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James Harris의 Great Urals를 읽으면서 정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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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과 다르게 우랄산맥은 그렇게 큰 산맥은 아니죠. 길이는 꽤 길지만, 전형적인 고기습곡산지라 풍화와 침식이 많이 진행되어서 제일 높은 봉이 1900m가 안 됩니다. 한국의 백두산은 고사하고 한라산보다 낮은 셈... 그러나 우랄산맥은 다른 의미에서 러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곳이라고 할만 합니다.
왜냐면 우랄 산맥을 따라서 당시 세계적으로 거대한 스케일의 제철소 및 중화학 공업, 기계 공업이 엄청난 성장을 했고, 소련 국가 경제의 중추를 담당할 부지로 선정되어 어마어마한 투자를 받았기 때문이죠.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첼랴빈스크, 마그니토고르스크, 페름 등의 공업단지가 어마어마한 확장을 이루었고, 주변 농촌을 넘어 자의로든 타의로든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공급되어 이 지역은 급속히 도시화 됩니다. 그러나 우랄산맥이 진정 "거대한 우랄산맥"으로 거듭난 건 다양한 정치, 경제적 고려 끝에서였습니다. 국가 대계를 정하는데 당연히 그랬겠죠.
그리고 핵심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우랄의 지역 인사들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에서 지방이 중앙에 압력을 넣는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할 수 있겠지만, 중앙에 대한 지방의 압력은 실재하는 것이었습니다. 20년대까지만 해도 갖추어져있던 제대로 된 행정조직이 없던 소련은 행정의 많은 부분을 지방에 위임했습니다. "지도력은 단일하게 두되, 수행은 자치적으로"라는 르이코프의 표어는 소련의 강력한 통제의지와 빈약한 통제능력의 괴리를 잘 보여줍니다. 중앙에서 지시가 내려오기는 하였으나 당은 모호한 표현들을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과업을 수행하곤 했으며, 그 목표는 대개 중앙에서 자신 지역의 이권을 확보하는 것, 혹은 다른 지역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되곤 했습니다.
혁명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소수의 조직된 활동가들을 통해 정권을 얻은 볼셰비키는 광대한 러시아 제국의 지방들을 통제하기에는 인력이 너무 부족했었습니다. 일상적인 행정업무는 당연히 못했는데, 거기에 더해 혁명 직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군과도 싸워야 했고 다른 좌파들과 권력경쟁도 해야했었기 때문이죠. 각 지역의 볼셰비키는 새로운 당원을 매우 많이 받았는데, 이들은 대개 구 제국 시절 지역관료로 활동하던 이들이나 경험 없는 신참들이었습니다. 그 막대한 거리와 너무나 빈약한 교통 및 통신 인프라로 중앙의 명령이 잘 먹혀들지 않았을 때, 지방 행정은 대개 이런 믿음직스럽지 못한 이들에게 맡겨져야 했으며 상당수 부패와 불복종, 그리고 실수들로 얼룩졌습니다.
이를 통제하고자 했던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력, 그리고 어떻게든 통제를 벗어나려고 했던 지방 실무자들의 반발은 때로는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렀으며, 당 내에서 많은 경고가 있었습니다. 내전기에는 전쟁수행 때문에 이를 다 건드리지는 못했고 지방도 생존의 문제로 중앙에 너무 엇나가지는 못했으나 볼셰비키의 승리가 명백해졌을 때 다시 갈등은 재점화 되었습니다. 전시공산주의는 다급한 전쟁수행에는 그럭저럭 작동하였으나 그 엄청난 비효율성, 폭력성은 지방 및 다양한 사회집단의 반발을 샀었고,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었죠.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를 강경진압하고 분파금지강령을 비롯한 당내 통일정책이라는 채찍과 신경제정책이라는 당근으로 대응합니다.
