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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부친(父親)의 신물(信物)을 찾다
장강(長江).
도도히 흐르는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진일문은 기이한 감회에 젖어들고 있었다.
환우오사와 생사지교를 맺은 후, 그는 폭중동부를 나와 곧바로 금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강의 줄기를 따라 그들과 더불어 동진(東進)하는 중이었다.
그의 뇌리에는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실로 무수한 운명의 등락(騰落)을 거친 그였다.
하지만 동안에도 그는 유독 한 사람의 영상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단아했으되 항상 신비감을 느끼게 했던 중년문사, 바로 그의 은사인 왕중헌(王中軒)이었다.
'왕사부께서는 지금쯤 어떻게 되셨을까? 분명 살아 계시기는 할텐데....... 그렇지 않다면 놈들이 내게 그토록 집요하게 행방을 추궁했을 리가 없다.'
왕중헌을 떠올리면 그는 여지없이 가슴이 출렁이곤 했다.
천하를 오시하며 학문의 세계에만 침잠해 있던 문사, 그것이 진일문이 보아왔던 사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왕중헌의 숨겨진 정체를 알고부터 환상이란 환상은 모두 깨지고 말았다.
무림공적이자 척살대상으로 낙인찍힌 대마왕(大魔王).
천하인들이 전부 그렇게 말하니 그 진가(眞假)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진일문은 그 점에 있어 다분히 회의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중헌이마인(魔人)일지언정 악인(惡人)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하늘같이 믿고 따르던 사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준이 남달랐다.
대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이란 말인가?
진일문은 과정을 일체 무시하고 결과만을 가지고 논하려는 인물들을 다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경멸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쪽에서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장강 연변의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전형적인 강남의 춘색(春色)을 보이고 있었는데, 굽이치는 물결을 따라가며 이를 감상하다 보니 절로 시흥이 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선객들도 그 절경에 취해 탄성을 발하는가 하면 술을 강물 위에 뿌리며 싯귀를 읊어내기도 했다.
수양버들이 강물에 늘어진 가지를 담그고 있었다.
실바람이 간간이 이를 흔들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코를 자극하는도화의 향기는 쌍을 이룬 선남선녀, 그들이 자아내는 풍취와 한껏 멋들어진 조화를 느끼게 했다.
강 언덕에는 한가롭게 낚싯대를 드리운 태공의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노랫소리와 더불어 그것은 봄날의 나른한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범선은 계속하여 유유히 흘러 내려갔다.
유람객과 상인들이 대부분인 선객들은 저마다 흥취에 젖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진일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강이라면 의례 풍경보다는 전날에 있었던 비극의 혈사(血史)를 먼저 떠올렸던 그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보니 나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환우오사는 또어떤가?
도피생활로인해 천하 각처를 떠돌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강남의 수려하고 느긋한 풍광에는 여지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특히 글줄이나읽었다는 기사 백불범과 아직도 여심을 간직하고 있는 색사 요미미는 난간에 매달려 떠날 줄을 몰랐다.
배의 목적지는금릉이었다.
진일문이 그 곳에 가서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상에는 오사와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강호경험이 풍부한 오사는 그가 알고자 하는 많은 것들을 들려주었다.
덕분에 무림에 대해서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었던 그는 그야말로 산지식을 취할 수가 있었다.
무림 각 문파의 내력을 비롯하여 사해오악(四海五嶽)을 주름잡는 무림영웅들의 이야기, 그리고 기인들의 행적이나 은원에 얽힌
전설과도 같은 비사(秘史)들.......
한결같이 흥미롭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진일문은 그것들을 모조리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그 중에서도 무림 고수들에 대한 것이나 강호에 제문파에 관한 사항은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철저하게 기억해 두었다.
그러기를 보름여............
환우오사의 강호견식은 그 때까지도 흡사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줄줄이 쏟아져 나와 진일문의 상식 범위를 넓혀 주었다.
