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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으로의 회귀(回歸)
베드로 연구
信天함석헌
1. 베드로란 사람
베드로서는 베드로라는 사람이 사람(人類)에게 준 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알려면, 받는 내가 아무 씨겨레(種族), 나라, 직업, 당과의 구별이 없이 그저 단순한 한 사람의 자리에 서는 동시에 또 주는 저가 어떤 사람임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종교 신자가 자기네 믿는 종교의 글월을 열심으로 믿고 존경하면서도 아무 큰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가장 큰 까닭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높이는 나머지, 사람의 참된 힘씀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는 데 있다. 하나님 말씀이야 물론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역사를 꿰뚫고 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오려면 반드시, 예외는 하나도 없이, 꼭, 참된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만 온다. 통한다는 것은 거친단 말, 꿰뚫는단 말이다. 공기가 우리 가슴과 목을 뚫고 혀와 이를 거쳐서 나오지 않고는 말이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을 뚫고 거쳐 나와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럼 그것을 뚫고 거쳐 나오는데 그 빛깔이나 울림이 거기 들지 않을 수 없다. 나팔 소리 다르고 거문고 소리 다르듯이, 이사야서 다르고 예레미야서 다르다. 그리고 그 악기 따라 다른데 음악의 맛이 있듯이, 같은 하나님 말씀이면서도 사람을 따라 다른 여기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하는 뜻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스러운 점을 빼면 종교 경전은 집 없는 울타리, 곡조 없는 소리같이 크기만 무섭게 크지 속은 아무것도 없는 싱거운 것이다. 참된 사람 되잔 정성은 없이 굉장한 능력, 놀라운 신비만 바라는 종교가, 마음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게만 있고, 그리고 그 종교가 어떤 것임을 오늘도 잘 볼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 힘쓰고 애쓰면(이마에 땀 흘리고 생산하는 수고하면)하나님에게 가 닿을 수 있어도, 사람 되잔 생각하기 전 하나님부터 되려면(동산의 열매부터 따먹으면) 짐승 중에도 가장 더럽고, 독하고, 간교한 뱀같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잘못된 종교의 그림이다. 문제는 그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뚫렀나,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한테 뚫리었나 하는 데 있다.
하여간 베드로부터 먼저 알아야, 그의 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다. 그 의미에서 하늘나라 열쇠를 저가 가졌다. 베드로라니 요나의 아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사람 말 아니다. 욕심 많고, 간교하고 어리석은 『가톨릭』이 “네게 하늘나라 열쇠 준다” 했다고 베드로를 우상으로 섬기지만 베드로가 무언가? 참 사람 되려 애쓴 마음이지. 그럼 하늘나라 열쇠를 『참 사람』에게 준단 말이지 누구에게 준단 말일 수 없다.
사람을 알려 할 때는, 그의 타가지고 나온 것이 무엇이며 그의 힘써 한 것이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사람 노릇은, 제 타고난 것이 무엇임을 알아, 그 지킬 것을 지키고 버릴 것을 버리며, 키울 것을 키우고 고칠 것을 고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럼 베드로의 타고난 것은 어떤 것이며 그의 힘쓴 것은 어떤 것인가? 그는 갈릴리 바닷가 고기 잡는 어부로 나서 인생의 바다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됐으니 그 사이의 자라고 달라짐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이 글은 그러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는 성격이 솔직한 사람이었다. 곧은 사람이다. 안팎을 달리할 줄 모르는 사람, 있는 대로 내놓는 사람,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음에 어려운 생각 있으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하는 사람, 제 마음에 안됐다 하면 십자가에 달리려 달음질하는 주님을 붙잡고 “그렇게 마셔요”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용맹이 있었다. 결단성이 있었다. 나를 따라라 하면 곧 그물을 버리고 따랐고 주님인 줄 안 담엔 옷을 벗었거나 입었거나 생각할 겨를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싫어 버려도 저는 결단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나선 것도 그요, 일이 급한 것을 보고 칼을 뽑아든 것도 그였다.
