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가 있어서 살맛나다 / 한정숙
외사촌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보름 만에 서울에 다시 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5년 동안 부지런히 서울에 다니면서도 혼자서 지하철을 탄 적이 없다. 이곳에 올 때면 늘 여동생이나 큰아이가 마중을 나왔고 혼자 움직여야 할 때는 택시를 이용했다. 큰일이나 날 것처럼 촌사람 취급을 하는지라 그냥 그들의 걱정을 덜기도 하고 편리한 쪽을 택한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큰애에게 “이번에는 꼭 지하철을 타고 너에게 갈 거야” 하고 호언장담을 하며 길을 물었다. 사실 택시를 타려고 알아봤더니 17,800원이 찍혀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혼자 지하철 타기 도전’을 성공시키리라 다짐한 것이다. 서울 성모병원 앞에 예식장이 있으니 9호선을 이용하고 중앙 보훈병원행 일반열차를 타라고 한다. 알았다고 큰소리를 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청년에게 9호선을 탈 수 있는 지하철역을 물었다. 그이는 고속터미널역으로 가야 한다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조금 걸어가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한 번 더 물어보라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야무지지 못하게 생겨 먹은 모양이다.
오후 세시 30분이니 어둡지 않은 낮 시간이고 서울 분위기도 익숙하고, 여차하면 택시를 부르면 될 일이니 겁나지는 않았다. 다른 도움 없이 고속터미널역 지하도로 내려가 9호선 화살표를 찾아 나섰다. 고속 터미널도 와 본 적이 있어서 여기 저기 살펴보다가 더 이상 9호선 화살표가 나타나지 않자 즐비한 가게만 기웃거렸다. 다시 사라진 9호선을 찾으러 길을 거슬러 가는데 걱정인지 아들이 전화로 주변의 간판을 읽어 주라고 한다. 그래도 혼자 찾아갈 거라며 다시 걸었다. 다행히 머리 위 아크릴판에 적힌 연갈색 9호선 화살표를 찾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는 길을 물어보니 모르겠다고 한다. 나처럼 이방인인 모양이다. 이번엔 주방 모자를 쓴 남자에게 묻자니 외국인이다. 또 모른다고만 한다. 지하도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니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다시 행선지만 보고 있는데 이번엔 내 또래의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9호선의 방향을 물으며 얼굴을 보니 아담한 외국인이다. ‘아구야, 괜한 짓 했구나’ 싶은데 그녀는 뭘 찾는지 내게 묻는다. 나는 분명히 여기에 써진 대로 앞으로 갔는데 더 이상 길이 없다고 했더니 옆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라고 한다. 자기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럴 거라고 한다. 한국인이면서도 모르는데 잘 가르쳐 주어 고맙다고 인사하고 안내해 준 데로 찾아가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속이 상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라니.
‘혼자서 지하철 타기 도전’은 그 후로도 녹록하지 않았다. 확인 차 내 목적지를 말하며 타는 곳이 맞느냐고 물어보니 질문을 받은 아저씨는 반대 방향으로 왔으니 다시 올라가서 다른 쪽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다시 길을 바꿔 걸으며 괜스레 툴툴거렸다. ‘지하철 타면 빨리 가고 싸니까 좋다더니 얼마나 걷는 거야? 계단은 또 얼마나 많고 말이야. 지하철 안에 있는 시간이 짧다는 것뿐 이구만.’
큰아이가 알려준 대로 중앙 보훈병원행 일반 열차에 올라 자리에 앉아 맞은편에 붙은 지하철 노선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역이 바뀔 때마다 눈동자도 따라 움직이며 목적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무사히 삼전역에 내려 3번 출구에서 기다리던 아들과 만났다. “와, 엄마. 드디어 지하철을 혼자 타고 오셨네요.” 하는 과한 칭찬을 받으며 이젠 진짜로 혼자 지하철 타고 다닐 수 있으며 돈도 16000원이나 아꼈다고 으스댔다.
그리고는 9호선을 찾으면서 만난 외국인 여자분 이야기를 하며 “진짜, 아이러니하지 않냐? 세상에나 우리나라에서 길을 묻는데 외국인이 가르쳐 주다니?” 큰아이는 “그럼 엄마는 우리말로 묻고 그 분은 영어로 가르쳐 줬어요?” 하며 놀린다. “무슨 말이야 둘 다 영어 썼지.” 하며 눈을 흘겼다. ‘첫 지하철 이용 성공’을 자랑하며 집으로 가는 길을 웃음소리로 채웠다. 그렇다, 아이러니한 일이 있어서 재미도 있고, 살맛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