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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79. [역경의 열매] 조명환 (1-20) 믿음으로 극복한 전쟁의 상처와 고달픈 실향민 생활
교회 착실히 다니며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성적은 고3 때 꼴찌도 맛봐
공부와 달리 하나님 교육은 잘 받아
영적으로 성장하는 축복 받고 자라
조명환 월드비전 회장이 6일 서울 영등포구 월드비전 사무실에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이 고향인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지자 혼자 피란을 내려왔다. 땅을 많이 소유한 재산가였던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이북에 머물기로 하고 혹시 모르는 참상을 피하려 장남인 아버지만 남한으로 내려온 것이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생하다 다시 38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다가 국군에 체포됐다.
이때 아버지는 고등학생이라 머리를 삭발한 탓에 북한 인민군으로 오해를 받아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설명해 포로의 신분에서 풀려났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 가족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전쟁 후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으셨다.
북청군 북창읍이 고향인 어머니는 가족과 함께 피란을 오셨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흥남에서 1만4000명의 피란민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나오는데 어머니와 가족들은 바로 그 배의 맨 아래층에 타고 흥남을 탈출해 사흘 뒤 성탄절에 거제항에 도착했다.
나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 후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이였고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실향민이어서 생활은 매우 고달팠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에 나를 비롯한 세 학생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직 등록금을 내지 않았으니 당장 집에 가서 등록금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직도 훤한 대낮에 울면서 학교 문을 나서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착실히 교회에 나가고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은 늘 반에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돌아보면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는데 꿋꿋이 책상에 앉아 공부했던 것이 참 신기하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내가 성실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공부 잘하는 축복을 받고 싶었지만 결국 고3 때 꼴찌까지 하는 굴욕을 맛보며 졸업했다. 하지만 세상 공부와 달리 하나님 교육은 잘 받아 소화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았다. 어머니는 서울 금호동 천막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다 나를 낳았는데 나는 지금도 내가 태어난 그 교회를 다니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은 나의 신앙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한번은 교회에 십일조 내는 것이 아깝다며 교회 앞에 서서 어머니가 교회 가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 하지만 예수를 영접한 뒤 아버지는 세상 풍습을 완전히 버리고 주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기도와 말씀의 양식이 풍성하게 넘쳤다.
약력=1956년생, 건국대 미생물공학과 졸업, 미국 애리조나대 대학원 이학박사,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행정학 석사, MIT경영대학원 블록체인 최고경영자 과정, 건국대 생명과학특성학과 교수, 넥솔바이오텍 공동창업,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 건국대 명예교수, 한국월드비전 제9대 회장.
* [역경의 열매] 조명환 (1) 믿음으로 극복한 전쟁의 상처와 고달픈 실향민 생활
* [역경의 열매] 조명환 (2)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또 다른 어머니, 에드나 넬슨
* [역경의 열매] 조명환 (3) 꼴찌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역경의 열매] 조명환 (4) 시련과 단련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다
* [역경의 열매] 조명환 (5) 기적적으로 미국 유학 왔지만 어려운 강의 내용에 멘붕
* [역경의 열매] 조명환 (6) 주님의 놀라운 섭리로 아시아 최고의 에이즈 전문가 되다
* [역경의 열매] 조명환 (7) 한결같은 사랑 주신 에드나 어머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역경의 열매] 조명환 (8) 하나님 역사하심으로 성공적으로 개최한 국제심포지엄
* [역경의 열매] 조명환 (9)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경험 선물해준 블럼버그 박사
* [역경의 열매] 조명환 (10) 넥솔바이오텍 설립…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 탄생
* [역경의 열매] 조명환 (11) '에이즈 퇴치' 꿈 안고 49세의 나이로 또 미국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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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명환 (14) "2030년까지 에이즈 정복과 후원금 73조원 마련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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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명환 (16) 가난한 나라의 후원 아동에서 월드비전 회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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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명환 (18) ‘자립 마을 사업’ 통해 아프리카 오지마을에도 주님 손길
* [역경의 열매] 조명환 (19) 대지진 현장 방문… 절망 속에서 희망 이야기할 수 있길
* [역경의 열매] 조명환 (20·끝) 하나님의 사역은 내 인생 최대 영광 "God is enough"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명환 (2)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또 다른 어머니, 에드나 넬슨
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 통해 연결
옷과 분유로 시작, 매달 15달러 후원
언제나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그 믿음 통해 하나님 사랑 깨닫게 하셔
조명환 회장이 1963년 서울 금옥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사진. 조 회장은 미국에서 그를 후원한 에드나 어머니의 후원과 기도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조 회장 제공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한데 한 분의 어머니를 더 주셨다. 미국 네브래스카주 세인트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에드나 넬슨이란 분이었다. 에드나 어머니는 내가 아기 때부터 우리 가정에 옷과 분유를 보내 주었고 내가 커가면서는 매달 15달러를 보내 주셨다. 에드나 어머니의 이러한 사랑은 그분이 2001년 하늘나라에 가실 때까지 무려 45년이나 지속됐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우리 가정을 위해 어머니가 다니던 서울 충무성결교회 장로님이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이라는 구호단체를 연결해 주셨다. 미국인 직원이 우리 집을 직접 방문해 갓 태어난 나를 확인하고 사는 환경을 돌아본 후 원조가 시작됐다. 부모님이 편지를 써서 나의 사진과 함께 단체 한국 사무소에 전해주면 직원이 번역해 에드나 어머니께 보내주었다. 마찬가지로 에드나 어머니의 편지는 한국어로 번역돼 우리에게 전달됐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에드나 어머니와 직접 편지를 주고받고 싶어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에드나 어머니가 미국 어디에 살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그분이 미국인이라는 것과 에드나라는 이름이 전부였다. 단체에서는 어떤 신상 정보도 주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에드나 어머니께 구호단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편지를 주고받고 싶으니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영어로 편지를 쓰면 주소를 알려 주겠다고 했고 이것이 내가 영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됐다. 대학 입학 후 1년 만에, 서툴지만 영어로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됐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나는 직접 편지를 주고받게 됐다.
에드나 어머니는 내 꿈을 묻는 말을 자주 했다. 어렸을 때는 소방관이 꿈이라 했더니 ‘내가 기도할게, 너는 세계적인 소방관이 될 거야’라고 했고 다음엔 야구선수라 했더니 ‘너는 세계적인 야구선수가 될 거야’라고 하셨다. 언제나 내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교수가 된 후에도 매달 변함없이 15달러를 보내 주었다. 어머니는 15달러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궁금해 하셨다. 그 돈으로 강의 노트를 샀다거나 퇴근길에 아이들 간식을 샀노라 하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가 담긴 15달러와 편지 배달은 계속됐는데 어머니의 편지에서 마지막 문장은 늘 같았다.