그러나 곧고, 선선한 사내가 늘 그런 것같이, 그의 결점은 생각을 찬찬히 하지 못하는 것, 경솔한 것, 끈기 있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가장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예수님한테 책망을 먹었고, 닭이 두 번 울기 전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 하리란 경고까지 받았건만, 몇 시간 전에 칼을 뽑아들던 용기는 어디로 잃고, 계집종 앞에서 비겁한 꼴을 보였다. 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도무지 없는 소리가 날 리는 없을 터인데, 성령을 받고, 살 판 죽을판 싸움을 다 겪은 늘그막의 베드로도 로마에 전도하다가 박해가 올 때 도망해 나오다가, 길에서 주님을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했다가, “나는 네가 버리고 나오는 내 양을 위해 다시 못을 박히러 간다” 하시는 말을 듣고야 돌아서 들어가 순교를 했다 하니, 사람의 성격이 고쳐지기는 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본래 교육은 있었을 리가 없었다. 시골에 나서 고기잡이를 직업으로 뱃머리에서 자랐으니 넓은 지식이 있었을 수도 없고, 어드럼 ‘뱃꾼놈’ 이라니 깊은 교양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기에 반대자들도 그 말과 능력에 놀라기는 하면서도 “저 배운 것 없이 무식한 놈들”이라고 업시여겼다. 그러나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건전한 상식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특히 주의할 점이다. 성격이 뜨겁다면 대단 뜨겁게 생긴 사람인데 그래서 실수한 점도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코 뜨거운 사람의 빠지기 쉬운 잘못에 빠지지 않았다. 미치지도 않고 과격하지도 않았다. 같은 시몬이라는 이름 가진 제자 중에 열심당이라는 파에 속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때 그런 열중하는 파들이 많았는데 그리 기울어지려면 기울어질 가능성이 많았는데, 그러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고, 제자 중에서도 특히 신용을 받는 셋 중의 으뜸으로 예수님의 기사 이적의 장면을 가장 많이 자세히 보았고, 더구나 변화산 위의 경험까지 있어, 여기 장막 셋을 지어 영원히 있자고 하면서도, 그가 권능파로, 요샛말로 하면 성신파로, 영통파로, 또는 신비주의로 빠져들지 않은 데 그 놀라운 점이 있다. 그는 시대의 종도 성격의 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잘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상식적인 윤리적인 신앙자가 됐단 말이다.
성경이 다 같이 합하여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것을 사상적으로 분석을 해서 본다면 몇 줄기의 흐름, 혹은 몇 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어서 각각 그 특색이 있다. 이론적인, 교리적인 바울 계통이 하나, 시적인, 철학적인, 내성(內省)적인 요한 계통이 또 하나, 실천 도덕면을 말하고 조직 제도를 주장하는 야곱 계통이 하나, 또 바울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역사철학의 자리에 서는 「히브리서」계통이 하나, 그리고는 베드로 계통이 또 하나인데 그의 특색은 간단 단순하고 평범하여 어디까지 상식적 민중적인 데 있다. 어려운 말이 없다. 참말 이름과 한가지 펀펀한 바위 같아서 별 이상한 것이 없으면서, 그 대신 모든 신앙의 건축이 서는 토대가 된다. 역사적 사실도 여기 들어맞는다. 우리가 예수를 아는 것은 주로 복음서를 통해 되고, 네 복음 중 가장 졸가리가 되는 것은「마가복음」인데, 그「마가복음」이 베드로 계통인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요, 또 오순절 후 교회가 첨으로 일어나는 데 그 주초를 놓은 것이 베드로임도「사도행전」이 잘 말하는 바다. 그는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으면 알 수 있는 예수를 단순한 말로 증거했다. 그의 믿음은 단순 분명한 믿음이다. 사람이 천재는 드물고 민중이 그 전체인 한 베드로는 영원한 베드로로, 그의 편지는 영원히 인류의 편지로 깉을 것이다. 상식적이요 사실적이기 때문에 깉을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것이 좋은 것은 그것이 참이기 때문이다. 떳떳한 것(常)이 늘 있는 것(恒)이오,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것(正)이오, 또 그러기 때문에 참(眞)이다. 베드로의 근본 바탈도 참이요, 그의 힘 쓴 것도 이것이오, 예수께서 보아주시고 하나님이 잡아 쓰신 것도 이것이다. 이것이 그가 베드로, 즉 반석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다.「요한복음」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서 그 선생의 증거를 듣고 따른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의 맨 처음인데 그중 하나는 안드레요, 그 안드레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우선 한 것이 제 형 되는 베드로를 찾아본 일이다. 그리고는 말이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평소 어떤 사람들이요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 알 수 있다. 