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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93
8월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연중 제2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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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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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Hp08BIBgS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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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애야, 음식 다 식는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곧 죽음을 상징했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이었지만, 그의 글에는 언제나 희망과 사랑, 따뜻함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처절했던 체험들로 인해 사상이나 가치관이 비관적이거나 회의적으로 바뀔 만도 한데,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낙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밝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마치도 달디 단 생명수와도 같습니다. 100% 죽음이 예견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인생에 대한 ‘의미부여 작업’에 몰두했던 그는 이런 소중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가십시오.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마십시오. 오직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자신을 넘어서십시오.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십시오. 자신의 부족함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십시오.”
“거울 속에 내 모습에서 눈을 떼면 그 밖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지 말고 이웃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들에게 사랑을 보내십시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십시오.”
“긴장과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최선의 삶이 아닙니다. 긴장은 정신의 웰빙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낸 어느 저녁 수용소 안에서 빅터 플랭클이 겪었던 체험입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에 돌아온 수인들은 막사 바닥에 앉아 영양가라곤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멀건 수프 한 그릇씩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늦게 막사 안으로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빨리들 먹고 운동장으로 나가보세요. 지금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동료의 말에 다들 먹던 스프그릇을 옆으로 밀쳐두고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금씩 소멸되어가는 태양의 장엄함 앞에 다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적대자가 육체를 가두어도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을 그 어떤 열악한 환경 안에서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왕자처럼 누릴 것 다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빅터 플랭클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하느님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흙덩이처럼 나약하지만 정신이나 영혼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고 언젠가 하느님과 충만하게 합일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것,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친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 상’ 잘 차려놓으셨습니다. 잔치를 손수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길거리로 나가셔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 두려워서, 때로 부끄러워서, 때로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어둡고 깊은 동굴 안으로 꼭꼭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조차 다가오십니다. 애써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얘야, 괜찮다. 빨리 나오거라. 음식 다 식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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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래 가려거든 조연상을 노려라!>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9AdQ9Krsz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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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혼인 잔치는 행복한 하늘 나라 잔치입니다. 어떻게 행복한 나라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 잔치 초대에 응해야 하고, 그다음은 잔치 손님으로 쫓겨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배우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분이 ‘안성기’씨를 꼽을 것입니다. 안성기씨는 영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캔들 없이 꾸준한 연기 생활을 60년 이상 이어왔습니다. 2017년 데뷔 60주년 간담회 때, 배우로서의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래 가는 거죠.”
60년을 이어와도 꿈이 ‘오래 가는 것’이라는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영화가 행복이기에 그 행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 한국 국민 배우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그는 그 이유를 ‘욕심’에서 찾았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연기 외에 욕심이 없어야 마음 편히 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동반자이자 큰 행복’인 만큼 그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욕심을 버리는 작업을 반복해왔습니다.
“이것 자체가 큰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우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봐요. 일 자체에 대한 욕심은 많아야겠지만 일 외적으로 욕심이 많으면 안 되죠. 그럼 내가 편할 수가 없어요. (대인관계, 인기, 명예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의 폭을) 넓혀 놓으면 연기할 때 집중이 안 돼요. 그러니 배우에게 좋은 일이 아니죠.” [출처: ‘58년 연기 비결? 욕심 없어야 한다’, 김미리 기자, 마이 데일리, 15-03-25]
오늘 복음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 초대받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은 ‘욕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이들은 혼인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은 세상 행복에 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는 끊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참석했어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까요? 주연에 대한 욕심입니다. 연기자로 따지자면 끝까지 주연만 하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안성기씨가 오랜 주연을 해오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조연을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만 그는 ‘아,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다!’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유재석씨가 오래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공이 아니라 항상 어느 자리에서나 조연을 선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되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주인공이 되려는 것도 욕심입니다.