진일문은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대개 감탄을 하곤 했지만 일면으로는 크게 충격을 입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강호사의 흉험함이 그의 예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한층 더 마음을 단단하게 다지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내가 가야할 길은 보보가 다 험로(險路)이다. 이렇다할 배경도 없는 데다가 무수한 난관들만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 결코 무력하게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불타는 도전에의 의지였다.
또한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바탕이 되어줄 무공이었다.
진일문은 오사로부터 무학을 배웠다.
그들이 일신에 지니고 있는 독문의 절기들을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
실상 무공 방면에 있어서는 오사가 그에 비해 당연히 하수(下手)였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그들의 무공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
줄지는 진일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맹사 두목.
그에게서는 무초(無招), 즉 검식이 없는 검법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쾌검을 발휘할 수 있는 원리도 습득했다.
광사 탁불군.
그가 진일문에게 가르쳐 준 것은 물론 육합풍뢰장이었다.
괴력을 과시하던 그의 장법이 또 다른 주인을 맞게 되었다.
기사 백불범.
그가 알고 있는 암기술은 자그마치 삼백이십여섯가지였다.
그는 이것을 다시 열두 개로 묶어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심지어 그는 세간에서 금기로 취급되고 있는 화약(火藥)의 제조법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환사 만생.
그의 역용술은실로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그것은 내공에 의해 근육과 뼈를 마음대로 줄였다 늘였다 하는 것으로써 두발까지도 완벽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색사 요미미.
그녀는 잡다한무공들을 꽤 익히고 있었으나 진일문에 비한다면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주로 세상 인심이나 속임수에 관한 것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개중에서 진일문이 유독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무래도 미혼약(迷魂藥)에 관한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미혼약으로 인해 음희랑에게 치욕을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안성객잔(安盛客棧).
금릉 내에서도가장 번화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진일문과 환우오사는 이 객잔에 투숙했다.
그들 일행은 식사를 마치자 한 객방에 둘러앉았다.
먼저 진일문이 환사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문을 떼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부탁이나 셋째형께선 한 인물을 찾아 주시오. 금릉 전체를 다 뒤져서라도......."
"그가 누구입니까?"
"장무(張無)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의 우두머리요. 그를 잡아다 주시오."
환사는 의아한표정을 지었다.
"대형께서는 무슨 이유로 하찮은 거지두목을 찾으십니까?"
진일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과거 그에게 한 가지 물건을 빼앗긴 적이 있소이다. 그것을 반드시 찾아야 하오."
환사는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진일문의 얼굴에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으로 보아 필경 절박한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소제는 나가 보겠소이다."
환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광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진일문.
그는 줄곧 초조한 심정이 되어 환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그가 이 금릉으로 온 이유도 거지왕초에게 빼앗긴 어머니의 유물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객방에서한 발자국도 내밀지 않은 채 거지왕초인 장무가 아직도 그 유물을 지니고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밤이 이슥해 졌을 때에야 환사와 광사가 돌아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광사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마대자루 하나를 등에 메고 있었다.
진일문이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하하하... 우리가 대형께 드리는 선물이오."
광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마대자루를 끌렀다.
진일문은 마대에서 나온 물건(?)을 보자 격동을 금치 못했다.
그 안에는 바로 장무라는 이름의 거지왕초가 혼혈을 찍힌 듯 얌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혈도를 풀어주자 장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광사를 발견하더니 사색이 되어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쿠, 나으리! 사... 살려만 주십쇼. 무엇이든 분부하시는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요."
아마도 그는 이 곳에 오기 전, 미리 광사에게 단단히 쓴맛을 본 모양이었다.
진일문이 그를 향해 물었다.
"장형, 나를 알아 보겠소?"
장무는 눈알을굴리더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 글쎄요....... 어디서 뵌 분 같기도 하고......."
"장형, 당신은 나를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당신을 잘 아오."
"그, 그것이......."
"몇년 전 당신들의 구역을 침범했다 하여 뭇매를 맞았던 한 소년이 있었소. 그리고 그는 가지고 있던 주머니를 뺏겼소. 바로 왕초인 당신에게 말이오."