그 후에 빌립이 나오고, 나다나엘이 나오고 하여서 예수를 중심으로 맨 처음으로 생긴 정신적인 단체가 요 벳사대의 청년 몇 사람으로 되는 모임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람 시작이요 이후에 일어나는 인류 역사의 큰 변동의 싹틈이람 싹틈이다. 과연 씨의 싹틈 같아서 그 소리를 아무도 들을 수 없었으나 그것은 그 뜻으로 하면 굉장히 큰일이었다. 그런데 그 위대한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참에 있다. 이들은 시골서 지식도 없는 가난하고 낮은 청년들이지만 그 마음엔 참이 있었다. 썩어진 인생의 흐린 물결을 따라 먹고 입고 자고 새끼 치고 노는데 끊치려 하지 않고 메시야를 찾았다. 참된 것, 영원한 것, 거룩한 것을 찾았다. 내 한몸의 즐거움을 말고 세상의 평화를 바랐다. 그것을 가져올 이가 메시야다. 그들은 일터에서, 쉴 곳에서, 방에 있을 때, 바닷가에 있을 때 틈만 있으면 그것을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자 곧 서로서로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앞선 것이 베드로였던 모양이었다. 그래 예수께서도 만나자 곧 시몬이라는 이때까지의 이름을 고쳐 베드로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는 깊이 교육적인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봄이 옳다. 본래 반석 같다 해서 좋게 보아 하셨는지, 약한 성격을 고치시려 그런 이름을 주셨는지 모르나 어쨌건 베드로, 바위란 이름을 주신 것이 일생 두고 그의 나갈 길을 지시하시는 것임은 분명하고, 또 그 바위라는 뜻이 주로 그 참된 데서 나오고 그것을 더 키우려 하심인 것도 틀림없는 일이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특별히 뜻을 두고 이끄신 것은 분명한데 그것은 온전히 그의 참된 성격, 참되려 힘쓰는 그것을 보시고 하신 것이다. 마지막에 “네가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따지고, “내양을 먹여라” 부탁을 하고, 어떻게 죽을 것까지를 미리 말씀해주실 때 다른 아무 것도 하실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재지로 되는 것도, 지식으로 되는 것도, 몇몇의 조직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순전히 거짓 없는, 변함없는, 낙심 의심 않는, 실패를 했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참, 정성, 충성의 믿음에서만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며 제자들께 약속한 것도 참의 영이었고, 베드로가 베드로의 맡은 일을 다한 것도 진실하려는 데서다. 자격으로 하면 제일 높은 자격에서고, 체험으로 하면 가장 깊은 체험을 하고, 능력으로 하면 누구보다 큰 능력을 받았으면서, 그 어느 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평범한 믿음만을 가르친 것은, 그가 민중의 하나로 참되려 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 충성하고, 하나님의 종이요 아들로 진실하려 힘썼기 때문이다.
베드로, 베드로,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영원의 진리의 임금이 골라잡은 바위! 로마 제국이 일어날 때도 너는 섰었고, 무너질 때도 너는 섰었다. 네 이름을 도적하는 도깨비들이 유럽 천지를 뒤덮었을 때도 너는 섰었고 그 도깨비가 물러간 때도 너는 섰었다. 땅위의 조그마한 것을 찾아든 인간이 네 꼭대기에 닿는가 돌을 던지며 떠드는 때도 너는 시퍼런 그 얼굴대로 섰었고, 그들이 무색해서 주저앉으려는 때도 너는 시퍼런 그 얼굴로 섰다. 해가 지는 데서도 희망의 빛을 띤 네모양이 보이고 해가 뜨는 데서도 평화의 빛을 쏘는 네 모양이 보인다.
가멜 산이 무너짐 무너졌지, 알프스가 내려앉음 앉았지, 히말라야가 주저앉음 앉았지, 태평양의 물이 마르고 로키가 빠져듬 들었지, 네가 면할 길이야 있느냐, 사해 가에는 망하는 성을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계집이 섰고, 갈릴리 바닷가엔 “부모와 형제와 처자와 있는 것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나서서 바위가 된 사내가 서고. 인류의 사해는 어디 있나, 인류의 갈릴리는 어디 있나. 그 두 사이를 흐르는 요단강인 듯, 한편에 모래밭을 두고 한편엔 푸른 산 위에 선 성을 바라며, 곧은 듯하며 꼬불꼬불, 꼬불꼬불한 듯하며 곧은길을 달리는 이 인류의 역사가 또 한번 폭풍을 만나 물이 흐리고 결이 높다.
베드로! 변함이 없는 네 얼굴엔 무슨 글이 씌어 있나? 이 인류는 그 영원한 참의 반석에 새겨진 영원의 비문을 어떻게 풀어 읽으려나?
2. 아포스톨로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 먼저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을 우선 보는 일이다. 그가 누군지 알아야 그 말의 뜻을 바로 알아듣는다. 말하는 것은 입이 아니요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냐 하는 것은 그 하는 일에 있고, 하는 일을 나타내는 것은 지위다. 그러므로 그 누가 하는 말임을 알고 들어야 한다. 같은 “먹어야 산다”는 말을, 바치다 바치다 못해 굶어죽는 농사꾼이 하면 그대로 머리 숙여 들을 참말이지만, 대통령이 만일 그런다면, 그것은 한 나라 민중을 몰아 개 돼지 떼로 만드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말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 지위를 밝힌다. 사회적인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를, 정치적인 경우에는 정치적인 지위를, 역사적인 경우에는 역사적 지위를. 그러나 입으로 말하고 사실로 그 일을 아니하면 협잡꾼이다.