“God loves you. Trust His Love. I pray for you.”(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 그의 사랑을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한다) 에드나 어머니는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사랑으로 지으셨으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모든 날을 아셨고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노래하시는 분임을 알려 주셨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고 부탁했다. 어렵게 살아가는 내게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며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듯 내게 외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에드나 어머니까지 세 겹줄의 중보기도 팀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 받은 것처럼 나 역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중보기도 팀 덕에 힘든 역경을 견딜 수 있었고, 이를 힘입어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게 되었고 감히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3) 꼴찌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성적 나빠 갈 만한 대학 없어 고민 중
아버지 지인인 대학교수의 조언으로
문과생인데도 불구, 공대 지원해 합격
조명환 회장이 고3 시절인 1974년 서울 금호성결교회에서 열린 찬송가 경연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나는 늘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데도 공부를 못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기도도 열심히 했건만 정말 이상하게 성적이 늘 안 좋았다. 고3이 됐을 때 예비고사에는 겨우 합격했지만 본고사를 쳐서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은 에드나 어머니에 이어 두 번째 인물을 만나게 하셔서 길을 내주셨다. 어느 날 김명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님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분은 아버지와 동향이셨다. “명환아, 너 대학 갈 때 안 됐니?” 교수님이 대뜸 묻기에 대학은 가고 싶으나 성적이 형편없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 꿈이 없었다. 내 입에서는 나도 예측할 수 없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교수였다.
교수님은 내 대답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잘됐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갈 성적도 못 되는데 뭐가 잘되었단 말인가. 교수님은 한술 더 떠서 내가 갈 수 있는 학과가 건국대에 있다며 공과대학 미생물공학과(현 생물공학과)에 지원하라고 했다. 교수가 되려면 남이 하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언론에 생명공학이라는 단어가 아예 언급된 적이 없을 정도였는데 교수님은 10년 뒤에는 생명공학 시대가 올 거라 하셨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는 문과생이라 공대에 지원할 수 없었다. 교수님은 미달이 될지도 모르니 무조건 원서를 넣으라 했다. 미달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 미적분만 공부하면 된다고 했다. 수학 문제가 4문제 정도 나오는데 그 가운데 미적분학 문제는 꼭 나오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대학 진학이 어려운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건국대에 입학 원서를 냈는데 그해에는 정원을 조금 초과하는 경쟁률을 보여 본고사를 치러야 했다. 교수님 말씀대로 수학 4문제 중 한 개는 미적분학 문제였고 나는 그 한 문제를 맞혀서 1975년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막상 공대 공부를 하려니 물리 화학 수학 등 교수님들의 강의를 이해하는 것만도 벅찼다. 지금도 대학 성적을 떼어 보면 1학년 학점이 D로 시작한다. 3학년이 되면서 부모님께 학교 앞에서 하숙하게 해달라고 했다. 수업을 마치면 하숙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했다. 드디어 3학년부터 좋은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믿은 건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 11:8)는 하나님 말씀뿐이었다. 결국 나는 평점 A-로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김명진 교수님의 예측은 적중했다. 1980년대 초부터 신문을 펼치면 앞으로 유전공학 시대가 올 것이며 유전공학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보도가 거의 매일 실렸다. 나 역시 그에 편승해 8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있는 오하이오주립대 미생물학과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에 진학할 실력도 안 되던 내가 적성에도 안 맞는 공대에 입학하더니 마침내 미국 대학 대학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고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4) 시련과 단련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다
카이스트 진학과정서 건강진단서 요구
결핵 발견돼 학업 중단하고 건강 돌봐
조명환(왼쪽 두 번째) 회장이 1976년 서울 금호성결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나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끌고 가시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에 쏙 드는 마음과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돼서도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고 밤에 집에 가기 전에도 교회에 들러 기도하며 주님을 불렀다. 평일에는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목사님 설교 중 잠언 12장 24절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나는 비록 남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두뇌를 가졌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실 거라 믿었다.
토요일과 주일에는 온전히 교회에서 봉사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달동네에 있었다. 교회에서 내가 첫 대학생이었고 전도사도 없었다. 일꾼이 부족하다 보니 담임목사님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게 학생회 지도교사를 시켰다. 나는 성가대에서도 활동했고 교회학교 교사로도 섬겼다.
직책을 맡았으니 최선을 다하자 싶어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책방인 종로서적에 가서 유명 목사님 설교집을 샀다. 설교 원고를 공부하고 여러 번 연습해 주일 설교를 했다. 나는 희망이 없는 아이들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고 그들에게 올바른 인생을 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주님 말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18명이던 중고등부 학생회가 85명으로 늘어나는 부흥도 경험했다.
학생회가 부흥하자 목사님은 “이번에는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겨 보라”고 했다. 주님은 이번에도 100여명으로 시작한 유년 주일학교 학생이 300여명으로 늘어나는 부흥의 은혜를 허락해 주셨다. 당시 교회 친구들과 성도들은 내가 하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니 목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은 카이스트에서 공부하려 했다. 그런데 카이스트는 모든 지원자에게 건강진단서를 요구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결핵이 발견됐다. 의사는 최소한 1년은 학업을 중단하고 쉬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몸무게가 53㎏으로 마르긴 했지만 특별히 피곤하거나 아프거나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대학원 진학까지 포기해야 할 만큼 심각하다니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지난 4년간 헌신을 다해 공부하고 사역하고,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그토록 마음과 정성을 쏟았건만 왜 내게 이런 병을 주셔서 학업까지 중단시키시는지.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네 집이 운영하는 경기도 안성의 한 농장에서 1년을 지내며 건강을 돌봤다. 좋은 공기와 농장 할머니가 해주시는 식사, 부모님이 챙겨 주신 건강식으로 유유자적 지냈다. 그 시간은 내 신앙과 인내를 굳건히 하는 시간이었다. 결핵이 언제 나을지도 모르고 더구나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져 온 믿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1년간 착실히 몸을 회복해 1980년 건국대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내가 미국 유학과 교수 생활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체력을 기를 시간을 주셨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5) 기적적으로 미국 유학 왔지만 어려운 강의 내용에 멘붕
강의 중 교수 말도 알아들을 수 없고
한국서 공부하던 환경과 전혀 달라
매일 4시간 자며 공부에 매달렸는데도
평균 B학점 받지 못해 학교서 쫓겨나
조명환 회장이 1986년 미국 애리조나주 애리조나대 기숙사에서 한 살 된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딸의 이름은 ‘위’에 계신 ‘나’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조위나’로 지었다. 조 회장 제공
1983년 기적이 일어났다. 한 번도 공부를 잘해 본 적이 없던 내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대학원 미생물학과에서 합격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순간 지난 7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 자신이 대견했고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다.
나와 아내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구했다. 식탁조차 없어 종이상자 위에 밥을 차려 먹었지만 아내와 나는 이 가난한 삶도 그동안의 노력으로 맺은 결실이었으므로 기뻐했다.
그런데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앉은 순간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다. 일단 교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생물공학 전공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최초의 학생이었으므로 물어볼 선배도 교수도 없었다. 더구나 내가 진학한 미국의 미생물학과는 순수 자연과학에 속했다. 주로 발효와 식품공학 중심으로 공부하던 한국의 환경과 전혀 달랐다.
미국 대학원은 학생들에게 평균 B학점 이상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매일 4시간 정도만 자며 공부했는데도 B학점을 받지 못했다. 학교는 내게 한 학기의 기회를 더 주겠다며, 그런데도 누적 평점이 B가 안 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각오로 두 번째 학기를 맞았다. 나는 강의를 녹음해 집에서 다시 들으며 내용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루는 미국 학생에게 도움을 청해 강의 후 필기 노트를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친절하던 미국 학생이 돌변해 영어도 못 하면서 미국에 뭐 하러 왔냐며 ‘고 홈’(Go home)’이라고 소리쳤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비참하던지.