진일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격앙되고 있었다.
"그 때 그 소년은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소. 꼭 물건을 찾으러 오겠다고, 만일 잃어버리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이오. 심지어 정신을 잃도록 두드려 맞으면서도 그는 계속 울부짖었었소. 어떻소? 이 정도면 기억이 나오?"
장무의 안색이일순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럼... 당시의 그 지독한 꼬마놈이......."
말하다 말고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 자체가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애써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소, 당신이 말하려던 그 지독한 꼬마가 바로 나요. 그리고 약속대로 나는 물건을 찾으러 왔소. 이젠 돌려주시오."
"아......."
장무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실 그는 이제껏 그 때의 일을 전혀 염두에 두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오늘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장무의 눈이 공포감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담은 채 진일문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진일문이 말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물건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당신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게 하겠소. 하지만 그 물건이 혹시라도 유실되었다면......."
스읏!
진일문은 손으로 탁자의 모서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헉!"
장무는 보았다.
놀랍게도 단단한 탁자의 한 귀퉁이가 소리도 없이 싹둑 잘라져 나가는 것을.............
그것은 마치 예리한 칼이라도 휘두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우우우!"
장무는 자신의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는 지금까지살아오는 동안 이렇듯 맨손으로 탁자를 베어내는 사람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이어지는 진일문의 음성이 그에게는 흡사 꿈결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바로 이 탁자와 같은 꼴이 될 것이오."
그것은 장무에게 있어 곧 염라대왕의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이마를 땅에 박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무... 무엇이든 다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소인이 그 동안 모은 전 재산도......."
진일문이 차갑게 그 말을 잘랐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그 물건이오. 또한 그것의 가치는 당신의 전 재산은 물론 당신의 목숨 열 개를 합친다 해도 상쇄될 수 없소. 당신이 이 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물건을 내게 돌려주는 것뿐이오."
"으으......."
장무의 살찐 이마와 뺨으로 식은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는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자신이 전날에 무엇을 취했었는지도 몰랐다.
장무는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기억을 되살려 보려 했다.
자신의 둔한 머리를 저주하면서 잠깐 동안에 평생토록 머리를 짜낸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진일문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를 지켜보았다.
실상 상황이 역전되었다 해서 장무 따위의 하류배를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진일문의 본심이었다.
그런데 문득 기현상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게도 장무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허옇게 세어버린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일이......?"
곁에 있던 광사가 고리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환사가 입맛을 쩍 다시며 낮게 소근거렸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아까운 법이지. 저 작자는 지금 살아 보겠다고 심력을 너무 소모하는 바람에 저렇게 된 걸세. 잘 보게, 주름살도 금새 늘어나 버리지 않았나?"
"허허헛, 참!"
광사는 일편 재미있다는듯 묘한 웃음을 흘려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엾게도 일지시간에 폭삭 늙어버린 거지왕초가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환성을 질렀다.
"기, 기억났소이다!"
그는 그 말을 한 뒤,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아!"
진일문의 얼굴에 처음으로 한 가닥 희색이 떠올랐다.
그에 반해 환사는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녕 못말릴 위인이로고! 저 꼴이 되고도 삶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다니......."
이윽고 혈을 누르자 혼절했던 장무가 깨어났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것은 가죽 주머니로 푸... 푸른 옥으로 된 목걸이와... 빛바랜 종이... 그리고 한 장의 비단 손수건이 아닙니까?"
"그렇소! 지금 가지고 있소?"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장무의 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다.
"으악!"
장무는 대답 대신 냅다 비명을 질렀다.
난생 처음 어깨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놀란 쪽은 오히려 진일문이었다.
그는 재빨리 장무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고소를 지었다.
'으음, 내가 지나치게 흥분을 했던 모양이군. 본의 아니게 손에 진기를 싣다니.......'
진일문은 한결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빨리 말하시오. 어디다 두었소?"
"그... 그것이......."
장무의 얼굴에난처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자 진일문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혹... 잃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이오?"