베드로가 자기 하는 말을 힘있게 듣도록 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 앞에 자기를 소개하려 할 때 그 첫말이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한다. 이것은 사회적 지위도, 정치적 지위도 아니다. 이것은 정신적 지위다. 사회적 지위는 민중이 주는 것이요, 정치적 지위는 나라 주권이 주는 것이나, 정신적 지위는 하나님이 사람의 정신생활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맹자가 하늘 벼슬(天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베드로는 땅에 살면서도 하늘살림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하늘 벼슬을 받았다.
문화를 존중하는 사람은 사회적 지위의 높은 사람을 보면 존경할 터이요,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치적 지위의 높은 사람을 보면 엎디어 절을 할 터이나, 정신 살림을 참 삶으로 아는 사람은 정신적 지위의 높은 사람을 보면 한없는 신뢰와 존경을 드린다.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라는 말을 듣고 기쁨과 믿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생활의 나라에만 있는 형제 사랑의 심정으로 할 것이지, 결코 로마 가톨릭이 하는 모양으로 교황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는 따위 식으로 할 것 아니다. 도대체 ‘교황’이라는 것부터가 대낮의 도깨비다. 황(皇)이니 왕(王)이니 하여 인류를 몇천 년 두고 시달리던 도깨비들이 정치에서조차 거의 다 쫓겨나간 이때에,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종교에 왜 그것을 깉여두고 황이니 왕이니 할까? 이렇게 말하면 혹 그것은 동양말로 번역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본래는 아버지란 말 ‘파파’에서 나온 것이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고치지 않나? 글자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 전제군주(專制君主) 아닌가? 또 파파는 무슨 파파인가? 신부(神父)라고? 베드로가 언제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라 했는가? 그러면 전통에다 밀지만 교회의 그 전통이란 하나님께서 온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상의 망령된 유전’에서 온 것인가?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으니 땅에 있는 자 아버지라 하지 말라 했는데 가슴 속엔 욕심 있고 뱃속에 똥 있는 어떤 인간이 내가 신부(神父)라 하고 섰는가? 그것은 다 권력에 절하던 옛날 버릇 아닌가? 가톨릭교도 많다는 것이 인류의 자랑될 것 없다. 이 인류가 아직 종의 버릇을 놓지 못해 그렇다. 베드로의 정신은 자기 이름을 도적질해가지고 인간의 자유를 엎누르는 가톨릭 제도를 지구 위에서 반드시 몰아내고야 말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를 교황이라지도 않고, 신부라지도 않고 다만 사도라 한다. 사도란 말은 아포스톨로스의 번역이다. 아포스톨로스란 아포(무엇 무엇으로부터)와 스텔로(보낸다) 두 말이 합하여 된 말로서 어디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심부름꾼이다. 그래 사도(使徒)라 번역한 것이다. 본래 시작이 예수께서 전도의 필요가 급하여, 거두기를 기다리는 곡식같이 보였으므로, 어서어서 하늘나라 복된 소식을 전하여 양떼 같이 헤매는 인생을 건지시자고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각 지방으로 보내신 데 있다. 그때는 그저 열두 사람이라고 보통 불렀다. 거기 무슨 높다, 권세다의 생각이 있는 것 아니었다. 그저 참말 단순한 심부름꾼이지. 또 제자의 발을 씻는 예수의 가르침에 높다 낮다의 차별이 있을 리가 없다. 자랑이 있을 것도 없고, 누구를 다스린다는 생각도 있을 수도 없다. 그저 직분, 할 일이 있을 뿐. 일을 영광으로 알고 기쁨으로 알았다. 각 사람이 성령의 주신 은사대로 서로 주고 받았지, 거기 조금도 잘나고 못나고가 있을 수 없었다. 베드로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다 하는 것은 그런 심정으로서다. 그럼 듣는 자도 그런 심정으로 들어 사랑하고 신뢰할 생각을 할 것이요, 결코 숭배하려는 종의 버릇을 가져서는 아니된다. 남을 숭배하는 것은 나도 숭배받잔 심리에서다. 절하여 섬길 이는 하나님 하나뿐이요, 그밖에는 서로 형제다. 사도는 심부름꾼이다. 세상에서 아무도 높여주는 자위 아니다. 그러나 그 맡은 정신적 일을 생각할 때 그 뜻이 지극히 높고 크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니, 예수는 어떤 인가? 그는 온 인류를 죄 가운데서 건지는 것, 그리하여 참을 온 우주에 이루는 것을 그 사업으로 하신이다. 즉 우주의 정신적 완성을 목적하신 이다. 베드로는 그 사업의 한 일꾼으로 불리어 사명(使命)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의 높음은 어느 나라의 임금이나 귀족에 비할 바 아니다. 학문연구를 하여 큰 발명을 한 사람이나 놀라운 예술 작품을 지어낸 사람에 비할 것도 아니다. 나라는 지구의 한 구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학문과 예술은 이 세계에 한정된 것이나, 예수의 이 일은 온 우주보다 더 귀한 사람의 영혼에 관한 것이요, 영원 무한한 정신의 세계 전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의 욕심 있고 조그마한 어느 임금에 드리는 듯 한 존경을 드리는 것은 도리어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높은 존경은 가슴을 내놓는 일이다.
