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도서관 - 규장각 조선의 왕실 도서관[ 奎章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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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26. 19:30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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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서관
규장각
조선의 왕실 도서관
[ 奎章閣 ]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에 세워진 규장각. 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왕실 도서관의 역사
본격적인 국가의 체제를 갖춘 삼국시대 이래, 도서를 관리하는 국가적인 체제가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려 이전에는 자료가 영성(零星)하여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또 고려에 들어 10세기 무렵부터 수서원(修書院), 보문각(寶文閣), 연영전(延英殿), 청연각(淸燕閣) 등의 왕실 도서관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이 초기부터 존재하였고, 특히 경복궁이 처음 세워질 무렵부터 융무루(隆武樓)라는 도서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설이나 운영이 체계적이지는 못하였던 모양이다. 이에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세조 3년(1457)부터 사고(史庫)의 설치를 통한 체계적인 서적 관리 정책을 제안하였다. 또 세조 9년(1463) 집현전(集賢殿)이 혁파됨에 따라 집현전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들이 예문관으로 옮겨졌는데, 세조는 세종이 애써 모은 서적이 산일될까 우려하여 양성지로 하여금 서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이 일을 마친 양성지는 국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제도를 새로이 만들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규장각(奎章閣)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고려 왕실에서 1101년 숙종이 도서인(圖書印)을 찍어 대궐에서 보관한 전례를 따를 것을 주장하면서, 규장각을 설치하여 임금의 시문을 특별히 관리하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세조는 양성지의 건의를 수용하되, 규장각을 따로 만들지 않고 대신 홍문관(弘文館)을 만들어 왕실 도서관의 기능도 함께 맡게 하였다.
그러나 융무루와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여 관리되던 도서는 이후 화재와 병화로 크게 일실(逸失)되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대대로 전해 온 서적이 수만 권 이상이었는데 인종 때 태반이 불에 타서 없어졌고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남은 책이 거의 다 타버렸다고 하며, 그 나머지를 낙선당(樂善堂)으로 옮겨 놓았지만 4만 권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에 숙종은 1694년 왕실의 종친(宗親)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종부시(宗簿寺)에 규장각이란 별도 건물을 세우고 역대 국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조 40년 다시 큰 화재가 일어나 온전한 책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정조, 규장각을 세우다
수원 팔달산에 세워진 정조대왕 동상. 왕실 도서관으로 규장각을 설립한 대학자였던 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출처: (cc) 잉여빵 at ko.wikipedia.org〉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이러한 왕실 도서관의 역사를 보고 크게 탄식하였다. 그래서 1776년 3월 10일 경희궁(慶熙宮)의 숭정문(崇政門)에 즉위한 후 그 이튿날, 창덕궁(彰德宮)의 후원에 규장각을 건립하라고 명령했다.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폐위되면서 정통성이 흔들렸고 그로 인해 고통을 겪어보았기에 정조는 자신이 조선 왕실의 적통(嫡統)임을 분명히 한다는 뜻에서 선왕인 영조의 시문을 정리하는 일을 가장 먼저 시도하였고, 이렇게 하여 정리된 선왕의 문헌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기 위하여 왕실 도서관으로서 규장각을 설립한 것이다.
규장(奎章)은 제왕의 시문(詩文)이나 글씨를 이르는 말이니, 규장각의 출발은 역대 임금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한 도서관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중국 송나라 때 확립된 바 있다. 송나라에서는 용도각(龍圖閣), 천장각(天章閣), 보문각(寶文閣) 등 독립적인 건물을 두어 황제에 따라 별도로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였다. 정조는 임금별로 시문과 글씨를 따로 관리하는 송나라의 제도가 번거롭다고 여겨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어제각(御製閣)이라 하였다가 숙종이 직접 쓴 규장각 현판을 옮겨 달면서 규장각이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규장각을 설립한 사람은 정조이지만 그 아이디어는 세조 때의 학자 양성지가 제공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사실을 나중에 확인하고, “규장각을 건립하자는 의견이 오랜 세월을 두고 합치함이 있기에 그 말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생각하려 함이다.”라 하면서 양성지의 문집을 편찬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91년 문집 [눌재집(訥齋集)]이 완성되자, 정조는 양성지에게 규장각주인(奎章閣主人)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양성지와 규장각의 인연은 더욱 묘하였다. 규장각이 설치되고 관원을 정한 다음 33명의 관원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양성지의 외손이었다. 정조는 이를 기려 규장각에서 [양문양공외예보(梁文襄公外裔譜)]를 편찬하게 하였다. 정조의 위대함은 양성지의 아이디어를 역사에 길이 높이고자 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규장각의 제도와 기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