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4월에는 서울에서 이만제단 개관집회가 열려서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을 굽어보는 산언덕에 우뚝 세워진 이만제단은 크고 멋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수만 명이 부르는 찬송 소리가 한강을 넘어 서울 시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집회 기간 중에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전도관 체육대회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국의 전도관 교인들이 함께 모여 여러 가지 경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신나게 응원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체육대회를 구경하며 열흘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서울에서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제 얼굴이 환하게 피어서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를 구경하며 열흘의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 사람들마다 얼굴이 환히 피었다고 해
그 후 저희 가족은 화순군 북면 수리로 이사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수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셨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방앗간 기계에 휘발유를 넣다가 잘못하여 양손에 화상을 입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벌겋게 부어 오른 손을 보니 얼마나 아프실까 걱정되었지만 시골이라 병원이 없었고 화상에 바를 약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제단에 열심히 다녔던 화순 군수 댁으로 가서 생명물을 가져오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화순제단에 오셨을 때 군수 댁에 있는 큰 항아리에 생명물을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생명물을 대접에 담아서 양손을 넣으셨는데, 화상 입은 손이 들어가자마자 생명물이 마치 끓는 것처럼 부글부글하며 물방울들이 솟아올랐습니다. 방금 전까지 잔잔하던 생명물이 갑자기 끓는 것처럼 보이니 무척 신기했습니다. 아버지는 생명물이 닿는 순간 뜨겁고 쓰라리던 통증이 싹 가시고 시원하다고 하셨습니다. 양손에 벌겋게 부어올랐던 부기가 완전히 빠져서 화상을 입기 전과 다름이 없었고 흉터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화상 입은 손을 생명물에 넣자 마치 끓는 것처럼 부글부글하며 물방울이 솟아오르더니 뜨겁고 쓰라리던 통증이 사라지고 시원해져 놀랍게도 양손에 벌겋게 부어올랐던 부기가 완전히 빠져서 흉터 하나 남지 않아
그 후 저희가 사는 수리에도 전도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전도사님은 매일 전도를 하러 다니는 한편으로 자그마한 제단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노방 전도를 할 때는 전도사님이 앞장서서 북을 치고 교인들이 줄지어 가며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는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찬송을 따라 부르며 쫓아오고 어른들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새로 전도된 젊은 사람들은 제단을 짓는 곳에 나와서 즐겁게 찬송을 부르며 흙벽돌을 쌓았습니다. 수리전도관이 지어진 후에는 주일학생이 모여서 “감람나무 향기 속에 귀엽게 자라세∼” 하는 아이들의 찬송 소리가 시골 제단에 울렸습니다.
친구들에게 전도관에 나오면 은혜를 받는다고 전도해서 여러 명이 전도관에 나왔는데 예배 시간에 향기를 맡았다며 기뻐하더니 전도관에 꾸준히 다니게 돼
저는 수리제단에 다니면서 성경상의 감람나무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시는 분이 ‘감람나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박태선 장로님께서 바로 그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감람나무가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하며 감람나무가 세우신 전도관에 나오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구들 몇 명은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전도관에 나왔는데, 예배 시간에 좋은 향기를 맡았다고 기뻐하더니 수리제단에 꾸준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제가 학질을 앓아서 무척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질에 걸리면 오한이 일어나 사시나무 떨듯이 떨다가 얼마 후 열이 펄펄 끓는 것을 반복하는데,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학질을 뗐다.”라고 할 정도로 몹시 괴롭고 고생스러운 병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학질에 잘 듣는다는 약을 구해 오셔서 먹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몇 달 동안 앓다 보니 기운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특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이 제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심방을 오신 전도사님이 생명물을 주셔서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생명물을 마셨습니다. 그날도 머리가 무척 아팠는데 생명물을 마시고 나니 두통이 점점 가라앉아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머리가 맑아지며 기분도 무척 상쾌해졌습니다. 그렇게 생명물을 마신 후로 언제 아팠던가 할 만큼 학질이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저를 보고 식구들도 좋아했고 괴로운 병에서 벗어나게 되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덕소신앙촌 입주, 제과 공장에 근무 좋은 제품 만드는 것이 기쁘고 보람 하나님께서는 자주 공장에 오셔서 직원들에게 안수로 축복 해 주셔
1957년 11월 무렵에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가족은 신앙촌을 마음에 그리며 은혜 받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신앙촌은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은혜의 마을에 들어가기를 항상 고대하다가 이듬해인 1958년 11월에 드디어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기쁨에 들떠서 신앙촌에 들어가던 날 눈앞에 펼쳐진 소사신앙촌의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반듯반듯하게 세워진 양옥 주택과 그 옆에 가꾸어진 계단식 꽃밭, 힘차게 돌아가는 여러 공장들까지 곳곳을 바라보며 감탄했습니다.
저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후로 오만제단을 짓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돕다가 1960년부터 제과 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2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했을 때도 제과 공장에서 일하며 카스텔라와 캐러멜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폭신폭신하고 맛있는 카스텔라를 만들기 위해 계란을 듬뿍 넣어서 정성껏 반죽을 했고, 큰 인기를 끌었던 캐러멜은 빠르고 정확하게 포장하기 위해 집중하며 일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참 기쁘고 보람되었습니다.
한참 일에 열중하다가 좋은 향기가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진동해서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님께서 공장에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저 멀리 입구에 오시기만 해도 강한 향취가 공장 안을 가득 채운 것처럼 진동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향취가 진동하면 입구 쪽을 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공장에 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직원들에게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첫댓글 훈훈한 내용이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