베드로는 어디로 보냄을 받았나?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 땅 끝까지라고 했다. 땅이라니 지구만이 아니다. 물질인 곳은 다 땅이다. 진리는 우주의 끝까지 다 가야 한다. 그의 사명은 우주적 사명이다. 베드로가 우리게 가지고 온 것은 그 심부름이다. 그것은 열두 사도의 일만 아니요 인생을 다 불러 세우는 일이다.
인생은 사도다, 심부름꾼이다. 보냄을 받은 자다. 인생은 재미있는 것을 누리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심부름꾼, 무슨 전할 소식을 받은 자다. 우리 일은 전해주는 일이다. 내 것이다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전해줄 뜻이 있을 뿐이다. 인생은 주저앉을 것이 아니요 달려 나가야 할 것이다. 복된 소식을 받은 자가 산 위를 달리듯이 평탄하고 험한 것을 가릴 사이 없이 달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전할 소식을 받을 자에게 틀림없이 전해야 하는 존재다. 받을 자가 누군가? 인생이다. 전할 소식을 잃어버린 자는 뜻 없는 인생이다. 내가 반드시 옆의 사람, 후의 사람에게 전할 소식을 가진 담에야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아포스톨로스다. 우리는 다 보냄을 받은 자다. 저로서 온 자가 아니다. 주인이 있는 존재다. 지킬 명령이 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보내셨다 했고, 또 사도를 자기같이 세상에 보낸다 하셨다. 사도는 또 우리를 보낸다. 우리게 주는 편지를 보면 그것이 역시 우리를 또 세상 속으로 사명을 띄워 보내는 글이다. 이런 편지를 읽을 때 재물과 지위를 다투는 세상 살림이 실로 적고 더럽기 짝이 없음을 느낀다. 인생을 위대하게 하는 데 이 사명의 인생관, 아포스톨로스 인생관 같은 것은 실로 없다. 조그만 소유는 다투어 가짐으로 될 수 있으나 무한의 소유는 넘겨줌으로 된다. 잠깐 동안의 세력은 꼭 붙잡음으로 할 수 있으나 영원한 세력은 전해줌으로 한다.
사도에게 전함을 받아 우리도 사도가 된다. 씨를 뿌리는 농부 모양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의 진리의 씨를 뿌리고 또 뿌릴 것이다. 먹을 것을 주면 곧 입 속에 감추고 또 달라 하는 잔나비 모양으로, 하늘가서 하늘가로 번져나갈 영원의 진리 주면, 거기서 나는 이윤(利潤)을 따서 끼고 앉아 홀로 먹으려 쪼그리고 앉는 종교가는 어떻게 얄밉고 어떻게 더럽고 어떻게 어리석은 것인가? 종교가 제도로 되어버릴 때 그렇게 되고 만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심부름꾼으로 알고 그의 정신을 엎눌리는 인생에 불어넣으려 물불을 모르고 달려 나가고 나갈 때 갈릴리의 어부들은 온 세상의 권력자들을 놀라게 했건만 그 종교가 제도로 굳어져 돈과 세력을 세상 임금들과 다투게 되는 때엔 독일 시골 한 금광꾼의 아들도 그것을 업시여길 수가 있었다.
그러면 이 아포스톨로스이 아포스텔로 하는 편지,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이 전하는 보내는 명령의 글은 또 읽을 만하다. 세상이 그때와 한 가지 또 어쩔 줄을 모르고, 인생이 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을 모르는 때가 됐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렇게 만든 것은 저 정치화(政治化)한 종교다. 저 교회당의 높은 돌담을 헐고, 거기 앉은 잔나비를 끌어 내리라! 그러기 위하여 몸을 불살라 재로 날려 진리를 세계에 퍼치는 몇 백의 위클리프가 필요하고 몇 천의 후스가 필요하다.