결국 다음 학기에도 성적 평점이 B가 못 돼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쫓겨나기 전 수많은 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지만 어디서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았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집에 그냥 있자니 비참해서 아침이면 집을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토플과 대학원 자격시험 공부를 했다.
하나님은 애초에 학습 능력이 없는 나를 왜 공부하게 해서 감히 유학까지 넘보게 하셨을까. 그렇게 인도하셨으면 순조롭게 하실 일이지 이렇게 비참하게 쫓겨나게 하실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당시엔 에드나 어머니의 편지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1985년 나는 예쁜 딸도 얻었다. 자식까지 생겼는데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가장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도널드 딘 오하이오주립대 교수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냐고 물어보는 편지였다. 교수를 직접 만나 어느 학교에서도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자기가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미국 대학은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영어와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검증된 나를 받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은 늘 상식을 뛰어넘으셨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6) 주님의 놀라운 섭리로 아시아 최고의 에이즈 전문가 되다
이미 불합격 판정 내린 애리조나대
스털링 박사가 받아준 덕분에 입학
관심도 없었던 에이즈 공부를 시작
에이즈 진단 시약 개발해 박사학위
조명환(오른쪽) 회장이 1987년 미국 애리조나주 애리조나대 연구실 앞에서 동료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우편함을 열어 지원한 학교에서 보낸 편지를 확인하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불합격을 알리는 수많은 편지가 온 뒤로 우편함은 잠잠해졌다.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우편함에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애리조나대에서 온 편지였다. 애리조나대는 이미 나에게 불합격을 통보한 학교였다. 그런데 편지 안에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기적이 담겨 있었다.
“귀하에게는 이미 본 대학 박사과정 불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미생물·면역학과 찰스 스털링 교수가 귀하를 지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귀하에게 본 대학 미생물·면역학과 박사과정 입학이 허가되었음을 통보합니다. 스털링 박사를 지도교수로 수학하고 싶으면 본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또 한 사람을 내 인생에 보내주신 것이다. 스털링 교수가 도널드 딘 교수의 추천서에 감동을 했던지,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나를 받아 줄 것을 심사위원장에게 요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배려로 나는 연구 조교로서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나는 현재 ‘아시아 최고의 에이즈 전문가’로 통한다. 나는 에이즈에 관심도 없었고 에이즈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털링 교수가 나를 받아 준 덕분에 나는 그를 따라 에이즈 전문가가 됐다.
에이즈는 1981년 미국 LA에서 처음 보고됐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3년 에이즈를 유발하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프랑스 과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내가 애리조나대에서 에이즈 공부를 시작한 게 1985년이니 에이즈 바이러스가 규명된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 때다. 당연히 에이즈 연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을 때 하나님은 내게 에이즈 공부를 시키셨다.
나를 교수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여기에 있었다. 당시에는 주님의 깊은 뜻과 계획을 알 수 없었지만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시 107:9)인 줄 믿기에 주님이 결정하면 나는 그대로 따르는 삶을 살았다.
나는 애리조나대에서 에이즈 환자의 치명적인 증상 중 하나로 설사를 일으키는 크립토스포리디움(Cryptosporidium)을 연구했다. 에이즈 환자들이 이 균에 감염되면 두 달가량 심각한 설사를 하다가 탈수 현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나는 이 균을 진단할 수 있는 진단 시약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참여했고 마침내 성공했다.
89년 12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박사학위를 받았다. 진학할 대학이 없던 공부 못하는 문과 학생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이과 공부를 시작한 지 15년 만에 과학 선진국 미국에서 미생물·면역학 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3 때 우리 집을 방문했던 김명진 교수님이 너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교수요”라고 했던 대답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듬해 2월 모교인 건국대 생물학과 교수로 돌아온 것이다.
주님은 내가 인내하고 순종하게 하셨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버티게 도와주셨다. 절망적인 상황에 몰릴 때도 주님의 귀는 나의 기도를 듣고 계셨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7) 한결같은 사랑 주신 에드나 어머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저를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랑하셨나요”
조명환 회장이 1995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세인트폴에 있는 에드나 어머니의 집을 40년 만에 방문해 어머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 회장 제공
나는 교수가 될 때까지 나를 후원해준 에드나 어머니를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다. 미국 유학 중에 한번 찾아뵙고 싶었으나 극구 올 필요 없다고 해서 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건국대 교수가 되고 에드나 어머니가 98세가 되던 1995년 여름, 이러다가 어머니를 생전에 볼 수 없을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무작정 찾아 나섰다.
나는 미국 네브래스카주 세인트폴에 있는 에드나 어머니 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한참 눈물을 흘렸다. 벅찬 가슴을 겨우 추스른 뒤 현관문을 두드렸다. 에드나 어머니와 함께 살던 동생 릴리안이 문을 열었다.
릴리안에게 한국에서 온 아들 명환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며 나를 거실 소파로 안내했다. 릴리안은 2층에 에드나 어머니가 있다며 모셔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금방이라도 달려 내려올 것 같던 어머니는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1시간쯤 지났을 땐 혹시 어머니가 나를 만나고 싶지 않으신 걸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마침내 2시간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으로 2층 난간에 서 있었다. 샤워하고 머리를 빗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하고 빨간 구두를 신고, 하얀 바지에 빨간 윗도리를 입느라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에서 온 아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 마주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지난 40년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안아 주었던 어머니를 이제는 내가 꼭 안고 있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너무 감사했어요.”
어머니는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엔 주름이 많았지만 그 눈은 작은 우주가 들어앉은 듯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예수님의 눈이 꼭 이렇겠다 싶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참을 매만졌다. 지난 세월 나를 위해 기도하던 손, 매달 정성스레 내게 편지를 쓰던 손, 사랑의 기적을 만든 손. 내게 어머니의 손은 거룩한 주님의 편지였다.
나는 어머니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연고도 없는 저를 그토록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랑하셨나요?” 어머니는 에베소서 2장 8절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너에게 준 사랑은 아직 너무 부족하다”고 하셨다.
나는 에드나 어머니가 상당한 부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에드나 어머니는 나보다 더 가난했다. 마지막 직업은 동네 편의점 점원이었다. 나는 여권이 없는 미국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가난한 시골에 사는 아주 평범한 여인이었다.
여유가 있어야만 남을 돕는 것이 아니었다. 에드나의 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녀는 남을 돕기 위해 부자가 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가진 것을 정성껏 내놓았을 뿐이었다. 자신도 가난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한국의 어린이를 기꺼이 도운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8) 하나님 역사하심으로 성공적으로 개최한 국제심포지엄
건국대 50주년 기념행사 일환으로
블럼버그 박사 초청하고 싶었지만
같은 기간 옥스퍼드대 초청받은 상황
주님만 믿고 무작정 찾아가 통사정
조명환(위) 회장이 1996년 서울 광진구 건국대 교수 연구실에서 노벨상 수상자 바로크 블럼버그 박사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교수가 된 후 나는 열심히 연구하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교수라는 직업이 내 적성에 맞았다. 그러던 중 1995년 건국대는 다음 해 개교 50주년을 맞아 노벨상 수상자와 외국 석학 10여명을 초청하는 국제심포지엄을 열기로 했다. 대학은 노벨상 수상자 섭외를 내게 맡겼다. 그런데 대학도 나도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하려면 최소 1년 전에는 섭외가 완료돼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거의 모든 노벨상 수상자를 접촉했지만 아무리 강연료를 많이 준다 해도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특히 바루크 블럼버그 박사를 초청하고 싶었다. 블럼버그 박사는 간염 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백신을 개발한 후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음에도 어린이를 위해 백신을 기부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국 옥스퍼드대로부터 같은 기간에 초청을 받은 상황이었다.