왕초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중 목걸이는 어쩌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두 가지 물건은......."
진일문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 두 가지가 어쨌단 말이오?"
"버... 버렸습니다. 필... 필요 없는 것이라서 그만......."
"뭣이? 버렸다고?"
진일문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그는 이 순간 마치 존재의식마저 위협받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고 있었다.
자신의 혈육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타인에게는 단지 필요없어서 버려지는 물건으로 취급된 것이다.
그는 당장에 피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심경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두 가지 물건이란 어떤 것이었소? 그리고 어디다 버렸소?"
왕초는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더듬거렸다.
"나... 낡은 종이와 손수건... 입지요. 그건... 비운교(飛雲橋) 아래에다가... 버렸습니다요......."
"맙소사!"
진일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비운교라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중문가의 개천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리였다.
그 곳에 버렸다면 찾을 희망은 전무했다.
오염된 하수 속에 버려진 물건이, 그것도 몇 년이 흘러버린 지금에까지 온전히 보관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목걸이는, 그것은 어디 있소?"
진일문의 음성은 이제 무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을 접한 환사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 안에 내포된 섬뜩한 살기(殺氣)를 감지해낸 것이었다.
장무 역시 본능적으로 이를 느꼈다.
그는 공포에 질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대꾸했다.
"그것은... 군옥원의 해교아(海 兒) 년에게 선물로......."
그 순간, 장무는 볼 수 있었다.
진일문의 장삼이 바람도 없는데 마구 펄럭이는 것을. 어디 그 뿐인가?
찢어질듯 부릅떠진 그의 눈에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광채가 흘러 나왔다.
우드득!
뼈 마디 부딪는 음향과 아울러 진일문의 주먹이 은연 중 허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그는 격노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통한과 비애가 뒤범벅이 된 것이었다.
물건이 버려진것만도 참을 수 없거늘, 비천하기 짝이 없는 여인에게 넘겨졌다니 실로 피가 거꾸로 치솟을 노릇이었다.
해교아는 창녀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을 목걸이.......
수많은 사내들이 밤마다 싼값을 치르고 그녀를 사서 정액을 쏟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걸이는 바로 그들의 더러운 입김과 땀에 젖어 그 순간들을 치루어야 했을 게 아닌가?
진일문은 빙긋웃었다.
"당신을 고통없이 죽여 주겠소.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요."
말.
그것이 끝났을때였다.
가볍게 그의 우수가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중지는 정확히 장무의 미심혈을 찔렀다.
팍!
피도 비명도 없었다.
단지 장무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을 하얗게 까뒤집으며 꼬꾸라졌다.
마침내 죽은 것이다.
그것도 지난 날 자신이 괴롭혔던 한 소년에 의해.
진일문은 굳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부릅뜬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피를 뚝뚝 흘려낼 것만 같았다.
"대형......."
보다 못한 환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이 채 이어지기도 전, 진일문이 냉랭하게 말했다.
"시체를 처리해 주시오. 나는 다녀올 데가 있소."
진일문의 신형이 미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환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덧 그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대형!"
환사는 크게 부르며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러자 맹사가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를 막았다.
"뒤쫓지 마라."
"하지만......."
환사는 걱정스러운듯 미간을 모았다.
맹사가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대형의 신법을 보지 않았느냐? 저 정도면 혼자서도 아무런 위험이 없을 것이다. 비록 흥분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평소 저분의 냉철한 판단력을 믿어 보기로 하자."
맹사는 앞을 못보는 대신 소리로 진일문의 신법이 어떤 수준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의 뒤를 이어 기사와 색사도 방안으로 들어왔다.
다섯 명이 다 모인 자리에서 환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함께 지내오면서 대형의 침착하고 진중한 성품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었소. 그러나 저토록 노하신 모습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는 말꼬리를흐렸다.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 곳에 있는 사람 치고 진일문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환우오사는 하나같이 무거운 침묵에 잠기고 말았다.