3.뽑힌 자, 나그네 된 자, 흩어진 자
본도, 갈라디아, 감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 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이것은 편지 받는 사람들을 불러일으켜서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는 말이다. 여기 늘어놓는 고장 이름은 다 소아시아 반도에 있는 것들로서 베드로는 거기 있는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본래 유대 사람이 튼튼한 통일을 가진 나라를 이루었던 것은 다윗, 솔로몬 때뿐이고, 그 후는 나라가 망하고 독립을 잃은 지가 오래서 이때에 와서는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있었다.「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내릴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 하였다고 하였다. 나라를 잃고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도 조상 때로부터 오는 그 종교는 버리지 않고 그 때문에 때때로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사람들 말이다. 복음은 이 사람들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퍼질 기회를 가졌었다. 더구나 스데반의 순교 이후 나라 안에서 새로 일어난 믿음에 대하여 핍박이 심해지자 열심 있는 신자들은 사방으로 도망하여 흩어져서 이들 유대 사람이 가 살고 있는 지방에 가서 전도를 하기 시작하여 새 종교는 마치 붙는 불을 친 것처럼 사방으로 튀어나 도리어 더 맹렬히 퍼서 나가게 되었는데 그중에도 이 소아시아 지방이 가장 왕성하였다. 베드로는 지금 거기다가 신앙을 권면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지방에서 나온 역사에 남아 있는 물건 중에는 그때 사람들이 나라에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형벌을 면키 위하여 관청에서 발행한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던 것이 있고, 또 지방관이 자기는 어떻게 기독교도를 엄격히 탄압했다는 것을 중앙에 보고했던 보고서도 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아마 그런 핍박이 바로 오기 전 그것을 미리 느끼고 그런 사자 같은 대적 앞에서 가진 무기라고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절대 사랑의 계명밖에 없는 양 같은 신자들께 힘을 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 것이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들을 보고 무엇이라 부르나? 주의할 만한 세 마디 말로써 한다. 택함을 입은 자, 나그네 된 자, 흩어진 자. 먼저 택함을 입은 자라 한다. 이 말은 맨 첫머리에 나와 있는 말로서 여기 일부러 힘써 부르는 뜻이 들어있다. 원문에는 “베드로, 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한 다음에 곧 ‘에클레크토이스’하는 이 말이 나와 있다. 에클레크토이스란 ‘뽑힌 자들께’ 하는 뜻이다. 베드로의 눈에, 다시 말하면 믿는 자리에서 볼 때, 신자는 ‘뽑힌 자’란 말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이것은 듣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제 자격을 알아서 마음을 가다듬으라고 하는 말이다.
첫째, 나는 뽑힌 자라 할 때 나는 할 일이 있어진다. 뽑는 것은 할 일 때문이다. 뽑는 것은 앞을 위한 것이지 지나간 뒤를 위한 것 아니다. 앞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제 장차 될 생명이요, 될 생명은 곧 일이다. 믿음은 인생을 뽑아 세움이다. 단순한 있음에서 할 일에로 뽑아 세우는 것이 종교다. 기독교는 믿음을 약속이라 하는데 약속은 양편이 서로 무엇을 하마 일을 작정함이다. 하나님이 우리게 대해 하실 것이 있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할 것이 있다. 예수의 하나님은 영원히 일하는 하나님이요 예수의 인생도 영원히 일하는 인생이라. 그러므로 “나는 받들어 섬기러 왔다” 한다. 약속이 할 것에 대한 것이 아니요 받을 것, 누릴 것에 대한 것으로 앞에 대한 것이 아니요 뒤에 대한 것으로 해석이 될 때 특권사상으로 썩어서 버린다. 바꾸어 말하면, 종교가 특권계급의 것으로 될 때 일할 미래의 세계를 보지 않고 지나간 세계의 그림자인 관념 속에 놀고 있다. 그럴 때 종교는 매우 잘 씻기우고 말쑥한 듯 하나 그 인생은 기력 없는 귀족적인 것이다. 가톨릭은 그 좋은 실례다. 앞날에 할 일을 위해 뽑히는 종교가 될 때 인생은 겉으로 어려움이 많은 듯 하나 속으로 매우 활발한 것이 된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히 활동할 때 개인과 사회는 깨끗하고 성하다.