할리우드 연기자들이 가장 피하는 배역은 ‘예수’입니다. 예수 역할을 하면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 더는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가려면 영광을 받는 역할을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가 다시 극성입니다. 그리고 주범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전광훈 목사’입니다. 그는 2018년 교계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올해 1월 회장 연임에 성공했으나 직무가 정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그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주연’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한 말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앞으로 점점 더합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광훈,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니까요.”
작년엔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야. 친해.”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재물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정도도 희생할 수 없다면 교회에 머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머무는 것은 마치 혼인 잔치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 손님이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혼인 잔치 손님은 자신을 초대한 이와 신랑 신부가 영광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하면 그곳에서 쫓겨난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오직 하느님과 이웃들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조연을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연상이 아닌 항상 조연상을 노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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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1-14 :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잔치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모두 참석한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처음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나 오려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도들을 보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절) 임금은 살인자들을 없애고 박해자들을 죽여 버린다. 또 그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그들은 지옥의 영원한 불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잔치가 아무도 없이 치러질 수는 없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8-9절)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삶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이다.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분이 지니셨던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절)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갖추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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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은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일생 동안의 통과 의례 가운데 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요한 2,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중요성도 두 번씩이나 언급하시는데,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계명(마태 5,31-32 참조)과 함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라는 선언을 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드실 때도 혼인은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렇고,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를 묵상합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열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참석을 거부하고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 복수를 하고, 종들에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잔치에 데려오게 합니다. 마침내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혼인 잔치는 가장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고 손님들도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 신부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거리에서 불려 온 사람들은 종들을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초대받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입성을 혼인 잔치의 초대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갖추어 입고 준비해야 할 우리의 예복을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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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입니다.
1)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그 잔치에 참석하라고 ‘나’를 부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잔칫상에 차려 놓으신 음식을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음식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3)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과 처벌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내리시기 전에 이미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잔칫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밖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안’에는 구원과 생명이 있지만, ‘밖’에는 죽음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4) ‘혼인 잔치의 비유’에 들어 있는 ‘혼인 예복의 비유’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어떤 대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초대에 응답할 때의 자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혼인 예복을 입는 것은 응답에 속한 일, 즉 응답의 일부입니다. (예복을 안 입은 채로 참석한 것은 사실상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잔치에 참석하려는 마음 없이 그냥 잔치를 구경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서, 또는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밖에’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 22,2-5)
여기서 ‘초대받은 이들’은 유대인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복음을 들어도 응답하지 않는 오늘날의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응답하지 않은 이유는 임금의 잔치보다 자신들의 밭일과 장사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4,18-19) 이것은 하느님 나라, 영혼의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인들입니다.(요한 3,29) 하느님의 부르심은 손님들을 부르는 일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공들을 부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초대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잔치에, 또 자기 자신을 위한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6-10)
사람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인 일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하는 죄입니다.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새로 초대하는 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잔치는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나의 자리는 없어집니다.) 여기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라는 말은, 복음은 원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기쁜 소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을 초대한 것처럼, 또는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을 초대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그렇게 된 일이 아니고, 순서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복음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루카 24,47).>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길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갔는데 혼인 예복을 안 입었다고 꾸짖는 것은 너무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종들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려온 일은(10절),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온 일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하라고 초대한 일이고, 길거리에서 초대를 받았더라도 초대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고 잔치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혼인 예복을 입는 것도 응답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은 너무 하지 않나?” 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반대쪽에 있는 ‘멸망’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묘사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는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부르심이 곧 구원은 아니다. 응답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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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터키의 이스탐불에는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세계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소피아 성당입니다. 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탐불을 콘스탄티노플로 정하였고, 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교회를 지어서 봉헌하였는데 그 이름이 소피아 성당입니다. 아름다운 성당은 이슬람이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이슬람의 사원인 모스크로 사용되었습니다. 1934년 터키의 대통령은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교회와 모스크로 사용되었지만 상대방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서로의 역사를 존중하는 의미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예술적인 의미의 가치와 상대방의 종교를 포용하는 의미에서의 가치를 존중하였고,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갔을 때,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인 소피아 성당을 다시금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터키 정부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일이라고 유감을 표명하였습니다.