와중에서도 그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한 쪽은 진일문을 신뢰하는 만큼 조용히 앉아 기다리자는 의견이었고, 또다른 한 쪽은 따라가서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환사의나직한 한숨이 침묵을 깼다.
"이번 일로 나는 또한번 실감했소. 대형의 존재가 우리들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군옥원(群玉院).
금릉에서도 이름난 청루이다.
이 곳은 밤이 되면 비로소 활기를 찾는다.
홍등(紅燈)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면서 호객 행위를 벌이기 때문이다.
이 군옥원이 유명한 데에는 꼭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상인, 하급관리, 파락호 등이 주요 고객으로서 화대가 싸다는 잇점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기원의 여인들에 비해 이 곳의 여인들은 대부분 꽃으로써의 황금기를 넘었다.
대신 하룻밤에 열 명 이상의 사내들을 받아들이는 여인도 있었다.
한 사내가 지금 막 군옥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매파에게 대뜸 한 덩어리의 은자를 던져 주었다.
"해교아를 원하오."
그가 말한 것이라고는 이 한 마디뿐이었다.
어쨌든 매파는입이 딱 벌어졌다.
이 곳을 찾는 손님들 가운데 이처럼 영준한 청년을 본 적도 없었지만 이만한 은덩이를 받아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 사내란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그는 장무를 처단한 뒤, 그 길로 목걸이를 찾기 위해 이 곳을 방문했다.
매파는 주름으로 만면에 파도를 일으키며 민망할 정도로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여부가 있나요?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공자. 호호호......."
그녀는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야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의늙은 얼굴에는 몹시도 난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손을 비비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호... 글쎄, 그 아이가 그만 먼저 손님을 받았지 뭐유? 이걸 어쩌나? 미안해서......."
진일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워낙 조급한 심정이어서일까?
그는 웬지 일이 꼬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품에서 은덩이 하나를 더 꺼내 주었다.
매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낚아채듯 은덩이를 받은 후, 금새 태도를 바꾸었다.
"호호호... 해교아, 고년이 오늘 복이 터진 게로구만. 이렇게 인심이 후한 공자님의 총애를 받게 되었으니 말야. 호호호... 공자께선 잠시만 기다리시우. 내 얼른 그 손님을 다른 년에게 돌리고 올 테니."
진일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했던가?
그 말이 정녕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원래 이런 청루에도 나름의 법칙은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중간에서 손님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도 은덩이를 들이미니 즉각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대략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매파가 희색을 띄며 달려왔다.
"호호호... 됐수, 되었다구요!"
진일문은 즉시매파를 따라 기다란 회랑을 지나게 되었다.
그가 회랑을 가로지르는 사이, 양쪽에 죽 늘어서 있던 방사로부터 야릇한 신음을 비롯하여 남녀의 교접시에 일어날 듯한 여러 가지 소음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보다더 견디기 힘든 것은 퀘퀘하고 역한 냄새였다.
그것은 물론 싸구려 지분 냄새, 그리고 땀에 젖은 남녀의 몸뚱이가 뒤엉켜서 풍겨내는 저속한 육향이었다.
이윽고 진일문이 안내된 곳은 회랑 끝에 있는 별채였다.
"호호호... 공자께는 특실이 어울릴 것 같아서 이 늙은이가 신경을 쓴 것이라오."
매파가 입구에서 자못 생색을 냈다.
"어서 들어 가시구려. 호호호... 그 아이는 공자를 잘 모시기 위해 지금쯤 열심히 목욕을 하고 있을 게유."
'목욕?'
진일문은 그 말에 오히려 더 꺼림칙해지고 말았다.
생전 처음 와 보는 청루인 데다가 만나고자 하는 창녀가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은근히 구토가 일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적이 뚜렷한 이상 이제 와서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게 기침을 했다.
안으로부터 한가닥 코먹은 음성이 대꾸했다.
"호호호... 아이, 어서 들어오시지 않고 뭘 해요?"
진일문은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이를 악물었다.
'내가 못들어갈 것이 무언가? 물건만 찾으면 될 것을.......'
