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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Maurits C. Escher, 1898-1972)
네덜란드의 판화가. 수학과 논리학의 난제를 다룬 독특한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그는 교묘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작품 활동을 했는데, 특히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 미국의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cter)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다룬 <괴델, 에셔,바흐라는 책에서 예서의 '이상한 고리,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을 함께 묶어 '영원한 황금실'이라 불렀다.
에셔 도마뱀
도마뱀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저 조그마한 파충류들이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있다. 물론 현실에서 저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은 정말로 저 도마뱀처럼 두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여기선 바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먼저 원시 예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그러려면 깊숙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어서 우리는 예술의 기원을 물을 것이다. 예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왜 원시인들은 어두운 동굴 속 깊은
곳에 그림을 남겼을까? ....여기서 가상과 현실을 자유로이 넘나들던 유년기 인류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함께 원시 예술의 비밀이 드러난다. 그 시절, 예술은 곧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 뒤 사람들이 점차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게 되자, 마법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이제 예술은 마법이기를 그치고 다른 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에셔의 세계 1.-여러 세계를 넘나듦
에셔의 작품 세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두자.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들을 내 맘대로 분류하면 대략 열 가지쯤 된다.
1) 여러 세계를 넘나듦, 2) 평면의 균등분할, 3) 거울에 비춘상, 4) 변형, 5) 칼레이도치클루스와 나선형, 6) 3차원 환영의 파괴, 7) 불가능한 형태, 8) 무한성
에의 접근, 9) 이율배반, 10)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
먼저 <도마뱀>. 이 작품은 첫번째 주제와 관계가 있다. 도마뱀들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에셔는 평면과 공간의 대립을 지워버림으로써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두꺼운 벽을 무너뜨린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건 인류의 오랜 꿈이리라. 옆의 그림 < 만남>은 이 주제의 변형이다. 단, 여기엔 하나의 차원이 더있다. 뒤의 배경을 보라. 무(無)에서 인물들이 탄생하고 있다. 무에서 평면으로, 다시 공간으로!
에셔 만남
에셔의 세계 2-평면의 균등 분할
다시 <도마뱀>. 하지만 그뿐인가? 그림 속의 도마뱀들을 보면 여러 마리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이게 바로 두번째 주제 '평면의 균등 분할'이다. 이걸 이
용하면 똑같은 모양의 그림이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나가게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방법이 있다. 위의 그림을 보라. 먼저 도마뱀
형체의 기본이 될 도형을 선택한다. 이 경우엔 정육각형이다. 그 다음 육각형의 각 변에서 한 귀퉁이를 잘라낸 다음에 변에 갖다 붙이는 거다. 그럼 회전점
(tuming point)인 점 A에서는 도마뱀 대가리가 세 개 모이고, B에서는 다리 세개가, C에서는 세 개의 무릎이 모이게 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도마뱀이 징그럽다고? 꼭 도마뱀일 필요는 없다. 귀퉁이를 다른 모양으로 자르면, 육각형은 또 다른 형상이 될 수 있으니까. 한번 해보라. 또 어떤 형체를 만들 수 있을까?
<유리병이 있는 정물> 에셔 석판. 1934
저 페르시아풍 새 조각은 에셔가 장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거라고 한다. 한편에 사람 머리를 한 새의 조각이 있고, 다른 한편에 유리병이 반사된 상(象)이 있다. 여기서 현실과 가상은 분리되어 있다. 인간들의 삶 속에서 저렇게 현실과 가상이 분리되면, 드디어 문명이란 것이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문명 세계와 만나게 된다. 먼저 이집트 예술에 대해 알아보고, 그 다음 그리스 예술의 특징에 대
해 알아보자. 원시 예술에서 보았던 두 가지 양식의 대립이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어서 최초의 미학자들이 등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이 두 사람은 이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를 위해 수고를 해줄 거다. 예술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가상'으로 탄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가상'에 대해서 두 사람은 생각이 서로 달랐다. 어떻게?
에셔의 세계 3-거울에 비춘 상
에셔 거울이 있는 정물
에셔 정물과 거리
거울이나 물방울 또는 유리구슬에 비친 반영상은 에셔가 즐겨 그리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거울 속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공상
을 해본 적이 있을 거다. 그럼 왜 그가 이 테마를 좋아했는지 알 거다. 니체에 따르면, 위대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덧없는 그림자라는 예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저 유리구슬에 비친 상처럼, 플라톤도 그랬고, 니체 자신도 그랬다. 정말일까? 어쨌든 거울 속의 세계와 현실. 에셔는 종종 이 두 세계를 하나로 결합하곤 했는데, 그건 아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떻게? 간단하다. 거울의 테두리만 지워버리면 된다. 그림을 보라. 여기서 에셔는 첫번째 주제 '여러 세계를 넘나듦'과 세번째 주제 '거울에 비춘 상'을 결합시켰다. 그의 작품에는 대
개 이렇게 몇 가지 주제가 동시에 결합되어 있는데, 이제부터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록・・・・・・・
중세 예술과 미학
가상을 넘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의 첫 구절을 번역하던 파우스트는 말씀이라는 단어에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로옮기고 비로소 만족해한다. 그림을 보라. 가운데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게 바로 '말씀', 곧 천지창조의 원리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씀'이라는 단어와 그리스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 사이에 유사성을 발견하고서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중세인이었다. 여기선 중세의 미학을 소개한다. 먼저 플로티노스가 등장한다. 그는 고대에 살았고 고대인이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중세에 더 큰 영향을 끼쳤기 때
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미학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라톤주의가 몇 백 년 동안 중세 미학의 골격이 된다. 중세가 저물어갈 무럽 토마스아퀴나스가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즐겨 읽었던 그의 미학은 중세 초의 미학보다 훨씬 더 경험적인 양상을 보인다. 중세 예술의 특징은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하고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이 세 사람의 사상과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의 대응 관계에 주목하라. 또 중세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에도,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꼭 기억하도록!