둘째, 나는 뽑힌 자라 할 때 나는 내 뜻으로 결정할 수 없는 내가 되 버린다. 인생의 모든 어리석음, 불만, 건방짐, 뜻 약함, 더러움, 잔인, 각박은 나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곧 다시 말하면 인생을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원할 수 있는 것이 그 전부인 것처럼 알 때 한없이 옅고 작고 짜깝해 진다. 뽑힌다는 것은 인생이 자기보다 절대로 높은 뜻, 자기의 뜻으로 이러고저러고 할 수 없는, 거기 대해서는 순종이냐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냐 하는 두 길이 있을 뿐인, 건드릴 수 없이 거룩한 뜻을 제 주인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될 때 모든 가치판단이 뒤집혀버린다. 저는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큰 것이 무엇인지 높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셋째, 한 번 뽑히고 날 때 나의 의미는 전체에 있게 된다. 저는 맛에 살지 않고 뜻에 살게 된다. 자기는 유한하면서 무한에 참예하게 된다. 비로소 윤리적이 되고 정신적이 된다. 이상에 살고 자기 초월을 하게 된다. 개인, 사회의 모든 부분부분의 일이 하나로 살아나게 된다.
넷째, 그러므로 나는 나를 귀히 여길 수 있게 된다. 내가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뜻이 귀히 여겨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가 만일 그저 “뽑힌 자들에게” 하기만 했다면 아무 신통한 새 맛과 긴장을 듣는 자의 가슴 속에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부름은 유대인이 옛날로부터 들어오는, 귀족의 때 묻은 감투같이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모세 때부터 “우리는 뺀 백성이다”하는 자랑 속에 살아왔다. 사실 스스로 뺀 백성이란 생각은 정신이 어느 정도 발달하면 어느 민족에나 대개 다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 민족의 도덕적 자각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 생각이 누구보다 특별히 강하였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정신 역사의 올라감에 도움이 된 점이 많다. 그때 주위에 있던 여러 이방 민족의 잡스럽고 낮은 종교와 비하여볼 때, 만일 그들의 이 굳은 자존심이 아니었던들 그 속에서 그 높은 윤리의 종교를 유지해올 수가 없었을 것이요, 그 유대교가 아니었더라면 기독교는 있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 바탈에 고장이 생긴 인간에게 언제나 그 잘난 점이 그 못난 점이어서, 유대인의 역사를 말못되게 만든 것도 이 뺀 백성이라는 사상이었다. 그들은 낡은 특권사상 때문에 새 종교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헤매이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뽑힌 자라는 생각이 진리지만 그것이 그 참 힘을 드러내려면 그 뜻이 새로이 고쳐 붙잡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뽑힌 자라는 말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너희는 뽑힌 자다 할 때는, 모세가 가나안 복지를 가르치며 하던 때의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그 아래에 “나그네 된 자” “흩어진 자”하는 두 말을 더 넣었다.
“나그네 된 자” 란 말은,
첫째 여기는 나 있을 곳이 아니다.
둘째 내 본향은 따로 있다.
셋째 여기를 그러므로 조심으로 지내야 한다.
하는 생각을 속에 싼 말이다. 나라를 잃고 외국에 가 붙어 있으며 간 데마다 천대를 받으며 겨우 그 굳어진 종교의 전통 속에서만 자존심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그들이 “나그네 된 자들에게” (혹은 “집을 떠난 이들에게”)하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그냥 있었을 수 없고, 더구나 뒤이어 “흩어진 자들에게” 할 때에 임시임시의 현실에 속고 있던 모든 생각이 왼통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흩어진 자”란 “떠돌아다니는 자”란 말로서 외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에게 붙여진 명사였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들을 때
1. 나는 실패자다, 낙오자다 하는 생각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마디는 “뽑힌 자들에게” 할 때에 관습적으로 일어났던 옛 신앙과 낡은 자존심을 남김없이 깨쳐 부쉈을 것이다. 그러나 또 잊히지 않는 것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 거짓 없는 사도의 입에서 나온 “뽑힌 자들에게”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이 현실의 참혹에도 불구하고 어쩌니 뽑혔단 말인가” 하고 다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라고 해서 한 베드로의 말이다. 너희는 보다 새로운, 보다 높은 의미에서 뽑힌 자들이라 하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은 현대에 있어서도 자기네 민족의 특질을 들어서 정의를 사랑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데 있다고 한다. 아마 그대로 사실이다. 그 특질이 있어서 아인슈타인 저 자신을 낳고 스피노자를 낳고 맑스ㆍ레닌을 낳고, 원자학자들을 낳았다. 그러나 또 그 자존심 때문에 나라를 잃고 종교를 잃고 세계에 떠돌아 헤매게 되었고, 헤매게 되니 자연 붙잡을 것은 굳어버린 전통과 돈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샤일록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해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예수의 민족은 이상하게도 그 둘을 겸해 섬기는 자가 돼버렸다. 그러니 그렇게 되는 운명의 민족 속에서 새 나라의 지초를 골라내려는 베드로가 뽑힌 자라는 옛말에 새 해석을 넣으려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에서는 말이 자란다. 말에 역사가 붙는다. 말의 역사를 모르면, 종교는 말라버린다. 그러므로 “뽑힌 자들에게, 나그네 된 자들에게, 흩어진 자들에게” 할 때에 듣는 자는 “우리는 (보다 더 큰 참 나라 위해)다시 뽑힌 자들이다” 해야 할 것이다.