어느덧 행사까지는 5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섭외가 안 돼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긴장 속에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 아내에게 미국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무작정 공항으로 갔다. 블럼버그 박사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해서였다. 마음 한구석에 주님이 이루어 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14시간을 날아가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블럼버그 박사에게 전화했다. 커피 한잔하러 왔으니 만나 달라고 했다. 공항에서 다시 3시간 정도 운전해서야 닿는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그런데 뉴욕 맨해튼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결국 5시간 만에 블럼버그 박사 사무실에 당도했다.
블럼버그 박사는 옥스퍼드대와 맺은 계약서를 보여 주며 일정과 겹쳐 도저히 한국에 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나는 복도 의자에 앉아서 건국대에 가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노라고 차분히 말했다. 그날 나는 복도 의자에서 밤을 새웠다.
복도 끝에서 나를 쳐다보는 경비원을 보자니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블럼버그 박사에게 몹시 무례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블럼버그 박사가 나의 행동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분을 꼭 초청하고 싶은 나의 간절함으로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다음 날 아침 블럼버그 박사는 나를 사무실로 부르더니 옥스퍼드대 일정을 반으로 줄이고 건국대 개교기념일에 맞춰 한국에 가겠다고 말했다. 주님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주신 것이다. 주님은 이번에도 멋지게 일해 주셨다. 이렇게 해서 건국대 5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은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블럼버그 박사의 강연 통역까지 맡았는데 서울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지낸 조완규 박사님이 강연을 보고서는 “여러분은 조명환 교수가 건국대 교수로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전 세계 학회와 심포지엄을 수없이 다녀봤었지만 조 교수처럼 이렇게 통역을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로 나는 학교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됐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덕분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9)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경험 선물해준 블럼버그 박사
메리건 박사와 에이즈 연구하면서
남는 시간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
만나고 실리콘밸리 생태계 체험하며
사고력·통찰력 키우는 소중한 계기 돼
조명환(왼쪽) 회장이 1997년 미국 팔로알토의 한 식당에서 노벨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나사 우주생물학 연구소장인 바로크 블럼버그(가운데) 박사, 전 스탠퍼드대 에이즈연구소장 토마스 메리건 교수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조명환(왼쪽) 회장이 1997년 미국 팔로알토의 한 식당에서 노벨상 수상자이자 당시 미국 나사 우주생물학 연구소장인 바로크 블럼버그(가운데) 박사, 전 스탠퍼드대 에이즈연구소장 토마스 메리건 교수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강연을 마치고 돌아간 블럼버그 박사로부터 그해 10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스탠퍼드대 초청으로 1년간 강의를 하게 됐는데 나에게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묻는 편지였다. 나는 안식년을 활용해 스탠퍼드대로부터 체류비까지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블럼버그 박사와 식사를 했는데 그는 1년 중 7개월 정도는 메리건 박사와 에이즈 연구를 하고 나머지는 자기와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메리건 박사는 세계적인 바이러스 석학이자 스탠퍼드대 에이즈연구소 소장이었다. 블럼버그 박사의 소개로 나는 메리건 교수가 이끄는 세계 최초의 ‘칵테일 에이즈 치료약’ 임상 실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블럼버그 박사는 종종 나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점심 혹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노벨상 수상자라 만나는 사람도 노벨상 수상자들이었다. DNA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박사 등 교과서에 나오는 노벨상 수상자는 거의 다 만난 것 같다. 어떤 때는 정치인도 만났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하원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도 만났다. 특히 유전공학 기술을 탄생시키고 세계 최초의 생명공학회사 제넨텍을 창업한 허버트 보이어를 만났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블럼버그 박사는 또 내게 캘리포니아 멘로파크와 팔로알토, 우드사이드를 지나는 샌드힐로드의 세상을 보여줬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기업들의 성공스토리는 샌드힐로드에 있는 벤처캐피털 회사들의 지원으로 탄생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스카이프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샌드힐로드에 있는 벤처캐피털의 자금으로 탄생했다.
블럼버그 박사는 나를 샌드힐로드에 데려가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구석구석 보여줬다. 과학자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 후 사업계획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투자자들이 좋아하는 사업계획서는 어떤 것인지, 투자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벤처기업의 탄생과 성장을 알려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블럼버그 박사의 의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와 다니며 나의 사고력과 통찰력이 달라진 것이다. 나와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같은 이슈를 보고도 과학자와 정치인, 기업인이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전까지 내 머릿속은 오직 생명과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등의 영역이 생겼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융합되고 통섭하는 방법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블럼버그 박사는 나에게 다른 과학자가 갖고 있지 않은 ‘끼’를 보았다고 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일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바이러스가 아닌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는 나를 교육하고 훈련한 가장 훌륭한 교과서이자 교육 현장이었다. 블럼버그 박사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경험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0) 넥솔바이오텍 설립…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 탄생
현 셀트리온 회장과 공동 대표로 설립 글로벌 생명공학 산업 탄생에 참여하며
과학자가 발견한 지식의 상업화 과정과 어떻게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지 체득
조명환(오른쪽) 회장이 2017년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셀트리온 창립 15주년 기념식에서 서정진 회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1998년 스탠퍼드대학에서 돌아온 뒤 내 인생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서정진 현 셀트리온 회장이다. 그는 나를 만나자 노랑 연필을 꺼내 하얀 종이에 생명공학 사업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간단명료하면서 머리에 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자의 마음으로 가고자 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생명공학 산업에 달렸다며 나를 설득하는데, 생물학 교수인 내가 그에게서 생명공학 산업의 필요성을 배우는 것 같았다.
서 회장과 나는 오랜 논의 끝에 넥솔바이오텍을 설립하고 공동 대표로 생명공학 사업을 시작했다. 넥솔바이오텍은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개발된 신약을 한국에서 계약 생산하는 사업 모델에 관심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제약회사들은 먼저 연구개발을 하고 개발한 의약품의 판매 허가를 받은 후 판매량을 늘려 가면서 생산 능력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했다.
나는 넥솔바이오텍이 생산할 수 있는 신약 후보 물질을 찾기 위해 서 회장과 함께 전 세계를 다녔다. 아마도 이때 가장 많이 비행기를 탔던 것 같다. 산업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 미국 이민국의 조사를 받은 적까지 있었다.
