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30년,
1930년대 용정 동성용에 비행장이 설립되어 용정에서 길림, 장춘, 심양과 조선의 회령, 청진, 서울에 이르는 항로가 열렸다.
이 때 용정은 인구 26,035명의 도시로 용정시로 불리게 되었다.
김좌진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공도진에게 저격당하였다.
중공만주성위에서 연변지구 당 조직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족공산당원 왕경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2월에 왕경 등은 화룡현 달라자에서 중공연변특별지부위원회를 건립하고 왕경이 서기를 맡았다. 연변특별지부는 석건평, 달라자, 남양평, 동량사, 대감자, 등 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는 4월 24일에 “5.1투쟁위원회”조직하고 “홍5월투쟁”방안을 세웠다.
1월 23일 용정의 은진, 대성, 동흥 등 학교 학생들이 조선 광주학생운동들의 항일시위를 성원하며 유인물을 살포하고 표어를 붙이며 대규모의 반일반제 시위행진을 벌였다.
1월 28일, 은진중학교와 명신여학교의 학생들이 동산영국조계지 안에서 반일성토대회를 가졌다.
2월 6일 동흥중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대한 일제의 통제에 반대하여 동맹휴학과 반일시위를 행하였다. 대성중학교와 광명중학교 여학부, 간도보통학교 상급학년의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 시위대는 동산장로교 예배당에 모여 일제의 제국주의 압제를 성토하였다.
3월 20일 ML파 만주총국이 ❰해체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제3차 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났다.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속에서 화요파가 3.1운동 1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중적인 항일시위를 일으켜 두도구, 오도구와 개척촌의 농민시위를 성공적으로 전개하자 3월 5일을 기해 3.1폭동 11주년 기념위원회를 ‘전동만폭동위원회’로 개칭하고 소비에트정권을 건설하려 했다. 화요파 공산당 만주총국의 선전부장 장시우와 동만의 윤복송, 강석준이 구속되었다.
5월에 연변지구 공산청년회원이 700여 명, 농민회원이 3,000여명 증가하였다.
5월 27일 화룡현 약수동과 인근 마을 1,000여명 군중들이 약수동 상촌에서 집회를 열고 약수동 소비에트정부를 조직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토지개혁을 전개하면서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였다. 그 후 약수동 소비에트 정부는 일제와 군벌에게 탄압을 받았다. 약수동 소비에트정권은 동북지역 최초의 노농소비에트정부로서 의미를 가진다.
5월 30일에는 4차 공산당 사건이 동만주(북간도)일대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는 세칭 ❰간도 5•30 폭동❱을 지칭한다. 폭동계획은 일국일당 원칙에 의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해체하고 중공공산당에 가입하여 연변특별당부를 조직하였던 간도의 박윤서와 김근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폭동은 삼도구에서 먼저 일어났고 용정에서도 일어났다. 용정에서는 일제의 영사관, 동양척식회사 출장소 등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조선인 지주들의 가옥을 방화하였고 철도와 교량 등을 파괴하였다. 폭동의 참석자는 300~500명 정도였고 만주 군벌군과 일군이 합동으로 진압하였으며 김근 등 85명을 검거했다.
6월 6일 일제간도총영사관의 무장경찰들이 대성중학교에서 ❰5.30❱폭동 혐의자로 교원 5명과 학생 110명을 체포하였다.
8월 길림성정부 교육청에서 ❰연변간민교육변통판법5조❱를 공포하였다.
8월 1일 ‘길돈폭동“을 결행하기로 하여 지휘부에는 중공길돈임시당부의 책임자 마천목을 폭동총지휘로 임명하고 총 지휘부 산하에 행동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지역에 폭동대대를 조직하였다. 액목대대는 철교를 파괴하고 전선주를 무너뜨리고 전화선을 끊어서 길림에서 교하, 돈화에서 신참까지 교통과 연락망을 차단하였다. 돈화대대는 신개도보위단 병영을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액목습격대는 관지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7연대 8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8월 3일 안도현 대전자의 중공임시당부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대전자공안국을 습격하여 총과 실탄을 노획하여 그것을 기초로 하여 노농무장특공대를 조직하였다.
8월 28일 연길현 수신향의 150여 명의 농민폭동대와 군경들 간에 싸움이 붙자 인근의 군중들이 농민폭동대에 참여하여 대원들이 순식간에 수백 명이 되었다.
9월 7일 연길현 세린하, 청지하 300여 명의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삼도국 충신장, 안도현 홍도자, 화룡현 회경가, 왕청현, 훈춘현의 농민들도 선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8.1길돈폭동❱은 타격대상이 당지의 지주들이었는데 그 목적은 토지혁명을 통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10월 동흥중학교에 최호림을 서기로 하는 지하중공지부가 세워졌다.
10월에 대성중학교에 중공대성중학교지부가 성립되어 서기는 임해갑, 조직위원은 최봉학, 선전위원은 김우봉이었다.
1930년에 세워진 학교는 이통권이 세운 용정 광신향의 ❰영실소학교❱ 한 곳이다.
1930년에 세워진 교회는 자료 부족으로 확인할 길이 없고 연변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152쪽에 보면 조직교회 33개, 미조직 교회 54개, 기도처 66개로 교회 총수가 148개이다.
급격한 감소는 아니지만 쇠퇴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상권⌟ 530~ 534쪽에 의하면❰동흥진교회❱가 설립되었다.
2026년 4월 7일 화요일 자시
우담초라하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