한국은 새롭게 성전을 신축하는 곳이 많습니다. 사제성소도 많고, 세례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창 신부님들도 대부분 교우들과 함께 새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상가 건물에서 지내면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고, 주택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본당으로 모금을 가기도 했고, 물건을 팔기도 했습니다. 눈물과 땀이 모여 새로운 성전을 신축하고 축성할 때는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수고와 땀을 모두 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눈에 보이는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면, 말씀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 말씀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눈에 보이는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교에 의해서 성당을 빼앗기지도 않지만 유럽과 미국의 많은 교구는 성당을 축소하거나, 매각하기도 합니다. 사제의 수가 부족하고,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는 교구도 240개의 본당을 120개로 줄였고, 앞으로는 80개로 줄인다고 합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지금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를 와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22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유배지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며 낯선 땅에서도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소피아 성당이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당의 숫자가 줄어들고, 매각하는 것도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삶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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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무슨 말씀을 들을까>
마태오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무슨 말씀을 들을까>
친구여,
자네 덕분에
잔치가 사네
맘껏 즐기게나
친구여,
자네 때문에
잔치가 죽네
어서 사라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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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찬미예수님
코로나가 시작된 지 5개월이 지나 7월 첫 주, 초등부 중고등부 미사가 재개된 날을 기억합니다. 미사를 준비하며,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복사단을 제외하고는 미사를 의무화 할 수 없어 아이들이 얼마나 미사에 올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를 시작했던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에 가는 만큼 아이들을 위한 미사는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단 한 명의 아이만 오더라도 그를 위해 정성껏 미사를 드리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렇게 미사를 재개하는 날이 다가왔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약 200명의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대성당에 모여 있었고 오랜만에 성당에 나온 아이들은 밝은 얼굴로 저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중고등부 미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사의 특성상 초등부 아이들 보다는 다소 적은 인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 앉아 성실히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드렸던 미사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미사였으니 앞으로 사제 생활을 하며 이 날의 미사는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미사가 매일매일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아름답고 풍성한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초대장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몸소 당신을 희생하시여 마련하신 이 잔치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와서 나의 사랑을 먹고, 마시고, 즐겨라”
“나에게서 받은 은총과 사랑을 주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권 안에서 혼인 잔치는 매우 크고 성대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므로 혼인이 다가오면 잔치를 주관하는 주인은 가장 먼저 가깝고 중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초청 소식을 알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로 이와 같은 풍습을 배경으로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은 예수님이고, 초대 받았음에도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결국 잔치의 초대를 나중에 받게 되는 길거리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게 된 죄인들과 이방인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즉, 유다인들은 누구보다 가장 먼저 생명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고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었으며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이를 무시하거나 외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대를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 즉 잔치의 초대는 다른 이방인들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잔치에 초대받게 되는 것은 어떠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닌 임금의 관대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초대는 수락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을 때 완성됩니다. 즉 거저 받게 되는 은총이라 할지라도 그에 합당한 응답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이러한 임금의 관대함을 거절합니다.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일을 하러 떠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초대하러 온 종을 때려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서 저는 혼인잔치를 미사에 비유하였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모습의 잔치에 우리는 초대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사랑과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데, 이 또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성대한 잔치의 초대장입니다. 그 외에도 고요히 앉아서 기도 할 수 있는 성당과 같은 장소, 마음을 다스리며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들이 모두 이 잔치에 해당됩니다.
