라고요. 2주 동안 아무 이유 없이 2kg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회복시키겠다는 말씀이지요. 그것도 원수 앞에서 말입니다.
여기에서 ‘원수’란 무엇입니까? 때로, 아내가 원수지요, 남편이, 자식이, 그 좋은 돈이 원수가 되기도 하지요. 좋았던 친구가 원수가 되기도 하지요. 정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은 믿었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험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이 제일로 사랑하는 아들이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겨 생명을 구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심복이었던 자들도 대세를 보고는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마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누구도 그런 아픔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참으로 통쾌하게 인생의 반전을 시도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수’는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시94:1)
(개역개정) 시편 94:1-“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원수 때문에, 우리 삶의 원수 때문에, 우리 삶의 장애 때문에 더는 속 태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밥맛이 돌아오게 하시겠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 택함 받은 백성, 존귀한 사람, 만왕의 왕을 의미합니다.
제가 들은 한 가지 간증을 할까요?
수년 전 저는 몇 차례 국정원 신우회 예배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국정원에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무서운 사람들인지 알았는데,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신우회 회장으로 있던 집사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순복음 교회를 다니는 분이었는데, 진급을 앞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확신이 오기를,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이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일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분은 남자였지만, 구역장으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예배도 빠지지를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빠른 진급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된 것은 너무 진급을 일찍 하다 보니까, 정년에 일찍 걸리게 되었고, 이번에 진급을 못 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국정원 원장과 차장이 모두 정치적인 자리였기에, 이분이 바라보는 자리는 이제 한 단계 밖에는 남겨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진급이 발표되던 잘 자신이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옷을 벗을 상황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영적인 원수들의 조롱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하나님이 이러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인도하신 모든 은혜는 고사하고, 오히려 분노를 느낄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분에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음성과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몇 개월이 지나서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몇 달이 지나서야 그 인도하심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 당시 진급 시기는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바뀌기 직전이었는데, 진급이 정치적인 배려차원에서 이루어졌고, 정권이 바뀌자마자, 모두 잘려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옷을 벗으리라고 생각했던 이 집사님이 아주 안전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진급을 하게 된 것이지요.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신 것뿐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세상 가운데서 선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통쾌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은 잠시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해를 받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상을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원수들이 비록 우리를 지금 조롱하고 있을지라도, 그들 앞에서 상을 베푸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빌립보서 4장 6~7절의 말씀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중단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중단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해 보겠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절대로 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49장 15~1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여기에서 ‘정녕’이라는 말은 ‘확실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경험한 자만이 중단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먼저 여러분의 과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잠깐 영상을 보려고 합니다.
극동방송국에서 정제원 군목이 설교한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더군요. 이런 내용입니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 제레미 스캇 브라운이라는 거구의 포수가 있습니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은 110kg이 넘는 거구로 인해 잘 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야구 경기를 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하면 됩니다.
‘이대호 도루하는 소리 하고 있네!’
그가 타구를 때리고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한 번 2루까지 가보려고 하는데, 그만 1루를 돌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1루로 다시 안전하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그를 향해 말합니다.
“뛰어! 홈런을 쳤어”
그가 2루를 돌자 상대방 선수들이 2루와 3루로 뛰라고 손짓을 합니다.
홈런을 쳤는데 왜?
정제원 군목이 설교하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여호와 닛시!’
이미 우리는 이겼는데, 홈런을 쳤는데, 2루와 3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고백, 그의 인도하심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화를 나눠 볼까요?
한 남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합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스승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가방을 남자에게 건네주며 잠깐 들어달라고 있습니다.
남자는 가방을 메고 서 있는 동안 스승은 마당을 쓸고, 꽃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렇게 30분쯤 지나자 남자는 슬슬 어깨가 쑤셔왔습니다.
그 뒤로도 스승은 남자를 본체만체하고 이런저런 볼일을 보았습니다.
한 시간 뒤 남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언제까지 이 가방을 들고 있어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무거우면 내려놓을 것이지 지금까지 들고 있었나?”
스승의 한마디에 남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내려놓으면 자유로워집니다. 들고 있는 것, 짊어지고 있는 것, 머리에 이고 있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이든 우리를 붙잡는 것이 있고,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얼룩’이라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들, 분명히 나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우리 인생의 얼룩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죄의 오점으로 인해 감사를 잃어버렸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제 우리의 삶에서 실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다듬어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믿음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부분 부분을 볼 때, 아브라함의 인생은 실패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창피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첫 번째 당한 시련은 가뭄이었습니다.
그는 가뭄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어여쁜 아내 때문에 생명을 빼앗길까 두려워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며, 사람의 몸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얻은 뒤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이삭을 더 사랑하므로, 아들을 바치라는 테스트를 거쳐야 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굵직굵직한 것들만 해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은 끈기 있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열국의 아버지로 다듬어 가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실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다듬어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도 두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환난”, “곤고”, “적신.”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래전 [성공을 디자인하라]는 제목으로 수요일마다 시리즈 설교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리즈에서 제가 살아온 모습을 하나하나 간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모습이 정말로 얘깃거리더라고요.
제가 당구를 치다 학사경고를 받은 이야기들, 매일 노름하면서 지냈던 이야기들, 그룹사운드를 만들어서 놀던 이야기들.
그런데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간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도하여 내셨노라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함하고 나니까, 앞으로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기더라는 것이지요.
저는 교인들에게 늘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기 전과 후의 가장 커다란 변화를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내 인생에 대하여 무지무지하게 ‘낙관적’이고 ‘긍정적’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이지요.
다윗의 고백을 저는 이 순간 설교를 하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영원히’
중단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더욱 큰 확신을 주기를 소원합니다.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저는 아직도 캐나다에 있는 토론토의 <CN Tower>에 갔던 때를 잊지 못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타워라고 하는데, 꼭대기에 올라가면,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리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을 거기에서 처음으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발 한발 디디면서, 유리가 깨지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까,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누워서 사진도 찍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절대 깨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나로 하여금 자신 있게, 유리를 향하여 발을 내딛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서는 순간 굉장한 광경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겁이 있을 때는 감히 발을 디디지 못하므로 보지 못하던 세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을 풀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만든 <CN Tower>의 철 골조가 깨어지고, 부러질지라도,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확실히” 나를 따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어느 순간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이야말로, 우리를 두려움에서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확실하게 여러분을 따라갈 것입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의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봐란듯이 여러분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