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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崗의 수고로 운강이강년생가지에 주차후 출발..... 09 : 09 : 32
이강년선생 생가지
비석 : 運崗李康秊先生나신곳 측면 : 運崗李康秊先生記念事業會 謹立 安城 李梓明 謹書 一九九一年 十二月 日
경상북도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129
이곳은 한말 국권 회복을 위해 1896~1908년까지 경상·충청·강원 3도에 걸쳐 13년간 항일 의병장으로 불멸의 공훈을 남기고 순국하신 운강 이강년(1858.12.30.~1908.10.13.)선생의 생가지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樂仁, 호는 雲崗이며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비범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다. 특히 유학과 병서에 조예가 깊었으며, 21세 때인 1879(고종1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용양위부사과 선전관(折衝將軍 行龍驤衛副司果 宣傳官)을 지내기도 했다. 생가는 ‘ㄱ자형’ 팔작지붕 형태의 목조와가 2동과 초가 1동으로 1994년에 복원되었다. 운강은 안중근, 김구, 윤봉길 선생 등과 함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建國勳章 大韓民國章)을 추서 받은 22인 중의 한 분이며, 묘소는 현재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산11에 모셔져 있다.
※ 이강년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잠시 과천에 있는 효령대군 묘소 부근에 묻혔다가, 두 달 만인 12월 13일 제천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강수명 등 의병 동지들이 이를 주선하였다. 무덤이 있었던 두학동 장치미 마을 동쪽 산자락은 이강년이 자주 드나들며 의병을 논의하던 박약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 뒤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던 묘소를 1944년 상주 화북면 유림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현재 명륜회(상주 화북유림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 운강이강년기념관" 내로 이장할 계획에 있다.
코로나19로 인적이 없는 완장리 회관 옆의 마을 골목길을 따라 탐방한다.....
완장리 마을 길을 따라 가는데 화물차를 외딴집 앞에 정차하고 빈집의 물건을 철거하는 중 ...
孝 忠 祠 09 : 17 : 16
민순호[閔舜鎬] : 1880.10.03. ~ 1966.11.18.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출신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23일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거의하고 전 재산을 기울여 군자금으로 삼고 의병을 모아 규합하였다. 이어서 일제의 앞잡이였던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 등 3명을 생포하여 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죄상을 치좌하고 농암 장터에서 효수하였다. 그 후 고모산성(姑母山城)에서 적과 종일토록 교전하다가 패전하였다. 한편 제천의진의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이 이강년을 유격대장에 임명하자 민순호는 그 종사가 되어 서상렬(徐相烈)과 합세해 조령(鳥嶺)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제천 의진의 주요 의병장 대부분이 전사하자 제천의진은 해산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강년 의진도 해산되고 단양 산중으로 피신하여 재거할 것을 계획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다시 이강년과 거의하여 원주(原州) · 연풍(延豊) · 영주(榮州) · 강릉(江陵) · 봉화(奉化) · 충주(忠州) · 안동(安東) · 문경(聞慶) 등 14개 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민순호는 후군소모장(後軍召募將)으로 임명되어 각지를 돌면서 적 수백 명을 처단하였다. 1908년 7월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자 중군장(中軍將) 김상태(金尙台)와 태백산 일대에서 3년여 간 계속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에 의해 가옥과 가재를 소각 당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단양 산중에 은신하여 재기를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운강선생창의일록 雲崗先生倡義日錄》 편찬사업에 간여하여 의병의 활동기록을 남기는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효충사 경내 표석
문경시의 지원으로 효충사를 건립하다(우초 민순호의사 사당) 2012. 6. 6 우초 민순호 의사 기념 사업회
(뒷면)
우초 민순호 의사 기념 사업회 고문 : 정선영 김대영 강용우 김종성 권용문 회장 : 김호건
고 민영필 고 이장희 김동일 이계섭 박성화 황인선 원종목 황정규 이학민 강태선 김정인 김만희 정영석 강수만 송동선
강태종 김수억 이학민 김광래 김정규 민병창 민병덕 민창식 민장수 민광남 민천식 민동식 민만식 민진식
보 호 수
품 격 : 읍나무 고유번호 11-26-2-12 지정일자 : 200 7 20 수 종 : 소나무 수령 : 400년 소재지 :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731
우측 건물 : 독립유공자 민순호의사 묘소관리사무소 완장길 46
장성봉과 애기암봉이 보이는 길
펜션 이정표 : 그린스톤/오토캠핑장&캐빈 1.1km 별보러가자 펜션 640m 숲속정원펜션 600m
해뜰무렵 펜션 010-4586-3077
← 독립유공자 閔舜鎬의사묘 입구 09 : 24 : 15
계곡물의 합수점 정면에 애기암봉이 보이고 아랫쪽에 -별보러가자- 펜션 (주황색건물)이 녹음에 묻혀있다.