이 초대장은 우리와 함께하는 가족들을 통해, 다른 이웃을 통해, 심지어 원수를 통해서 전달됩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의 소리, 선을 향한 움직임, 친절과 사랑의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얼마든지 이를 사용해 잔치에 참여하도록 배려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하느님의 초대를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도 하고, 자신의 뜻에만 귀를 기울이다 보니 주님의 의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또한 요즘 특정 종교 단체로 인해 일어나는 일처럼 우리의 아름다운 잔치를 방해하고자 하는 세력도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직접 실천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험담하는 것이 훨씬 쉽고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은 주님의 초대에 응답했지만 합당한 예복을 갖추지 않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바깥의 어두움으로 떨어질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하느님의 초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나 자신에게 주어지는지 주위를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오늘도 우리 앞에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초대장이 도착할 것입니다.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가장 좋은 예복을 갖춰 입으십시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우리에게 손짓하고 계십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그러자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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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와 혼인 예복의 비유를 함께 들려줍니다. 둘째 비유는 본디 독립되어 있었으나 마태오가 중요한 교육 목적을 갖고서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그를 밖으로 쫓아 버립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늘 나라에 대한 보편적인 초대가 일으킬 수 있는 오류를 피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자유롭게 부름을 받은 이들은 유다인들이든 이방인들이든 구원의 그릇된 확신에 빠지면 안 됩니다. 심판 때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인들과 함께하신 행위를 정당화하시려고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과 원수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기쁜 소식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심판이라는 면에서 ‘위기의 비유’인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관심과 자만으로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무한하게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마태오는 초기 공동체들, 곧 개종한 이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상황에 맞서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은 옛 백성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망가뜨리는 암담한 상황이 아니라 일찍이 얻은 명예에 만족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임금이 요구하는 혼인 예복은 마음의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 곧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새 인간의 옷으로,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으라는(에페 4,23-24 참조) 권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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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석하기는커녕 몹쓸 짓마저 하지요.
이에 임금은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치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혼인 잔치같이 기쁜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요. 아울러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신자의 의무를 게을리하거나, 다른 곳에 한눈을 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복음 후반부는 어색해 보입니다. 거리에 나가 누구나 다 잔치에 데리고 와서는, 막상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사람이 다 귀하다는 뜻이지요. 그런 만큼 주님의 초대를 받는 데에, 신분이나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단지 자신을 계속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낸 것입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가꿔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단점은 버리고, 부족한 점은 보완하고, 좋은 점은 더욱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나의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꾸준히 자기 계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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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자격이 없는 자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고 따라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거나 내일 해도 좋은 일을 지금 서둘러서 한다면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습니다.
싹이 돋고 잎이 패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법이지,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리사욕에 눈에 먼 사람들은 차례와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열매를 따겠다고 덤빕니다. 순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일 뿐 아니라 인생을 헛살게 됩니다.
하늘나라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잔치이자 축제입니다. 누구나 그 축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그 축제를 즐기게 됩니다.
하늘의 소리보다 사욕(私慾)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 하늘의 뜻을 따르기보다 욕망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잔치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잔치는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욕에 사로잡혀 ‘지금, 여기’의 하늘나라를 놓치는 사람은 미래의 하늘나라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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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최근 몇 년간 교육부에서 조사한 학생들의 희망 직업 순위를 살펴보면 공무원이 꼭 들어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꿈꾸지 않는 편안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지의 공사 때문에 공무원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난 공무원은 이제까지 봤던 공무원과 다른 모습을 본 것입니다.
많은 공무원이 안 되는 이유만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공무원은 되는 방법을 먼저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훨씬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성지의 공사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 더 발전적으로 나아갈지는 분명합니다. 안정성만을 추구하면서 안 되는 이유만을 먼저 찾는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도 자체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모든 젊은이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장래는 결코 밝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삶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젊은 마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지,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다 보면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따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는 종의 메시지를 듣고도 가지 않습니다. 밭으로 일하러 가고, 장사하러 가지요. 세상일에 몰두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을 부르는 이의 선물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혼인 잔치의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도 없게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분노를 가져오게 되어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주어집니다. 사랑하라는 부르심, 서로 함께하라는 부르심, 참 기쁨과 평화를 이루라는 부르심…. 그 모든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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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봄부터 여름까지 성지 안에서는 많은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추운 겨울에는 어떨까요? 봄부터 여름까지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냈던 꽃나무들이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어떻게 보면 아주 초라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겨울의 모습만을 보고서 볼품없다고 뽑아버리고 잘라버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곧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지금은 보기 싫은 모습이어도 상관없이 기다리고 지켜줍니다. 그 무엇도 항상 꽃을 피우면서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들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는 초라함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도 항상 아름다운 삶만 계속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 역시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꽃과 같은 인생도 있지만, 초라하고 볼품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꼬인 인생도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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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제祝祭의 삶>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救援의 자리다-
요즘 정주서원의 깊이에 대한 깨달음이 새롭습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특징적이자 으뜸서원이 정주서원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 내려가는 삶을 뜻합니다. 그러니 정주의 깊이는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외관상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아도 내적으로 이탈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정주생활입니다.
