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영화음악의 대가 조르즈 들뤼즈가 작곡한 이 영화의 테마 음악 <Farewell My Love>,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입니다
[ 영화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 ]
영화제목에서 천일(The Thousand Days)이란 앤 볼린이 헨리 8세와 결혼하고 아들 못낳는다고 런던탑에서 목이 잘릴 때까지의 천일을 말합니다.
* 헨리 8세(리차드 버튼 분)와 다정했던 한때
이 영화는 영국의 튜더왕조의 국왕 헨리 8세와 그의 두번째 왕후 앤 볼린과의 궁중실화를 1969년에 영화화한 것입니다. 뉴욕 타임스誌는 지난 1000년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스캔들로 영국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사랑 이야기를 꼽을 정도로 앤 볼린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특히 두 사람의 이야기는 폴모리아 악단이 연주하는 슬픈 배경음악 ' Farewell My Love'와 함께 세인들에게 회자되었으며 그 뒤에도 영화 <천일의 스캔들>,미국 드라마 <튜더스1 천년의 스캔들>,<튜더스2.천일의 연인>,<튜더스3.광기의 카리스마> 등으로 재조명되고 있으나 이 영화 <천일의 앤>을 제일로 꼽습니다.
이유는 앤 볼린의 배역을 맡은 불란서 여배우 쥬느비에브 뷔졸드의 가녀린 몸매와 이미지,그리고 당찬 연기, 당대의 명배우이기도 하였지만 리차드 버튼의 마스크와 뛰어난 연기 등이 실제 중세의 영국 궁중의 분위기와 함께 다른 작품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앤 볼린(쥬느비에브 뷔졸드 분)은 영국 신흥귀족 볼린가의 둘째딸로 1507년에 태어나서 1522년까지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영국에 돌아와 헨리8세(리차드 버튼 분)의 왕비인 캐서린(아이렌 파파스 분)의 시녀가 됩니다.
* 목이 잘리던 5월 어느 날
헨리8세는 왕비 캐서린이 유산과 사산의 반복 끝에 1516년 딸을 낳고 아들이 없자, 이혼을 생각하고 있던 중 왕의 무도회에서 약혼자 퍼쉬와 함께 참석한 앤 볼린을 만나게 됩니다.
울지 추기경(안소니 퀘일 분)이 이 두 젊은이의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지만 당시 궁중의 금발과 풍만한 몸매의 여성과 달리 가냘픈 몸매와 신비스런 검은 눈을 가진 앤 볼린을 마음에 둔 왕 헨리8세는 이들을 떨어지게 하여 자신이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왕에게 농락당해 아이를 갖게 된 언니의 모습을 보고 앤 볼린은 일언지하에 왕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 딸 엘리자베스를 낳고...
이럴수록 헨리는 더욱 앤 볼린에게 마음이 끌려 편지를 보내는 등 난리를 피우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앤 볼린은 끈질긴 헨리 8세에게 자기를 정식 왕비로 맞아줄 것과 자신의 소생 자식에게는 왕위 계승자가 되게 하는 조건으로 당시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교황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533년 1월 25일 결혼합니다.
* 미래의 엘리자베스 여왕
학문에 능하고 패션 감각도 뛰어난 앤 볼린은 절제된 궁중생활로 모범이 되었으며, 1533년 9월 7일 딸 엘리자베스를 얻었으나 다음 해는 유산하고 1536년 1월에는 아들을 사산하자 왕자를 염원하던 헨리8세의 마음은 멀어져 갑니다. 왕은 후사를 얻고자 다른 여자를 택하기 위하여 장애물인 앤 볼린을 어거지로 간통죄를 뒤집어 씌우고 1536년 5월 2일 런던탑에 가둡니다.
앤은 간통혐의를 인정하면 목숨만이라도 보전해 주겠다는 왕의 제안에도 자신의 결백과 딸의 왕위 계승을 위하여 거절하고 끝내 죽음을 선택합니다. 2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감한 앤 볼린,그러나 그녀가 남긴 딸 엘리자베스는 대영제국의 영광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여왕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 뒷 얘기 ]
형을 집행하던 날은 늘 회색빛의 런던 날씨답지 않게 앤의 형 집행 날은 하늘이 유달리 푸르러 '앤 블루'라는 말의 유래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푸른 5월의 하늘과 라일락을 보면서 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아, 오월이군요!”이었다고 합니다.