말씀, 에셔 1942
에셔의 세계 4-변형
네번째 주제는 변형(metamorphose)이다. 변형이란 하나의 형태가 점차 모습을 바꿔 다른 형태가 되는걸 말한다. <말씀>을 잘 뜯어보라. 거기엔 두 가지
변형이 있다. 먼저 중심에 있는 커다란 삼각형이 세 방향으로 뻗어나가 결국 새와 물고기와 개구리로 변한다.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이 복잡한 유기적 형태
로 변한 거다. 이게 바로 피타고라스적 세계 창조의 관념일 거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테두리에 있는 이 세 종류의 피조물들은 테두리를 돌면서 서로 모
습을 바꾼다. 새는 물고기로, 물고기는 개구리로, 개구리는 다시 새로! 피타고라스파의 신비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플라톤은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고 한
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이렇게 윤회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해방 에셔
에셔의 세계 5-칼레이도치클루스와 나선형
#칼레이도치클루스(아름다움Kalos과 형상 Eidos, 원Zyklus의 합성어로 '아름다운 형상으로 이루어진 고리').이 고리는 안에서 밖으로 뒤집을 수 있는데 그 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게 하면 칼레이도치클루스를 만들 수 있을까? 좀 복잡하다. 먼저 커다란 종이로 이런 모양을 만드는 거다(그림 1). 저 선들을 따라 먼저 오른쪽으로, 다음으론 왼쪽으로 접어나간다. 다 접었으면 이제 그 접은 자국을 따라 삼각형들을 조립한다. 그러면 기다랗게 이어진 정사면체들의 끈이 생긴다. 대충 이런 모양이다(그림 2), 끈의 양쪽 끝을 이어 붙이면, 아름다운 토러스 우주 모양의 입체가 만들어진다(그림 3). 저 삼각형들 속의 그림은 평면의 균등 분할을
이용해서 그린 거다. 따라서 그것들은 다른 어떤 삼각형과 만나도 그림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 저걸 아까 말한 대로 안쪽에서 바깥으로 돌리면, 그림들
회전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물론 그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근대 예술과 미학
가상의 부활
유리구슬의 표면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가상'의 세계다. 중세의 예술은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했지만, 새로운 시대는 가상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다. 여기선 르네상스 이후 근대 미학을 다룬다. 고대의 두 철학자는 이 시대에도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낼 거다. 제일 먼저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다 빈치는 엄격한 자연모방을 주장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내면의 형상에 따른 창조를 주장한다. 이어서 뒤러의 실험실에 들러 '가상'을 창조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알아보자. 실험실에서 나오면 어느새 바로크 시대다. 이 시기의 예술에 대해선 뵐플린이 설명해줄 거
다. 이어서 미학의 창시자인 바움가르텐과 칸트의 미학으로 넘어간다. 바움가르텐의 예술관은 아직 고전주의적이고, 칸트의 미학은 처음으로 낭만주의적이다. 지나가는 길에 칸트와 관련하여 '고상한 놀이'를 하나 배우자, 재미있을 거다. 이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헤겔의 미학이다. 이제 예술은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절대정신에 닻을 내린다. <유리구슬을 든 손>을 기억하라. 헤겔은 '가상'의 종말을 예언했다.과연 그의 예언이 적중했을까
<유리구슬을 든 손> 에셔, 석판, 1935년
발코니. 에셔, 1945년
평면과 곡면에 비친 상, 어느 것이 세계의 객관적 모습인가?
에셔의 세계 6 - 3차원 환영의 파괴
도리스식 기둥 에셔
<3차원 1 ><왼쪽)과 이 판화의 의도를 보여주는 사진(오른쪽)
원근법의 본질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게 가능한 건 우리의 망막이 평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망막에 비친 2차원의 상을 다시 3차원의 상으로 구성하는 데엔 이성적 사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각은 단순한 감각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의 그림은 원근법이 애써 이룩한 것, 말하자면 3차원 공간의 환영을 깨고 있다. 저 도리스식 기둥들을 에서는 위 아래로 슬쩍 접어놓음으로써, 3차원의 환영이 결국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위의 그림과 그 옆의 사진을 비교해보라.
<벨베데레>에셔, 1958년
IQ 테스트! 그림 속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보라.