늘 한 눈에 환히 보이는 바오로 수사님이 묻힌 곳이 정주서원의 깊이를 더합니다. 영원히 주님 안에, 수도원 안에 정주의 삶을 상징하는 수사님이 묻힌 자리입니다. 내가 영원히 정주할 곳은 여기라는 자각에 삶은 저절로 비워져 훨씬 단순해지고 홀가분해지는 느낌입니다. 요즘 산책시 자주 부르는 ‘금강에 살으리랐다’ 2절에 ‘금강’대신 ‘수도원’을 넣어 불러 보기도 합니다.
-“이 몸이 스러진 뒤에 혼魂이 정녕 있을진데
혼이 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랐다
생전生前에 더럽힌 마음 명경明鏡같이 하고져”-
현세는 물론 연옥 정화를 연상케 하는 깊은 내용입니다. 이미 정주의 삶을 통해 명경같이 깨끗이 정화되기 시작한 정주의 수도형제들임 깨닫습니다. 깨달아 알면 정주의 오늘 지금 여기가 구원의 자리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행복기도’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아주 예전 불렀던, 요즘도 산책시 자주 부르는 ‘일터로 가자’의 노래의 참 흥겨운 3절도 생각납니다.
-“낙원이 어데냐고 묻지 말게나
심으며 웃은 얼굴 어화 낙원이로구나
내가슴엔 비가 개어 하늘 푸르고
내가슴엔 언제나 봄바람 분다
어화 어화 어화디야 일터로 가자
이 나라의 주인이 너와 나로구나”-
어제는 마침 2년만에 고백성사차 들렸던 수녀님에게 청아淸雅한 음성의 동요 몇곡을 들은 후 감사의 메시지와 화답글입니다.
-“천상의 음성! 동요 감사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부른 날입니다. 큰 환대와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의 축제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살 줄 알면 삶은 축제가 되고 살 줄 모르면 삶은 고해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축제인생을 살라고 한 번뿐이 삶의 축제에 초대받은 인생들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축제의 자리이자 구원의 자리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어제에 이어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로 시작되는 혼인 잔치의 비유가 참 심오합니다. 그대로 축제인생에 초대된 우리 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고맙게도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시대, 광야여정중의 우리를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미사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날마다 축제인생을 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리석었습니다. 무지에 눈멀었습니다. 일에 눈멀었고, 돈 벌기에 눈멀었고 폭력성에 눈멀었습니다. 예외없이 삶의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인데 참으로 많은 이들이 무지에 눈멀어 축제인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축제인생 하늘 나라를 못살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초대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은 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이들은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무지에 눈이 멀으니 삶의 우선 순위를 잊었습니다. 우선 주님의 천상 축제의 잔치에 참석함이 우선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답했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초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세례받았다 하여 구원이 아닙니다. 평생 항구하고 충실한 사랑 계명의 실천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바로 복음에서 혼인 예복이 상징하는 바 이런 충실한 수행의 응답입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바로 천상의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미사잔치에 합당한 마음의 예복을, 즉 믿음, 희망, 사랑이란 신망애信望愛의 예복禮服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예복禮服을 입었는지 살펴 보게 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한 깨끗한 영혼들에겐 즉시 에제키엘 예언서의 축복이 실현됩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를 지키게 하겠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크고 귀한 은총의 선물은 없습니다. 주님의 초대에 회개로 응답한, 바로 이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에게 선사되는 놀라운 성령의 축복,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의 축복입니다.