후일 딸 엘리자베스1세는 우여곡절 끝에 1558년 드디어 여왕으로 즉위하여 45년간 재위하는 동안 구빈법.도제조례의 제정,중상주의 정책추진과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등 많은 치적을 남깁니다.
그녀는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월리엄 세익스피어,에드먼드 스펜서,크리스토퍼 말로,프랜시스 베이컨,벤 존슨 등 세계적인 문호와 철학자들의 많은 배출로 문화적 황금기를 구가하는 시대였죠.
그러나 끝내 어머니의 비극으로 어려서부터 온갖 위협과 핍박 속에서-아버지 헨리 8세에게도 폐하라고 부르게 하는 등-자라온 엘리자베스1세는 공주시절 사랑하던 사람 로버트 더들리와 헤어진 후 모든 청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바람에 후사가 없자,튜더왕조시대를 마감하고 스튜어트왕조의 출현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결혼 편력과 리차드 버튼과의 사랑 ]
'세기의 미녀'라고 불리우던 헐리우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지난 2011년 LA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아카데미상 2회 수상의 빛나는 배우로서의 경력보다는 7번 이혼하고 8번 결혼할 정도의 남성편력으로 더 유명했던 배우였습니다.
1951년 5월 테일러는 TWA 호텔 재벌 콘라드 힐튼 주니어와 처음 결혼했지만 1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테일러의 두 번째 남자는 영국 배우 마이클 윌딩으로서 1952년 결혼했지만 1957년 결국 파국을 맞았습니다.
1957년에 할리우드의 명 프로듀서 마이클 토드와 세 번째 결혼을 감행했지만 그가 195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비극적으로 결혼생활을 마무리 합니다. 다음 해에는 토드의 절친이자 자신의 친구였던 여배우 데비 레이놀즈의 남편인 가수 에디 피셔와 염문을 뿌리고 네번째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렇게 많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가 1963년 그녀의 가장 큰 사랑이었던 리차드 버튼과 작품 <클레오파트라>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 5년 만에 1964년 에디 피셔와 이혼한 테일러는 바로 버튼과 다섯 번째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러나 버튼과의 결혼도 1974년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어 1975년 다시 버튼과 재결합하였지만 1976년 다시 버튼과 이혼함으로써 그와의 12년 인연을 마감합니다. 버튼과의 이혼은 주로 버튼의 음주벽과 지독한 흡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후에도 정치인 존워너, 운전기사 래리 포텐스키 등 통산 8번의 결혼생활을 반복해왔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로 마감했습니다.
* 두사람의 다정했던 한때, 여기에서도 담배를 들고있는 버튼
테일러는 생전 "내가 죽으면 리차드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버튼을 사랑했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그녀는 "로마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언제나 미칠 듯 강력한 사랑에 빠졌고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고 생전에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또한 테일러는 생전 인터뷰에서 "리처드가 7번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미네이트 됐지만 단 한 차례도 트로피를 타지 못한게 가슴이 아프다"고 말할 정도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 리차드 버튼의 일생 ]
본명은 리처드 월터 젱키스 주니어. 1925년 11월 10일 영국 웨일스의 폰트리디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마을 교사인 필립 버튼에게 입양되어 자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공군사관 후보생이었으며 이 시기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 여기서도 ㅉㅉ
세익스피어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버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할리우드로 건너가 <내 사촌 레이첼>(1952)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클레오파트라 >(1963),<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 하랴>(1966) 등 10편의 영화에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습니다. 그의 5번의 결혼 중 2번이 그녀와의 결혼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성의><베킷><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천일의 앤 >의 영화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7번이나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한 번도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알코올 중독으로 연기 경력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84년 8월 5일 스위스 제네바의 자택에서 58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하였습니다.
* 한글 자막이 없어 아쉽지만 영화의 맛을 조금 느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