우리는 에이즈 백신을 개발하고 있는 벡스젠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벡스젠은 넥솔바이오텍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바이오 사업 경험이 전무한 신생 회사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던 중 벡스젠이 파트너로 낙점한 한국 대기업과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가 기회라 여기고 서 회장은 인천 송도에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3000억원을 유치하겠다고 약속하며 벡스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싱가포르 정부까지 유치에 뛰어들었으나 서 회장의 협상술로 벡스젠과 합의에 성공했다. 그러나 벡스젠은 마지막 임상실험에 실패해 사업을 접고 말았다. 이로 인해 넥솔바이오텍은 큰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나 서 회장은 굴하지 않고 블럼버그 박사, 메리건 교수와 지속적으로 만나더니 바이오시밀러에 눈을 떴다. 바이오시밀러는 고가의 바이오의약품을 복제한 약이다.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등한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낮은 가격으로 더 많은 환자에게 치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이때부터 셀트리온이라는 거대한 스토리가 시작됐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에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글로벌 생명공학 회사가 탄생했고 바이오를 전공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직업 창출이 가능해졌다. 나도 생명과학 교수로서 우리나라 글로벌 생명공학 산업의 탄생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하나님은 생명과학 교수인 나의 인생에 서 회장을 등장시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귀하고 값진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교수가 된 뒤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만 했는데 서 회장을 통해 시장경제와 기업 운영의 현장을 경험했다. 또한 과학자가 발견한 지식이 어떻게 상업화되어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더 나아가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지도 체득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1) ‘에이즈 퇴치’ 꿈 안고 49세의 나이로 또 미국 유학
백신 개발 성공하고도 수익성 따져서
폐기하는 것 보며 과학자로서 자괴감
교수직 내려놓고 다시 배움의 길로…
조명환(오른쪽) 회장이 2005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식에서 졸업생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서정진 회장과 함께 기업을 창업하는 경험을 한 후 나는 달라졌다. 무엇보다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매우 효과가 높은 에이즈 백신을 개발했음에도 수익성을 따져 백신을 폐기하는 것을 보고 과학자로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이즈를 전공하고 에이즈 퇴치를 간절히 염원한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만약 내가 사회과학적 사고와 논리로 무장한다면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을 설득해 에이즈 퇴치를 좀 더 빨리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교수직을 내려놓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유학을 가기로 했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은 이론도 가르치지만 경제 경영 행정을 비롯한 협상술, 리더십 등 실전에 필요한 교육으로 유명하다. 나는 현장 교육 중심의 케네디스쿨이 내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케네디스쿨에 지원할 자격이 안 되었던 것이다. 학부 과정에서 경제 경영 행정 등의 학점을 일정 정도 취득해야 하는데 공학도인 내겐 사회과학 과목 학점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8군에 있는 메릴랜드대학에서 과목들을 수강했다.
그 후에는 더 어려운 장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이었다. 등록금과 생활비 등 모든 경비를 포함해 1년에 1억원가량이 필요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케네디스쿨이 이 경비를 전액 기부금으로 충당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입학생과 다른 조건이었다. 케네디스쿨은 입학생마다 각자에게 맞는 조건들을 제시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후원금 모금은 셀트리온을 설립하기 위해 3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나는 먼저 후원금 유치 계획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후원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맞춤형 보답을 제안했다. 서울 가락시장에서 회를 파는 분의 아들에게 평생의 멘토가 되어주겠다고 하고 후원금 600만원을 받는 등의 설득 끝에 33명의 후원자로부터 1억1000만원의 후원금을 만들 수 있었다. 후원자를 만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좀 더 깊이 고민했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커졌다.
나는 49세의 나이로 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케네디스쿨에서는 첫 학기 동안 경제학과 수학만 수강하게 했다. 공부하면서 나는 수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학문인 줄 처음 알았다. 굳어진 내 머리가 다시 논리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머리로 바뀌었다.
자연과학은 실험 결과로 나온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을 하면 되는데 사회과학은 일단 어마어마한 분량의 자료와 논문을 읽어야 했다. 그리고 토론이 매우 중요했다. 자기 생각이 정답인 것처럼 표현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케네디스쿨에서 오래 토론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공부하며 ‘과학기술 혁신을 통한 국가 경제 발전’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개발도상국이 과학기술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경제 발전 모델을 제안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개도국들이 이 논문에 관심을 보여서 이들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자문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2) 아태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선출… 에이즈 퇴치운동 본격시동
전 세계 기업·정치인과 지도자들 만나
에이즈 예방과 퇴치 운동 참여 설득해
예방과 치료 위한 기금 마련토록 힘써
조명환(오른쪽 세 번째) 회장이 2009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에이즈퇴치운동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조 회장 왼쪽은 유도요노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조 회장 제공
2005년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나는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아시아 지역 에이즈 퇴치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에이즈는 이제 만성질환이 됐다. 치료약이 개발됐으나 치료비가 1년에 2000~4000만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같은 개발도상국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정치인이나 기업인 그리고 국제기구 지도자들이 나서서 가난한 에이즈 환자들에게 치료약이 전달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나는 에이즈 바이러스 발견 30주년이 되던 2011년 조직위원장으로서 제10차 아시아·태평양 에이즈총회를 부산에서 개최했다. 당시 우리 정부를 향해 국제적인 에이즈 퇴치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는 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해 한국이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원조받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변신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국제 사회에 보여 주고 싶었다. 다행히 한국 정부는 이 행사를 적극 지원했고 미국 클린턴재단이나 빌게이츠재단 등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였다. 나는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 인권과 에이즈 확산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여성을 에이즈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을 국민에게 제안하면 그것이 결국 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득했다. 나는 그가 밴드를 결성할 정도로 음악 애호가임을 알고 그가 직접 만든 첫 앨범에 수록된 발라드곡을 인도네시아어로 연습해 몇 소절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유도요노 대통령을 설득한 결과 정부의 에이즈 지원 예산을 대폭 늘릴 수 있었고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2009년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총회를 발리에서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다.
남태평양 섬나라인 피지의 에필리 나일라티카우 전 대통령에게는 글로벌펀드와 유엔에이즈로부터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에이즈 예방과 치료를 위한 기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단계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기업인과 정치인 그리고 국제기구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고 협력할 수 있었던 데는 하나님께서 블럼버그 박사를 통해 여러 분야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을 통해 냉혹한 기업 현장을 경험하게 하시며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통해 정치 행정 경제 리더십 교육을 받게 하신 덕분이었다.
내가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졸업할 무렵 클린턴재단에서 연락이 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보스턴에서 미팅을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내게 클린턴재단의 사무총장으로 일해 달라는 뜻밖의 제의를 했다. 클린턴재단은 에이즈 퇴치 노력을 하는 단체이며 따라서 에이즈 전문가이면서 행정과 경영 능력 그리고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동시에 공부한 점이 흥미롭다며 클린턴재단이 찾는 인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어느 한 단체에 소속돼 일하는 것보다 교수로 있으며 여러 단체와 공조하는 것이 에이즈 퇴치에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거절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지혜로운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3) 에이즈와의 전쟁…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에이즈 창궐 지역 실제 현장을 다니다
50여만 원으로 한 생명 구한 경험 후
가난해서 치료받을 수 없는 이들 위해
기금 모금 운동 펼치는 계기 돼
조명환 회장이 2007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장으로 에이즈 창궐 지역을 다니면서 겪은 일들은 특별했다. 에이즈와 전쟁을 치르는 실제 현장을 보았고 가난과 질병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체험했다.