2절은 그 다시 뽑힘이 어떻게 확실하게 힘 있게 된 것임을 말하자는 말이다. 세 마디로 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1.실패 있을 수 없음을 말함이요,
2. 전에 있는 것이나 후에 있을 것이나, 사람의 눈으로 보아 분명히 실패요 그 뜻을 알 수 없는 듯이 뵈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다 그럴 만한 뜻이 있어 뵈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된 것이란 말이다. 나의 전생도 내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나의 후생도 나의 믿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다. 이리 생각할 때 믿음은 무조건이다. 믿을까 말까 선택을 할 여지가 없다. 믿지 않는 자의 믿지 않음을 내가 알 바 아니고, 내가 믿게 된 이상 나의 믿음은 그렇단 말이다. 내 사색의 결과가 아니다. 어느 선배의 지도로 인해서가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하나로 이미 되어 있는 하나님의 전능한 뜻에 따라 된 것이란 말이다. 아니 믿으려 하여도 아니 믿을 수 없는 내 믿음이라고 믿으란 말이다.
그 다음은 영의 거룩하게 하심 안에서다. 첫째는 원인, 원동력을 말함이요, 이것은 그 방법, 경로를 말함이다. 우리의 믿게 된 것은 영의 거룩하게 하는 힘으로 되는 것이다. 어떻게 거룩하게 하나?
1. 거룩하게 함이라 함은 인생관의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을 내 것으로 알 때 속된 것이요 하나님의 것으로 볼 때 거룩한 것이다.
2. 나의 존재 값이 절대적인 것이 됨이다. 나를 아무도, 나 자신조차도 건드릴 수 없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건드릴 권리가 없다.
3. 그러므로 나는 이대로 전체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곧 전체요 나 이대로 곧 참이다. 첫째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을 것이요,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서 되는 것이므로 바랄 것이다.
셋째는 믿음의 목표를 말하는 것으로서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함으로 될 것이다. 순종함과 피뿌림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의 뽑힌 생애가 거기까지 이를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들을 사랑함은,
1. 하나님을 섬기고 성령에 순종함은 구체적으로는 예수를 따라감에 있다,
2. 거룩한 인격을 숭배하고 그를 위하여 죽음이 인생의 가장 값있는 일이다.
3. 하나님은 구체적으로는 산 인격에서만 볼 수 있다.
4. 인격의 자유는 그렇게 해서만 얻어진다. 그것 하잔 것이 자유의 뜻이다 하는 말이다.
뽑힌 자— 나그네 된 자— 흩어진 자 하는 베드로의 말은 공식으로 되어야 할 진리다. 역사의 어느 시대에나 늘 가다 맞추어 써야 한단 말이다. 인생은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뽑힘에서 나그네로, 나그네에서 헤맴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과정이다. 마치 산꼭대기에 떨어진 물이 골짜기로 바다에 내려감과 같다. 어느 민족이나 개인이나 다 다름없이, 있음 그 자체가 곧 뽑힘이다. 저는 저대로 사명을 가진 그대로 밖에 될 수없는 존재다. 저는 오직 하나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것은 근본 바탈을 잃은 것이요, 헤매임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의 속을 보면, 마치 바다에서 수증기가 뵈지 않는 길로 하늘로 도로 올라가듯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있다. 저를 헤매는 존재로 보는 순간 돌아가 뵘 길(巡禮)이 시작되고 그 길은 마침내 아버지 품에 이르고야 만다. 그러므로 인생은 언제나 자기를 나그네요 헤매는 자로 규정해서만 제 본 바탈을 찾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에 은혜와 화평이 너희에 더욱 많을 지어다 하는 축복의 말은 그러한 인생의 길에 올라서서만 그 무게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이 역사적으로 있는 교회에 구원이 있다 하는 종교는 바다를 가지고 내 집이다 하는 물 같아서 은혜의 실감도 혼의 평화도 있을 리 없다. 하늘은 바다를 버리고 오른 구름만이 볼 수 있다.
말씀 1957. 1 5,6호
저작집30; 20-191
전집20;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