신경제정책은 단순히 사적거래의 자유화와 농민들에 대한 회유책을 넘어서 지방 행정통제를 약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20년대를 거치면서, 특히 경제 영역의 행정을 집행할 때 지방의 결정권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특히 당시의 빈약한 관료기구와 행정기술로는 지극히 적은 수의 최고지도부가 모든 행정업무를 소화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중앙에서 어느 정도 방조한 측면도 있었지요. 그 결과로 기존 행정구역인 구베르니야들을 병합하여 소련의 기본 행정구역을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오블라스찌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지도부의 집중, 실무의 탈집중"이라는 르이코프의 구호와 함께 지방의 영향력은 다시금 증대하였습니다. 당에서 내려보내는 인사정책이나 행정명령을 표면적으로 따르지만 뒤에서는 무시하고, 때로는 대놓고 반발하는 모습들은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게다가 중앙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는 독자적 행정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특히 이들은 지역 경제와 산업을 유치시키는 데 혈안이었죠. 레닌은 공공연하게 국가의 전기보급을 확대해야한다고 말했고, 당내의 공업화 추진 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을 권력투쟁기부터 지방 권력자들은 다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국가계획에서 그들이 얼마나 성과를 잘 낼 수 있는지 각 지역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입을 열었습니다. 대규모 산업투자를 받아 자신들 지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전략은 아주 일반적이었고, 중앙에 올라가서 그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지역 대표들은 중앙이 자신들 지역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투덜대기 일쑤였죠.
사실 이는 중앙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1924년, 체카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특히 이러한 움직임을 싫어했습니다.
"지역 대표들이 우리에게 와서 자신들이 계획을 세웠다고 떠벌릴 때, 저는 그들에게 그 계획이란 것은 망상 속에만 있을 때가 아닌, 현재 우리의 산업 상황과 자원 동원 능력의 표현일 때만 가치를 갖는다고 말합니다. 지역의 3개년이나 5개년 계획을 볼 때, 당신들은 그 계획이라는 게 결국 자신들의 왕성한 욕구와 순전한 환상에 기반한 계획이라는 걸 발견할 겁니다. 그 계획들은, 생산계획이 아닙니다. 중앙에 요구하는 계획이지요."
제르진스키는 국민경제최고회의에서 지역 공화국이나 주에서 요구하는 권력은 오로지 중앙의 승인 아래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나 이 때 중앙의 권위는 여전히 이빨이 먹히는 시점은 아니었죠. 20년대 모스크바 중앙 당의 권력투쟁은 지방 문제에 지도부로 하여금 힘을 못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분열되어 있어 공격거리를 잘못 제공했다가는 바로 모가지가 날아갈 살벌한 정치게임에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죠. 시장에 맡길 영역까지 포함하여 국민경제 전반을 포괄해서 다뤄야하는 소련 체제의 특성 상, 정책결정 과정에서 처리되어야할 정보와 고려할 사안들의 양과 복잡성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지방 관료들의 협조 없이는 행정 운영 자체가 힘든 상황이었고, 지방에 계속 신호를 보내면서 니들 말 좀 들어 투덜투덜 댔지만, 어찌되었든 중앙은 씁쓸하게 지방의 자율성과 그들의 요구를 계속 승인해줬습니다.
그리고 소련 정부가 국가를 완전 들어엎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려고 하자, 각 지역은 앞다투어 지역 산업을 발전시킬 계획을 중앙에 제출합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스케일이 큰 프로젝트들이 두 개가 있었으니 바로 동부 우크라이나와 우랄 산맥의 두 제철공업단지의 대대적 확장 프로젝트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거대한 우랄산맥"의 탄생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죠.
물론, 이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거의 10년 넘도록 지방행정이 돌아가는 꼬라지를 지켜보았던, 하부 관료조직들에서 올라오는 잡다한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시시콜콜한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국가의 대대적 경제계획을 총집행하고자 하는 사람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게 누군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봅니다..
첫댓글 그 막대한 거리와 너무나 빈약한 교통 및 통신 인프라로 중앙의 명령이 잘 먹혀들지 않았을 때, 지방 행정은 대개 이런 믿음직스럽지 못한 이들에게 맡겨져야 했으며 상당수 부패와 불복종, 그리고 실수들로 얼룩졌습니다.
=> 제정 러시아에도 별 다를바없고, 심지어 오늘날의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조차 보이는 일인것 같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행정력이 커버하긴 너무나도 큰 땅덩이죠.