2006년 여름 나는 태국 방콕학회 사무실에서 에이즈바이러스에 감염된 20대 남자를 상담했다. 대화 중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직감적으로 아내와 아기 역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것임을 알았다. 그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집을 방문했는데 그들은 작은 하천 옆에 무허가로 지은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검사를 진행하자 예상대로 아내와 아기 모두 양성으로 나타났다. 아내는 흐느껴 울고 남편은 미안한 마음에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나쁜 소식만 전해 주고 그냥 집을 나올 수 없었다. 나는 내 친구이며 동료인 태국 최고의 에이즈 의사인 프라판 박사에게 아기가 에이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고 치료비를 후원했다. 신생아 에이즈 환자는 짧은 시간 치료해도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아이는 2년 만에 치료를 마치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50여만원으로 한 생명을 구한 이 경험은 이후 내가 가난해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에이즈 어린이들에게 치료비를 제공하는 국제적 기금 모금 운동을 펼치게 된 계기가 됐다.
스리랑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에이즈총회를 준비할 때였다. 스리랑카 북동쪽에 타밀 타이거스라는 반군이 총회를 빌미로 스리랑카 정부를 곤경에 빠뜨리려 테러를 시도했다. 스리랑카에서는 총회 개최를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기도한 끝에 나는 반군 지도자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학 교수가 왜 그런 일까지 해야 할까. 그들이 나를 인질로 잡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내가 꼭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금식기도로 만남을 준비했다.
스리랑카 군대의 협조로 반군을 만났다. 그들은 내 눈을 두건으로 가리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총을 든 반란군 30여명이 서 있었다. 드디어 타밀 타이거스 지도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내 심장은 무섭게 뛰고 있었지만 나는 차분히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스리랑카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국제 사회는 당신들을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야비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더니 차 한잔하겠냐고 했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그릇에 나온 따뜻한 홍차는 나의 얼었던 심장을 녹이기에 충분할 만큼 최고의 맛이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제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미소만 지었다. 곧 부하가 다가오더니 미팅이 끝났으니 가자고 했다. 나는 다시 두건을 쓰고 그들과 처음 만난 장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내내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를 불렀다.
2007년 8월 스리랑카 총회는 무사히 개최됐다. 물론 타밀 타이거스는 오지 않았고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4) “2030년까지 에이즈 정복과 후원금 73조원 마련도 가능”
전 세계 빈국에 에이즈 치료 혜택 늘려
생산성 올리면 세계 경제발전에도 도움
고통 없는 작은 기부, 기업이 중간 역할
조명환 회장이 2011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에이즈총회에서 에이즈 정복 전략을 밝히고 있다. 조 회장 제공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기조연설에서 2030년까지 에이즈 정복이 가능하며 이를 위한 73조원의 재원 마련도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에이즈 치료약이 없던 시대에는 선진국의 20세 청년이 감염된 경우 25년 뒤 사망했다. 그러나 좋은 치료약들이 출시된 지금은 감염이 돼도 55년을 더 살 수 있다.
에이즈 치료 혜택을 늘리면 그 나라의 경제도 향상할 수 있다. 에이즈로 인해 경제 활동을 하지 못 한 이들이 치료를 받고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하면 생산성이 올라가고 국가 세수가 증가하는 등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될 것이다. 에이즈가 창궐하는 아프리카 국가에서 에이즈 치료를 확대하는 것은 결국 세계 경제 발전을 위한 좋은 투자다.
2030년까지 에이즈를 정복한다는 말은 그때까지 에이즈를 완전히 소멸시키겠다는 말은 아니다. 선진국 수준의 치료 혜택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저개발국 사람들에게도 돌아가게 하겠다는 목표다. 그러나 이들 국가가 단기간에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들 국가에 사는 에이즈 환자들에게 무료 치료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는 데 필요한 재원이 73조원이다.
나는 2030년까지 에이즈를 퇴치해 더 이상 에이즈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 국제의약품구매기구가 개발한 항공연대기금의 성공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현재 전 세계인들은 매일 커피 25억잔을 소비한다. 커피 한 잔이 3000원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단 1원의 에이즈 퇴치 기금을 더해 소비자가 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커피 한 잔에 3001원을 받는다면 매일 25억원의 기금이 들어오게 된다. 1원이 모여 매년 1조원 가까운 후원금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듯 고통 없는 작은 기부가 일상이 된다면 우리는 매일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처럼 제품 가격에 아주 적은 기부금을 부과하는 방법은 기업에도 좋다. 기업이 그들의 제품을 팔아 거둬들이는 후원금은 기업이 내는 돈이 아니다. 소비자가 내는 돈이다. 기업은 소비자가 낸 후원금을 모아 기부단체 혹은 이웃에게 전달하면 된다. 기업이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기독 실업인들이 먼저 이런 시도를 했으면 한다. 1%, 아니 0.1%도 좋다.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해 주기를 바라신다.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영향력을 통해 이웃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를 바라신다. 재물이 많은 자, 명예를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주님의 은혜로 성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이 최종 목적이 돼서는 안 되며 그것을 손에 쥐었으면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5) NGO 최초 영리기업… 블록체인 기반 둔 ‘베이크’ 창업
베이크는 사회적 가치 실현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도록 돕는 소셜 액션 플랫폼
블록체인 기술 이용한 기부 투명성 확보
조명환 회장이 2004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유학 시절 도서관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조 회장 제공
나는 두 개의 다른 분야의 학위를 갖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대학에서 미생물·면역학 전공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여기에 또 다른 공부를 하나 더 했는데 MIT경영대학원에서 블록체인-비즈니스 최고경영자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62세였다.
갑자기 왜 블록체인을 공부해야 하는지 당시엔 잘 몰랐다. 그냥 마음이 끌려서 공부한 것인데 놀랍게도 월드비전 회장이 된 후에 그 지식을 활용하게 됐다. 블록체인 플랫폼에 기반을 둔 벤처기업 ‘베이크’를 창업해 독립 분사시켜 NGO 최초로 영리 기업을 만들게 된 것이다.
베이크는 누구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도록 돕는 소셜 액션 플랫폼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 일부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공익사업에 사용된다. 아울러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기부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시도는 물론 대체불가토큰(NFT)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혁신적인 도전까지 시도하게 됐다.
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고 있다. AI 디지털 가상현실 빅데이터를 통해 그동안 우리 뇌가 사용하고 있지 않던 잠재력을 발휘하게 되어 인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생활환경과 경제 생태계를 만들 것이고 수입과 생활의 질이 향상될 것이며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경제 성장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기술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수요는 증가하지만, 교육 수준이 낮고 기술이 낮은 사람들의 수요는 줄어들어 사회 계층 간 뚜렷한 불평등 구조가 형성될 것이다. 또 사람과 기계가 가깝게 소통하며 ‘비인간화’라는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오늘 우리는 인간의 중요한 속성인 사랑과 배려 그리고 공감 같은 능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일에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볼 수도 있다. 사랑 배려 동정심 협동 같은 인간 본연의 성품은 물론이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지나 10차 산업혁명 시대가 온다 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영원한 반석’이라는 사실이다. 꼴찌였던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하나님이 들어 쓰셨듯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셔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된 일이 생겼다. 건국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어느덧 은퇴를 1년 정도 앞둔 2020년이었다. 당시 나는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은퇴 후 미국 메릴랜드대로 가서 5년 정도 강의도 하고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려는 계획이었다. 그간 숨 가쁘게 지낸 시간을 뒤로하고 여유를 찾는 노년을 즐기려고 했다.