오늘은 12세기 영성으로 전 유럽을 석권했던 마지막 교부라 칭하는 그 유명한 시토회의 창립자 클레르보 수도원의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입니다. 시토회,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이 최고로 존경하여 받드는 사부입니다. 참으로 다방면에 천재였던 불가사의의 인물입니다. 클뤼니 베네딕도회에서 시토회로 판도를 바꾼 성인입니다. 관상생활을 지향했지만 고행생활로 병약한 몸에도 2/3는 교회 문제의 해결사解決士로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유럽 전체가 사목활동의 현장이었습니다.
교황은 물론 왕들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바쁜 와중에도 그렇게 많은 주옥같은 설교와 주석 등 무수한 영성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정말 불가사의입니다. 연옥같은 세상에서 참 치열히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았던 대 영성 수도승이었습니다.
성인은 22살에 31명 친지들과 수도원에 들어갔고 얼마후 아빠스가 되었고 만63세 선종할 때까지 참 치열히 살았습니다. 성인이 선종할 당시 전 유럽에는 성인에게서 시작한 500여개의 수도원이 번창하고 있었다 합니다. 12세기 당대는 물론 오늘날도 수도승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대 영성가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입니다. 혹자는 20세기 토마스 머튼을 성 베르나르드 이후 최고의 수도영성대가로 꼽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지상에서 천국을 살라고 하느님께서 교회의 주신 참 좋은 선물,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된 성인입니다.
오늘 입당송 “주님은 복된 베르나르도를 지식의 영으로 가득 채우시어, 하느님 백성에게 풍성한 가르침을 전하게 하셨네” 란 말마디와 기도문중,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라, 교회에 빛을 비추게 하셨으니”, “말과 행동으로 교회의 화목을 위하여 헌신한” 이란 말마디들이 성인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가 아닌 축제의 구원을,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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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기도시간을 챙겨야 합니다. 영적인 풍요로움을 찾지 않는다면 갈수록 영혼이 메말라 신앙이 죽게 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부들은 혼인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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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이고 신부인 우리의 자격을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마태 22,8)
성경의 언어에서 혼인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한편으로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초대받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세에서 어린양의 천상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지만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이 참석을 거부합니다. 제 일들이 먼저였고, 그만큼 잔치는 안중에도 없었고, 또 임금과 종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복음사가는 그 이유에 대해 별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거부 당하고 버림 받은 하느님의 모습이 비쳐지지요.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내내 부르짖는 외침이 바로 이처럼 상처입은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게다가 종들까지 붙잡히고 얻어맞고 죽음을 당했다니 행복해야 할 혼인 잔치가 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진노하여 그들을 처단하고 종들에게 새로이 하객들을 불러모으도록 지시합니다. 혼인 잔치에 축하객이 없다는 건 임금의 수치가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처음에 심혈을 기울여 고심하며 초대 명단을 뽑았을 임금이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대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혼인 잔치가 누구라도 올 수 있게 모두에게 열린 장으로 변합니다.
처음 초대를 받았지만 참여를 거부한 이들 덕분에 다른 많은 이들이 혼인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습니다. 마치 구약의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모든 이민족들에게 구원의 지평이 무한히 확대된 인류의 구세사와 맥을 같이합니다.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그런데 한없이 허용적일 것 같았던 임금이 제동을 겁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들어올 수는 있어도, 혼인 예복만은 반드시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을 받지요. 이런 임금님 태도의 반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혼인 예복"
혼인은 신랑 신부, 두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문과 지역을 하나로 아우르고 일치시키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할 때 입는 예복은 신랑 신부는 물론 가족과 가문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표현하기에 가난한 이건 부유한 이건 나름 정성껏 마련해 놓았지요.
제1독서에서는 배반과 불륜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이미 하느님과, 신부인 당신 백성과의 혼인은 신부의 불륜으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우상숭배로 부정해진 신부를 얼마든지 내치셔도 좋을, 그런 상황을 신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요.