09 : 31 : 45
삼거리에서 우측은 주명산장, 좌측은 탐방길.... 09 : 39 : 11
펜션 이정표 : 그린스톤/오토캠핑장&캐빈 570m 별보러가자 펜션 110m (주황색건물) 숲속정원펜션 70m
해뜰무렵 펜션 010-4586-3077 상수도보호구역(완장1리주민일동) 立石 : 주명산장
탐방길 좌측에 개울 건너 숲속정원 펜션 입구...
탐방길 우측에 별보러가자 펜션 입구....
땡볕 길의 전봇대에 걸린 안내판.... 그린스톤/오토캠핑장&캐빈 350m 09 : 42 : 44
탐방길 좌측에 해뜰무렵 펜션.... 09 : 45 : 07
탐방길 좌측에 개울 건너 그린스톤/오토캠핑장&캐빈 09 : 49 : 45
그늘진 계곡에서 휴식.... 09 : 53 : 21
간식을 즐기고 몸도 식히며 편안한 휴식....
오토캠핑장에서 임도까지 옛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잡초가 덮힌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를 따라 경사길을 오르니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나고, 절개지를 지나서 길이 이어진다... 11 : 03 : 29
엄대장이 포장길을 올라 오고 있다.
임도를 나아가서 -가은 정원- 입구에 도착했다. 반대편 길은 버미기재에서 들어 오는 길(왕복 경험있음)
11 : 10 : 23
안내문 : 여기는 사유지로 수목원을 조성 중이며 개장 전이므로 출입전에 아래 전화로 사전 승낙 후 관람을 바라고,
여러 마리 개가 방목 상태이므로 주의바랍니다. 관리인 : 010-3318-5803 주인 010-9411-8798
땡볕에 눈이 부시는 길을 따라 내려온다... 11 : 58 : 20
민순호의사 묘소 가는 길에 바라 본 장성봉과 애기암봉.... 12 : 04 : 51
민순호의사 묘소 입구의 주차장과 묘소에 오르는 계단(계단이 3번 꺽임. 전체187계단)
민순호의사 묘사 오르다가 도중에 좌측으로 들어 가서 차남 영기부부의 묘소가 있다.
상석 : 松田處士驪興閔公諱泳沂之墓 配孺人延安李氏 雙墳 坤坐
(송전 처사 여흥민공휘 영기 지묘 배 유인 연안이씨 쌍분 곤좌)
측면 : 一九九三年 閏三月 日 子 昌植 天植 東植 孫 丙周 丙烈 丙允 丙俊 丙秀
민순호의사 묘소 정면...