실제로 메릴랜드대와 이야기가 잘 되어 미국으로 향할 준비가 어느 정도 추진이 되던 상황이었다. 그때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받게 됐다. 월드비전 회장에 지원하라는 요청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6) 가난한 나라의 후원 아동에서 월드비전 회장으로…
에드나 어머니 통해 후원의 소중함과
전 세계 아이들 향한 소망 품게되고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20년 경험 또한
이 사명을 맡기시려는 하나님의 뜻
조명환 회장이 2021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월드비전 회장 취임식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2020년 국제구호 NGO 월드비전에서 차기 회장을 선임 중인데 지원을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후원 아동으로 자랐고 에드나 어머니의 큰 사랑을 기억하기에 아이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구체적인 고민을 해 본 적은 없었던 터라 이 제안에 큰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게다가 은퇴 이후 미국에서의 생활도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는 마당에 뜬금없이 NGO 회장이라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
너무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다고 정중하게 거절을 표하고 반년이 훌쩍 흘렀다. 여름을 코앞에 둔 6월, 잊고 있던 월드비전 회장 지원과 관련해 다시 연락이 왔다. 마침 방학이 시작돼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 일은 아니라 생각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순종해 월드비전 회장 선임을 위한 인터뷰에 응했다.
내가 계획했던 미국행은 내려놓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채 따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월드비전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2021년 1월 취임을 하게 됐다. 나는 월드비전 회장으로 뽑히고 나서야 하나님이 이 사명을 맡기시려고 지금까지 나의 삶을 운영하셨음을 깨달았다.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45년 동안 빠짐없이 매달 편지와 후원금을 보내온 에드나 어머니의 사랑도 온전히 이해됐다.
에드나 어머니가 보내오는 후원금과 편지 때문에 나는 후원자의 큰 사랑 속에 성장했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하나님은 에드나 어머니를 통해 나에게 후원의 소중함과 전 세계 아이들을 향한 소망을 간직하게 하셨고 월드비전 회장이 갖춰야 하는 마음가짐을 준비시키셨다.
월드비전 회장이 된 후 다양한 후원자와 기업 등을 만나 후원 유치에 힘써야 할 때도 이 일을 위해 주님이 얼마나 나를 철저히 훈련시키셨는지 깨닫게 됐다. 20년 동안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내가 한 일은 에이즈 치료약을 사기 힘든 아프리카 지역 환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으는 일이었다. 이들을 위해 백방으로 뛰며 세계 유수의 기업 총수들을 만나 에이즈 치료약이 어려운 이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후원금 모으는 일에 총력을 다했었다. 에이즈 치료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 앞에 서고 인터뷰를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월드비전 회장으로 자연스럽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월드비전이 한국교회와 협력해야 할 때도 주님의 섬세한 이끄심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환갑이 다 되어 후원 아동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후 주님은 5년여 동안 수많은 크고 작은 교회에서 간증 사역자로 나를 사용하셨다. 많은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그 시간은 월드비전이 한국교회와 함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주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아동을 돕는 일에 나를 사용하시려고 내 인생을 관통하며 일하셨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때로 고통 앞에 절망하고 눈물도 흘렸으나 결국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셨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잠 16:9)이심을 찬양하며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7) “전 세계 도움 필요한 아이들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심리 불안으로 고통 심각한 아이들 보며
월드비전 같은 NGO 역할 절실함 깨달아
조명환 회장이 지난해 루마니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온 피란민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월드비전 회장에 취임 후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 출장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 방문하게 된 곳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분쟁 현장이었다. 하루아침에 피란민이 된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마주한 루마니아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 시레트 지역 모습은 실향민인 나의 부모님들을 떠올리게 했다. 평화롭던 일상을 뒤로하고 낯선 땅으로 가야 하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까. 하나님이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답답했지만 사실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피란민들에게 오늘 하루 배부르게 해줄 식량과 따뜻한 잠자리를 어떻게 마련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국경에서 만난 한 아동이 들려준 이야기는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아이는 옆집 아저씨, 친구 그리고 가족이 죽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순간 지나가던 헬리콥터 소리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파묻었다. 전쟁은 우리 모두의 삶을 파괴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겪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월드비전 회장으로서 이러한 트라우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소명감도 다시 깨달았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최대 규모 난민센터에는 1000㎡ 규모의 식량 창고와 피란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침대가 갖춰져 있었다. 루마니아 곳곳에는 월드비전과 같은 NGO, 지역 교회에서 운영하는 난민센터들이 있었다. 특히 월드비전은 아동들을 위한 놀이 공간을 운영하며 잠시나마 그들이 전쟁 공포를 잊고 뛰어놀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저마다 가진 아픈 사연을 듣던 중 이사벨라를 만났다. 이사벨라는 나에게 한국의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휴대폰을 열어 블랙핑크의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어느새 조금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얼굴에 잠시나마 미소가 번졌다.
노래가 끝나고 이사벨라는 한국에 돌아가 블랙핑크 제니를 만나거든 꼭 전해달라면서 사과 주스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스라서 피란을 나오면서 챙겨왔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사과 주스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블랙핑크 제니에게 전해 줄 날을 기다리며, 또 이사벨라가 전쟁이 끝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블랙핑크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건강하게 자라나길 기도하며 말이다.
전쟁으로 정부가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월드비전 같은 NGO 역할이 절실했다. 왜 하필 출장도 갈 수 없는 팬데믹 기간에 나를 월드비전으로 보내셨는지 물음표를 가졌던 나에게 하나님은 앞으로 내가 갈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월드비전 회장으로 처음 떠난 출장에서 하나님은 내게 앞으로 붙잡고 가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사명에 온전히 헌신하며 전 세계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8) ‘자립 마을 사업’ 통해 아프리카 오지마을에도 주님 손길
극심한 건조지역 식수 시설 지원 등
한 지역서 10~15년 걸쳐 자립 도와
마을 전체가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
조명환 회장이 지난해 케냐 오실리기를 방문해 현지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분쟁의 고통으로 시름하던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을 만났던 루마니아에 이어 두 번째 해외 출장지로 결정된 곳은 월드비전의 대표적인 사업을 경험할 수 있는 케냐 오실리기였다. 아프리카는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일할 당시에도 수차례 방문했지만, 항상 나이로비(케냐)나 케이프타운(남아공) 같은 대도시를 주로 찾아갔기에 오지 마을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사이족이 사는 임포리 마을은 극심한 건조 지역인 데다 기후변화로 인해 식량난에 처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나이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차로 2시간을 달려 이동하는 내내 메마르다 못해 황폐해진 땅을 보며 ‘진짜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이 마을은 제대로 마실 물조차 없던 곳이었다. 잠시 걸어가는 순간에도 너무나 태양이 뜨거워서 피부가 빨갛게 익어버리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 갈증이 심했다. 감사하게도 2019년 월드비전이 지원한 식수 시설은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고 가뭄이 심한 시기에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일할 때도 모금 활동을 했는데 월드비전 회장이 되어 사업 현장까지 직접 보게 되니 모금 활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더 받았다. 현장을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모금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월드비전 ‘자립 마을 사업’ 방식을 통해 마을 전체가 아동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한 지역에서 10~15년에 걸쳐 자립을 돕는 사업은 궁극적으로 전 세계 아이들이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한다. 우리의 도움으로 자립을 이룬 나라들이 또 다른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전할 수 있고 결국 그 도움이 돌고 돌아 한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한다.