실례로 19세기초 시베리아 유배를 당한 헤르첸이라는 한 지식인은 다음 같은 기록을 남겼지요.
"그들은 툭하면 2,30 코펙 정도의 뇌물을 받았고, 와인 한 잔에 서류를 팔아넘겼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동원하여 자신들의 품위를 떨어트렸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하달한 명령의 위력은 하달 시점에는 대포알 같았다. 그러나 시베리아 현지에 도달한 중앙 정부 명령의 위력은 지방관들이 쏴대는 권총같은 행정력의 위력에도 한참 못미쳤다. 중앙 정부의 조치들은 하나같이 약화되었고 의도 역시 왜곡 되었으며, 하나같이 사기행각의 미끼가 되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순수한 의도는 언제나 우롱당하고 배반당했다. 그리고 그런짓을 자행하는 자들은 충직한 공복인척 가면을 뒤집어 썼다."
애당초 글중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신생 소비에트 연방의 지방 행정관중 다수는 이전 제정의 관료들이었고, 이들의 구습과 폐단 또한 같이 상속되었겟지요.
우리가 흔히 공산 러시아에서 떠올리는 음울한 분위기. 숙청과 유형. 강제노동과 인권탄압 같은것들은 제정 러시아의 것과 다를바 없다는 지적또한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봅니다.
그나저나 야로슬라블의 바이노프 시리즈때도 그랬지만 조선 말기 레벨로 답 안나오는 듯한 대륙의 행정력은 ㅋㅑ
이러니 스탈린의 숙청이 필요악이었다는 헛소리도 나오는군요.
@CJSW 아 CJSW님 글이었군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찾아야 한다는 큰그림은 맞았지만, 그 수단이 매우 폭력적이었지요.
사법 살인과 폭력,고문으로 얼룩지고 그 기준 또한 심히 자의적이며, 인민의 공포조차 도구로 사용하는 레벨이었으니까요.
결국 그 와중에 없어진 브레인과 공포로 경직될데로 경직되버린 조직은 독소전이 개시되며 거대한 역풍이 되버렸고요.
@CJSW 그래도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인간백정 스탈린은 이겼고 히틀러는 졌으니 그렇지....하는식으로 동렬에 놓을수 없는것이, 굽시니스트도 잘 꼬집었지만
스탈린은 최소한 이념이나 정치라는것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고 자신과 동등한 항렬에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상대가 가능한 상대였던 반면에
히틀러는 이건 뭐....정치니 이념이니를 떠나 과연 인간새끼가 맞는지 부터 의심스러운게 도저히 자신들과 동렬로 놓고 정치판에 끼워주고 싶은 생각이 안들더라...였지요.
결국 반공이라는 괜찮은 떡밥이 있었고, 전쟁말에 그렇게 서유럽측에 뻐꾸기를 날려댔지만 히틀러는 폭망이었지요
@CJSW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죽인 놈은 살인자니 히틀러 = 스탈린" ㅋㅋㅋㅋㅋㅋ
아우슈비츠의 살인공장과 전근대 전쟁의 전쟁 폭력을 완전히 동일시 하고 이해하는 경우도 대다수입니다. 그냥 단순하고 편리하게 단편적으로 사실도 아닌 이미지로 문제를 해석하려고 하죠.. 다층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하려고 하는 순간 쿨한척 굴면서 "정의"라는 두 글자로 때려쳐 버리고..
인문학 말살이 가져온 효과인지 원래 반도민의 성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장공비 우리서기장이 자아비판하신데요!
근데 어느정도는 저런 지역대표들이 일정부분 필요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부패니 뭐니는 제외하고)현재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지역주민들 의견에는 전혀 관심없이 중앙에서 정치하는 것에만 관심있다는 불만이 어제오늘 있어왔던것이 아니니;;
심지어 요즘까지 그렇지만 거대하고 험한 자연환경을 가지는 러시아의 자연환경은 행정력에 한계가 있거든요(....)
우리처럼 조선초에 이미 중앙의 행정력이 구석구석 스며드는 레벨의 아담한 나라와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