상석 : 獨立志士驪興閔公諱舜鎬之墓 庚坐 (독립지사여흥민공휘순호지묘 경좌)
측면 : 檀紀四千三百一年 三月 一日 獨立有功者 大統領表彰狀受賞 ※ 경좌 : 북동방향. 1968년3월1일
비석 : 獨立志士閔愚樵之碑 (독립지사 민우초 지비)
救國貞忠의 大義를 위하여 丹心으로 生平을 마치신 閔公의 諱는 舜鎬요 字는 鳳來니 號를 愚樵라 하시다 그 先은 驪興人으로 始祖의 諱는 稱道(칭도)니 麗朝에 尙衣奉御이시오 그 後에 諱 漬(지)는 壁上三澣功臣으로 諡(시)가 文仁이니 公의 十九代祖이시다. 朝鮮純祖朝에 諱祖榮은 司諫院正言 慶尙道都事를 歷任하시니 公의 高祖이시다 曾祖의 諱는 豊照요 祖의 諱는 光顯이며 孝의 諱는 致一이다 仁川 蔡時萬의 따님을 맞이하여 檀紀四二一八년(1885년)十月三日 聞慶身北面平川里第에서 公을 出生하시다 나면서부터 眉目(미목)이 빼어나고 聰明이 過人하여 七歲에 入學하고 十五歲에 能히 経學에 窮通하니 文名이 鄕內에 들날려 嶠嘏(교하) 俊才로 囑望됨이 크시다 때마침 島夷가 侵寇(침구)하여 時俗이 煩擾(번요)하고 士風이 頹落(퇴락)하여졌으므로 聞達의 듯을 끊고 기우는 國運을 痛恨하여 奮然히 救國抗爭의 隊伍에 參劃할 決意를 굳게 하고 雲崗 李康秊 先生의 幕下에 文官徒事로 被任되어 秘密裡에 總參謀의 重責을 맡으시다 志士를 糾合하여 義理를 鼓動함이 大事를 圖謀하는 急先務임을 主張하여 雲崗과 더불어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先生을 拜謁(배알)하고 大義를 講論하며 師弟의 誼(의)을 맺으시고 家財를 털어 大義名分을 밝히는 昭義新編(소의신편)을 刊行하시다 後人을 모아 兵書를 가르치라는 雲崗의 뜻을 받아 主屹山 萬壽洞에서 不避風雨 스스로 數間茅屋(모옥)을 마련하여 同志와 더불어 講學에 專念中 그 行蹟이 들어나 危殆(위태)함을 일러주는 士友의 勸誘로 不得己 同志를 解散하고 本第로 돌아오시다 厥後(궐후) 雲崗과 더불어 擧義를 熟議하고 原州隊長 閔肯鎬와 秘密裡에 교섭하여 培養山 石窟에 많은 무기를 갈무려 丁未義旅를 대승으로 이끄는데 이바지한 功이 크시다 戊申年에 雲崗이 殉義하자 同志와 더불어 復讐討伐(복수토벌)을 會盟하고 戰時日記와 秘密文書를 分散 保管하고 主屹山에 隱居하시다. 壬子年에 賊徒(적도)의 눈을 피하여 完章里로 옮아와 里民의 禍를 免케 하고 山水에 自娛하며 樵夫로 自足하여 耕穡(경색)하며 樵夫歌一闋(초부가일결)을 지어 憂國哀情을 叙懷(서회)하고 後孫에게 訓誡하시다. 丁巳年 冬에는 親患(친환:부모의 병환)의 徵候를 嘗糞(상분:부모의 대변을 맛봄)으로 徵驗(징험)하여 禱天文(도천문)을 지어 平復을 빌어시고 臨終에는 斷指獻血(단지헌혈)의 精誠을 다하시며 居喪三年에도 하루같이 省墓하는 至極한 誠孝는 이를데 없어시다 乙酉年 光復後에는 雲崗先生記念事業推進에 專念하여 戰史錄과 文集을 刊行하고 寤寐一念(오매일념) 綱常(강상:三綱과 五常=오륜)과 彛倫(이륜:떳떳한 윤리)을 바로 잡아 社會의 秩序恢復(질서회복)과 祖國統一의 聖業成就를 祝願하다가 光榮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체 乙巳年(1965년)十一月十八日 完章里第에서 恬然(념연)히 逝世(서세=별세)하시니 完章里 法興山後麓(록:산기슭)에 安葬하시다. 戊申年(1968년)三月一日에 獨立有功者로 推選되어 大統領表彰狀이 追贈되시다. 配는 全州 李康寅의 女를 娶하시니 泳錫(영석), 泳沂(영기), 泳弼(영필)의 三男을 두시고 泳錫은 公의 伯氏(백씨) 諱 仁鎬에게 出系(양자로 가서 대를 이음)하여 完植 正植 亨植 京植 忠植 孝植 洪植의 七男과 一女이오. 泳沂는 昌植 天植 東植의 三男과 三女이오. 泳弼은 南植 榮植 辰植의 三男과 一女이니 後孫이 繁衍(번연)하시다. 意라 公은 風塵亂世에 大義를 밝히고 三綱을 바로잡아 祖國을 匡復하려고 義旅(여:군사 여)의 陳頭에서 愛國貞忠의 丹誠을 다하시고 끝내 節操(절조:절개와 지조)를 지켜 樵夫(초부:나무꾼)의 生平을 마치시니 그 높고 거룩함 뜻을 우러러 기리고 되새겨 길이 빛내고자 後昆(후곤=후예)의 至誠으로 墓表(묘표: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를 세우고자 함에 글을 請하므로 菲才(비재)로써 辭하였으나 갸륵한 精誠을 欽仰하여 僭越(참월:주제넘다)하나마 敢(감)히 家狀에 憑據(빙거=증거)하여 이에 拙文(졸문)을 씀에 다만 後日의 据摭(거척)을 바랄 뿐이다.