현지에서 만난 13살 소년 카이안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카이안카의 엄마는 5남매 중 막냇동생을 출산하다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했다. 카이안카는 한창 학교에 가야할 나이였지만 부모님을 대신해 홀로 동생 3명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연필 한번 쥐어보지 못하고 엄마를 대신해 빨래와 가축 돌보기 등 온갖 집안일이 모두 카이안카의 몫이었다. 아이는 매일 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흙으로 대충 만든 카이안카의 집에 들어서니 제대로 된 살림살이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얼마나 손에 쥐고 보았을까 싶은 낡은 성경책이 눈에 들어왔다. 힘들 때마다 기댈 곳은 주님의 품이라는 것을 아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 역시 후원을 받으며 어렵게 성장했는데 어느 순간 그 어려움을 잊고 지내지는 않았는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가난을 다시 이해하라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만 같았다.
성경 66권에 담긴 메시지는 하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내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 분쟁과 빈곤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전하는 통로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길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19) 대지진 현장 방문… 절망 속에서 희망 이야기할 수 있길
지진으로 폐허 된 튀르키예와 시리아
일상 되찾으려 몸부림치는 주민들 보며
월드비전이 할 사명 되새기는 계기 돼
조명환(왼쪽) 회장이 지난 5월 대지진이 발생한 튀르키예에서 이재민을 만나 위로하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사방에 흩어진 옷과 신발들, 건물 잔해 속에 묻힌 채 구조되지 못한 시신들의 냄새, 몰려드는 해충을 막기 위해 온 도시에 하얗게 뿌려 놓은 석회 가루….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방문해 마주한 재난의 모습은 미디어에서 접했던 것보다 짙고 깊었다.
지난 2월 튀르키예를 강타한 규모 7.8(1차), 7.5(2차) 대지진으로 한반도 크기에 달하는 튀르키예 영토가 무너졌다. 월드비전은 즉시 초기 긴급구호 체계에 들어갔으며 특별히 한국에서는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에서 전해온 비보에 많은 후원자의 손길이 모였다. 나는 우리의 나눔이 현장에서 적절히 사용되고 있는지 모니터링하기 위해 지난 5월 대지진 현장을 찾았다.
이미 많은 정보를 접했음에도 실제 눈앞에 보이는 대지진의 상처는 처참하고 거대했다. 아드야만주, 해발 540m에 있는 시골 마을 코첼리에서 만난 할릴씨는 이번 지진으로 도시에 살고 있던 다섯 아이를 모두 잃었다. 아이들이 함께 살던 아파트가 무참히 내려앉으며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할릴씨의 다섯 아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소중한 자녀를 모두 잃은 아버지의 황망한 눈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지진 피해 주민들의 가슴 무너지는 이야기와 엄청난 피해 규모를 마주하며 하나님이 주관하는 대자연의 섭리가 두렵고 떨리기도 했다. 더불어 다시 한번 월드비전이 해야 할 사명을 분명하게 되새기는 계기도 됐다. 당장 피해주민들이 안전하게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임시 거주지를 조성하는 일부터 생활 물품 제공, 안전한 식수 확보 등 월드비전이 현지 NGO들과 협력해 신속하게 진행 중인 여러 사업을 꼼꼼히 확인했다. 사랑을 나눠 주신 모든 분께 한없이 감사해 눈시울이 여러 번 뜨거워지기도 했다.
인간은 위대한 과학 문명을 이뤄냈지만 땅의 갈라지는 지진 하나도 막을 수 없다. 건물의 85%가 무너진 안타키아에 들어서자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흉물스럽게 무너진 건물의 잔해뿐이었다. 처참한 현장을 걷다 나도 모르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건물 잔해를 붙잡고 기도를 드렸다. 교만했던 우리 모습을 회개하며 더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러질 수 있기를, 주님이 이 땅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위로하시며 회복시켜 주시기를.
가끔 구호현장이나 어려운 지역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의 대답은 열 번이면 열 번 모두 ‘전혀 두렵지 않다’이다. 주님이 보내셨고 곁에 계심을 확실히 믿기에 무섭거나 꺼려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나에게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을 명령하셨고 위로를 전할 아이들과 주민들이 있다는 책임감과 사랑의 마음을 주셨다. 나는 주님 주신 사명에 순종함으로 두려움을 넘어선 담대함을 선물 받았다.
월드비전이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곳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돕고 함께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시간이 흐르며 재난 초기 뜨거웠던 관심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일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많은 분의 응원과 기도가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역경의 열매] 조명환 (20·끝) 하나님의 사역은 내 인생 최대 영광 “God is enough”
하나님의 일하는 하나님 도구로 선택돼
사역자의 삶 사는 지금이 인생의 절정
조명환(앞줄 왼쪽 세 번째) 회장이 3일 서울 영등포구 월드비전 본사에서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월드비전 제공
어느새 월드비전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이한다. 월드비전에 오고 나서 사역, 즉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곤 한다. 월드비전에 오면서 사실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3년째가 되는 지금의 나는 생전 처음으로 ‘사역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또 누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의 절정’이 언제였는지 물어본다면 바로 월드비전 회장으로 일할 때였다고 자신 있게 답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숭고하고 가치 있지만 월드비전에서의 일은 단순한 직업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명감과 무거운 책임감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을까. 내 인생 최대의 영광이고 최고의 감사 거리이다.
월드비전에 오기 전 5년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리는 간증 사역자로서 활동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영적으로 무장시킨 것이 바로 월드비전으로 이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됐다는 것은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이 된 것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것 같다.
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월드비전 회장을 마치고 나면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물어온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인생 최대의 영광스러운 일을 마쳤고 이것 역시 나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저 남은 인생도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기도제목이 있다면 앞으로 이러한 나의 사역을 끝마치는 그 순간까지 잘 감당해내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내 가족과 나만을 위해 달려왔다면 이제는 전 세계 더 많은 아이가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 직원들과 한마음으로 아동을 살리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몸도 마음도 지치지 않길 기도하고 있다.
2021년 취임식에서 나는 한국월드비전을 전 세계 월드비전 파트너십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후원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선포했다. 이것은 단지 내 능력으로 생각하고 계획해서 선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이다. 놀랍게도 3년째 되는 지금 조금씩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 올해 기준으로 모금액이 52% 성장했다.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던 지난 20대, ‘꼴찌 박사’로 살았던 30~50대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편 37편 5절의 말씀을 나누고 싶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이끄시는 대로 왔더니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게 됐다. 지난 19회 동안 나의 인생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꼴찌였던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모습을 목격했으리라.
나는 남은 임기 동안 더 많은 아이를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것이다. 사역을 끝마쳤을 때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다고 고백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나님 한 분이시면 우리 인생은 족하다. “God is enough!” 이 말이 모든 분의 간증과 고백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