에셔의 세계 7 불가능한 형태
<볼록과 오목> 에셔
<쇼우텐 교수의 계단>에셔, 1955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있을 법한 사건을 묘사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는 플라톤에 맞서 예술적 '허구'를 옹호하려 했다. 바움가르텐도 예술이 가능세계를 묘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림 <볼록과 오목>을 보라.
저건 어느 가능세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런 일이 가능한 세계가 있다면 그건 단 하나, 예술의 세계뿐이다. 이 불가능한 형태는 에서가 즐겨 그리
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데,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법으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위의 그림, 장난감 계단을 보라. 에셔가 어느 수학자에게서 선물로
받은 거라고 한다. 저 계단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무슨 얘기냐고? 계단 양옆에 붙어 있는 칸막이를 하나씩 차례로 손으로 가려보라. 먼저 오른쪽, 다음은
왼쪽, 그리고 다시 볼록과 오목>을 보라.
<연대의 끈>에셔, 1956년
그림 속의 인물은 에셔와 그의 부인이다. 만약 '공통감'이라는 게 있어 모든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미에 대한 판단은 보편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거다.
에셔의 세계 8 무한성에의 접근
<뱀> 에셔. 1969년
헤겔은 자신이 절대지(絶對知)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연 우리가 시작에서 종말까지 우주의 전 과정에 대한 '완결된 지식을 가질
수 있을까? 글쎄, 그건 불가능할 거다. 어떻게 유한한 인간의 두뇌로 무한한 우주의 진행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유한성과 세계의 무한성. 이 대립
을 해소하는 게 철학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오늘날 이 꿈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하지만 예술에선 그게 가능하다. 어떻게? 칼레이도치클루스를 생각해보라. 사방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면서도 닫혀 있지 않았던가. 평면을 이용할 수도 있다. <천사와 악마>를 봐라. 중심에서 원의 테두리로 다가갈수록 천사와 악마의 크기가 무한히 작아진다. 허나 이 그림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한쪽 끝으로만 무한하니까. 옆의 그림 <뱀>을 보라. 우주를 뱀으로 상징하는 여러 문명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거기서 고리들을 보라, 원의 중심 쪽으로도, 원의 가장자리 쪽으로도 고리들은 무한히 작아진다. 에셔는 이런 식으로 유한한 평면에 무한한 과정을 담으려 했다.
어떤가, 성공한 거 같은가?
<천사와 악마> 에셔
아름다움에 관하여
아름다운 가상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낮으로 밤으로 밤과 낮은 서로 배척한다. 밤이 낮일수 없고, 낮이 밤일 수 없다. 빛은 밤과 낮을 분명히 가른다. 하지만 이 그림 속에서 밤과 낮은 공존한다. 이렇게 서로 배척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 걸 철학에선 이율배반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와 관련해 서로 얽힌 두 가지 문제를 다루게 된다. 먼저 미이론에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대립이다. 쥐라기에도 아름다움
이 있었을까? 객관주의자라면 '에
예스', 주관주의자라면 '노'. 이어서 취미 판단의
이율배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미에도 이율배반이 있다. 객관적인 미의 기준은 없다. 그러나 있다. 미에 대해 논쟁할 수 있는가? 없다. 그러나 있다. 어느 게 옳을까? 유클리드와 산책하면서 생각해보자.
<낮과 밤> 에셔, 석판, 1933년
에셔의 세계 9 이율배반
<평면 채우기 2 > 에셔 1957년
<낮과 밤>엔 세 개의 주제가 결합되어 있다.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주제는 이율배반이다. 이율배반이란 상반되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 걸 가리키는데, <낮과 밤>과 <천사와 악마>는 이율배반을 주제로 그린 대표작이다. 어떻게 그렸을까? 보통 그림에선 형태와 배경이 확연히 구별
되고, 배경이 형태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들 속에서 에서는 교묘한 계산으로 배경이 또한 형태를 이루게 만들었다.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물론 이는 평면의 규칙적인 균등 분할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위의 그림을 보라. 이런 식으로 이율배반의 상황
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에셔의 세계10 -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 불개미> 에셔. 1963
개미들이 고리를 돌고 돌아 끊임없이 제 자리로 돌
아온다.
개미들이 그냥 테두리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좀 전에는 고리의 안쪽을 돌고 있었는데 돌다보니
어느새 고리의 바깥쪽에 나와 있다.
안은 바깥쪽이 아니고 바깥쪽은 안이 아닌데 어떻
게 된 일일까?
미적 이론이 붕괴되면서 미는 머리 속의 주관화로
거처를 옮긴다.
인간이 어떤 특수한 태도나 지각을 취하면, 세상 모
든 것이 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특수한 지각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상적인 지각과는 다른 미적 지각이다.
미를 만들어 내는 미적 지각이란?
미의 비밀을 찾아 대상의 속성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사물이 가진 속성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아
름답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까?
객관주의에 문제가 있으니 다시 주관적 견해로 돌
아와야 한다.
그렇다면 <뫼비우스의 띠>의 개미처럼 돌고 도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악마의 고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