檀紀 四千三百八年 四月 三日 (1975년4월3일)
缶林 洪 在烋(부림 홍 재휴) 謹撰(근찬:삼가짓다)
子 泳錫 謹書(근서:삼가쓰다)
완장리 마을 풍경... 길옆 좌측 건물이 독립유공자 민순호의사 묘소 관리사무소....
독립지사 민순호의사 사당과 애기암봉 전경...
못자리에 모를 기르고있고, 교회 건물이 마을을 밝게한다. ( 기독교 대한감리회 완 장 교 회 )
松崗의 수고로 두메산골에서 애호박을 넣은 칼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13 : 20 : 40
첫댓글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생소하여 호기심이 크고 기대감이 있어 좋다. 완장리를 지나면서 애기암봉을 볼수록 아담하고 정겨웠는데 오늘 가까이를 지나며 볼 수 있어 즐거웠고 계곡을 따라 깨끗하고 밝은 색상의 펜션이 여럿있어 피서지로는 매우 선호하는 장소였다. 임도를따라 가은정원까지 다녀와서 지도상에서 보던 것을 직접 걸어보니 즐거움이 컸다. 운강이강년선생의 유적은 생가와 기념관에서 살필 수 있으나 묘소는 아직 화북 입석리 산11에 있어 안타까웠다. 운강선생을 도와 의병활동을 한 우초 민순호의사의 유적을 살필 수 있어 기대 밖의 경험에 만족하고 정리하면서 좀 더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신적 지주였던 두분의 생애에 감동하며 좋은 탐방을 안내해주어 감사합니다.
加恩 完章里는 雲崗 李康秊 將軍의 誕生地이다.그래서 그 어른을 빼고나면 이야기거리가 없을 정도이다.170餘年前(1858.12) 全州李氏 孝寧公派 18代孫으로 문경군 가북면 도태리(聞慶市 加恩邑 完章里)에서 出生하셨다.生家地 前方 500m 지점에 記念館이 있다.이 마을에는 유독 愚樵 閔舜鎬 先生 등 憂國之士가 많다.雲崗先生 影向이리라.30년전 잣발재를 통하여 애기암봉을 넘어 龍谷으로 鳳巖寺를 찾았던 記憶을 더듬어 옷나무골에 들어서니 그늘 한곳없는 뙤약볕이다.개울물은 맑기만하고 綠陰芳草 우거진 溪谷에서 뿜어오는 香氣는 端然 으뜸이나 뙤약볕은 地獄이다.이런 深山幽谷에 팬션이 즐비하여 난개발이 염려된다.잣발재 삼거리를 지나 오토캠핑장에서 도로는 끝난다.玉溪水와 같은 溪谷水 위에서 잠시 休息하니 너무 疲困하다.오솔길을 따라 登路를 오르는 길은 人跡이 거의 없는 無人之境이다.30분을 더 올라가서 加恩庭園을 만나니 出入統制한다.20餘年前부터 그들만의 王國을 建設하는듯 秘密에 쌓인 庭園이니 궁금하여도 返還點을 그린다.昨年인가 버리기미재에서 이곳까지 왔다가 되돌아간 記憶이 새롭다.元點回歸하는 길은 쉬웠으나 역시 그늘이 그리워져 이 時期부터는 陰地指向的인 方向選擇을 함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