그런데 더럽혀진 당신 이름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주님의 해법은 인간의 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그분은 더럽혀진 것을 송두리째 도려내거나 잘라내 버리는, 그야말로 이스라엘과 완전히 갈라서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시지요.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 ...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5-26)
하느님은 당신 아닌 다른 애인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 굳은 마음, 돌 같은 마음을 치우고 살처럼 부드럽고 새로운 마음으로 갈아 넣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지금 어떤 상태여도 다시 나의 신부다움을 되찾아 주어, 우리의 사랑을 깨뜨리지 않겠다. 네가 아무리 불결하고 부정해도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마음이 읽힙니다.
사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리 교만할 일도 우쭐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저 "아무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아무나'일지언정 혼인 예복은 필수로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신부로 불리움 받아 주님과의 사랑과 일치의 혼인 상태에 머무르려면 꼭 갖추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그 자격이 "정결"과 "새 마음과 새 영", "살로 된 마음"이라고 일러 줍니다. 이는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결단이 이루는 협주에서 비롯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은 이미 불결해진 우리를 정화해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고 결심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알고도 모르고도 눈 돌렸던 애인들, 주님보다 더 애착하고 기대했던 재물이며 사람이며 자기 영광 등의 우상을 치우고, 정성껏 혼인 예복을 갖춰 입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환호송)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으로 결단하고 주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이 순간이 바로 구원의 때가 됩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고 다시 일어서서 신랑이신 분께 고이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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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자기 마음을 야단치지 마십시오.
마음이 가는 대로 같이 가주십시오. 목 놓아 잘 울었던 아이들은 마음이 건강합니다. 울고 싶을 때 울면서 같이 가 주십시오. 아이들 중에 목 놓아 자기 설움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마음이 아주 건강합니다.
울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우는 아이를 보면 아주 싫어하고 화를 냅니다. 살면서 까닭 모를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과거에 풀지 못한 한이 있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는 십자가를 부여잡고 울거나이불을 뒤집어쓰고 우세요. 내가 왜 우나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울고, 울고 털고 울어 보십시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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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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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 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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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주님!
당신의 초대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양팔 벌려 보듬게 하소서!
시대의 질곡과 고통을 기꺼이 온 몸에 걸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는 빛나는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당장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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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9)
<혼인 잔치의 비유!>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혼인 잔칫상을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를 않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진노한 임금은 그런 사람들과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분부합니다. 그래서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고 오지 않은 한 사람을 야단쳐 쫓아냅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잔치를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 우리는 하느님의 이 초대에 얼마나 성실하게 응하고 있는가?
이 초대에 응하는 길은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입고 들어가야 할 예복은 무엇이며, 우리는 지금 이 예복을 잘 준비하고 있는가?
그 예복은 '제의'도, '수도복'도, '세례의 옷'도 아니고, 죽을 때 입는 '수의'(壽衣)도 아닙니다. 그 예복은 '성령의 옷', 곧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옷'입니다. 그 예복은 날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옷'입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에고(ego)'에 갇혀 살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들!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이 지혜 안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자녀들!
안주(安住)하면서 살지 않고, 늘 '초심(첫마음)'으로 돌아가 초심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자녀들!
그래서 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하느님의 자녀들!
오늘도 이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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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Gg9G4Y0eHY&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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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마태 22, 8)
혼인 잔치는
있는데
혼인 잔치에 오는
하객이 없습니다.
하느님 초대조차
거절하는 교만한
우리들입니다.
사는게
바쁘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댑니다.
핑계를 버리지
않고서는
초대에
귀 기울일 수 없고
기쁜소식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들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대조차
반기지 않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끝내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잔치집 자리에
우리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총이
감사하는 삶이
마땅한 혼인예복의
자세입니다.
거짓과 허상의
혼인예복이 아닌
믿음과 감사의
혼인예복입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변명을 멈추고
믿음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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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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