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정선필 인왕제색도(鄭敾筆 仁王霽色圖)」
석야 신웅순

「정선필 인왕제색도 (鄭敾筆 仁王霽色圖)」138.2㎝×79.2㎝이다.
국보 제216호.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삼성미술관 리움 (한남동)소재
『인왕제색도』는 진경 산수화의 대표작이다. 1757년 조선 영조 27년, 겸재 정선의 나이 76세 때이다.
정선(1676~1759)은 우리 고유의 화풍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개척한 인물이다. 겸재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우리 문화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 담론은 성리학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17, 8세기, 영․정조대에 이르러 이러한 관념적 학문은 실제적인 학문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경제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와 같은 실학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가 있었다. 18세기 전반 그의 그림은 당시 우리나라 산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仁王霽色 謙齋 (鄭敾 白文方印, 元伯 朱文方印) 辛未閏月下浣
『인왕제색도』그림 우측 상단의 낙관이다. ‘인왕제색’은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신미윤하월’은 ‘1751년(영조 27) 윤5월 하순’을 말한다. 겸재는 정선의 호이며 원백은 정선의 자이다.
승정원 일기에는 당시의 일기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1751년 5.19-25 아침 이레동안 장맛비
1751년 5.25 오후 비가 그침
1751년 5월 하순 일주일 동안 내리던 장맛비가 25일이 되어서야 그쳤다. 인왕제색도는 비가 완전히 갠 5월 25일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의 이병연의 졸기에 대한 기록이다.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윤5월 29일 갑오
이병연이 졸하였다. 이병연의 자는 일원으로 한산 사람이며, 호는 사천이다. 성품이 맑고 드넓었 으며, 어려서 김창흡을 종유(從遊)하였다. 지은 시가 수만 수인데, 그의 시는 강건하고 웅장하여 이따금 옛 것을 압도함이 있어, 세상에서 시를 배우려는 자들이 많은 본보기로 삼았다.
정선의 유년 친구였던 사천은 팔순을 넘겨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1751년 5월 25일 일주일 동안 내렸던 비가 그쳤다. 정선은 병석에 누워있는 사천을 생각하며 막 비가 그친 인왕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기를 머금은 인왕산 계곡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담뿍 묻힌 붓에서는 먹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천의 무봉이었다. 그의 붓이 선지에 닿기만 하면 안개가 되고 바위가 되고 숲이 되었다. 서서히 물기에 젖은 촉촉한 인왕산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겸재는 잠시 목전에 둔 사천의 죽음을 생각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오른쪽 하단에다 화룡점정, 사천의 집을 그려넣는 일이었다. 마지막 붓을 댔다. 임종을 앞둔 60년 지기를 향한 그의 절절한 마음, 비에 씻긴 청량한 대명작 인왕산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긴장이 풀렸다. 정선은 붓을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인왕산을 바라보고 자신의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인왕산 그림은 먼 길을 떠나는 60년의 단짝 친구에게 보낸,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한 친구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다음은 『인왕제색도』에 대한 ‘문화유산채널’의 해설이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 였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뒷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 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 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정선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태어났다. 북악산 서남쪽 기슭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 인근이다.
19세기 유본예의 『한경지략』에는 유란동은 북악산 밑에 있으며 청송 성수침이 살던 곳으로 꽃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선에게 인왕산 관련 그림이 많은 것은 그가 바로 그 일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1727년 정선은 북악산 서쪽 유란동 집에서 인왕산 동쪽 기슭, 인왕곡으로 이사했다. 그는 84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줄곧 거기에서 살았다.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 같은 모습을「인곡유거(仁谷幽居)」에 담기도 했다.

「인곡유거(仁谷幽居)」
조선 진경시의 거장 시인 이병연과 조선 진경산수의 거장 화가 정선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이 둘은 10대부터 스승 김창흡 아래에서 동문수학, 여든을 넘길 때까지 오랫동안 장수를 누리면서 시와 그림을 주고 받으며 살았다.
그의「시화상간화」우측 상단에 이병연이 쓴 화제가 있다.
我詩君畵換相 看輕重何言 論價間
내 시와 자네 그림을 서로 바꾸어보니 그 사이 가치의 경중을 어찌 말로 논할 수 있겠는가

시화상간화(詩畵相看畵)
시냇가 풀밭 노송 아래 정선과 이병연 두 노인이 시축과 그림을 펼쳐놓고 한가롭게 대화하고 있다. 실에 바늘이 따라다니듯 겸재의 그림에는 사천의 시가 있었고 사천의 시에는 겸재의 그림이 있었다.
겸재는 65세부터 5년간 양천 현감으로 있었다. 사천은 겸재에게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보자고 제안했다. 이 약속은 한강과 한양 일대를 그린 명작 「경교명승첩」33폭으로 완성되었다.
그의 「압구정」그림 오른쪽 상단에 ‘千金勿傳(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겸재가 찍은 것인지 소장자가 찍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작자 뿐만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이 서첩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영조대의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1698~1761년)는 김창흡과 정선 사제 간의 시화일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에서 그림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정선의 그림에 김창흡의 시를 맞춘다.
사제간의 시화일치․시화상보는 김창흡 사후에는 이렇게 이병연과 정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릴 적에 붓을 손에 든 겸재는 여든네 살, 그의 손에서 붓을 놓을 때까지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가 쓰다 버린 붓을 쌓으면 작은 무덤 하나는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림을 부탁하면 그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정선은 이렇게 그림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사랑을 바친 노력파이면서도 천재이기도 했다. 여기에 사천의 시가 있어 겸재의 그림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월간서예 2017.3,139-141쪽
첫댓글 항상 감사 드립니다
늘 고맙습니다.
교수님. .
귀한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