마침내 그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의외로아취(雅趣)가 있었다.
바닥에는 양탄자를 표방한 주홍색의 천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제법 그럴 듯한 장식도 걸려 있었다.
'특실이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군.'
진일문은 고소를 짓는 한편, 굳은 듯 그대로 서 있었다.
해교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귀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침실 옆에 있는 목문(木門)의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저 곳이 욕실인가 보군.'
그 곳으로부터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나으리, 천첩의 등을 좀 밀어 주시겠어요?"
'맙소사!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진일문은 기가막혔다.
비록 남녀가 유별하기는 해도 그에게는 여인과 함께 욕실에 있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네 명의 시중을 받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어디까지나 자의가 아니었고, 그 당시에도 그는 여인의 등을 밀어주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과연 이런 요구에 응하는 사내도 있을까?'
이것은 그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청루를 찾는 손님인즉 해교아가 이런 말을 하면 즉시로 발가벗고 뛰어들게 되어 있다.
진일문은 잠시괴상한 표정이 되어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아! 그렇다. 목욕을 하고 있다면 목걸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로서는 어차피 여인의 알몸에는 관심도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목걸이를 회수하는 것 외에는 여념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욕실로 통하는 나무문을 열었다.
진일문을 맞이한 것은 먼저 자욱한 수증기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방에 하나의 커다란 물통이 있었는데, 바로 그 물통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특실은 본래 각별한 취미를 가진 손님을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손님들 중에는 더러 돈이 많으면서도 일부러 이런 곳을 즐겨 찾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자들의 속셈이란 대개 뻔 했다.
고급의 기루에서는 비싼 값을 치르고도 품위를 지켜야 했지만 이런 청루에서야 그 반만 지불해도 온갖 해괴한 취미를 다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손님이 왔을 때 군옥원에서는 이 별채로 모신다.
이 곳의 설비가 대체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욕실은 바닥이질 좋은 향나무로 짜여져 있었다.
욕조도 마찬가지로 향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뜨거운 물이 담겨있다 보니 절로 은은한 향기가 풍겨나왔다.
하지만 그 안에는 색객(色客)을 위한 갖가지 물건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언뜻 기이한 모양의 나무침대를 위시하여 용도가 불분명한 의자 등이 눈에 띄었다.
진일문은 그런것들이 무엇에 쓰이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욕실치고는 희한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따름이었다.
그는 수증기가그득한 욕조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무통 위로 여인의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러자 그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아버님이 어머니께 정표(情表)로 주신 유물을 찾게 되는구나.'
진일문은 마치 이끌리듯 나무통으로 다가갔다.
여인은 그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여인은 곧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매파의 말에 의하면 젊고 준수한 공자님이시라던데......? 호호호... 뿐만 아니라 인심도 아주 후하시다고요?"
진일문은 그 때까지도 여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인의 목을 살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치렁치렁한 흑발이 늘어져 있어 목걸이가 있는지의 여부는 더더욱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비천한 창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부가 희고 깨끗하다는 사실이었다.
"아이, 뭘 하세요?"
해교아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스스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진일문은 그녀의 유방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놀랍도록 커다란 유방이었다.
주홍빛을 띈 젖꼭지는 잔뜩 곤두서 있었다.
해교아는 확실히 꽃다운 처녀는 아니었다.
삼십세가 가까워 보였으며 웬지 풍상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다.
눈꼬리에도 이 방면에의 오랜 경험을 거친 음분함이 다분히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아름다웠다.
천하절색은 못되어도 나름대로 상당한 미색을 지닌 여인이었다.
'으음, 저 정도면 거지왕초가 반할 만한 여인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선물을 줄 리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진일문이 해교아를 보고 느낀 소감이었다.
그런데 정작 재미있는 것은 해교아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진일문을 보더니 대뜸 입을 딱 벌리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녀의 눈은 그의 얼굴에 못박힌듯 고정되어 버렸다.
잠시 후.
해교아의 입술이 은연 중 슬쩍 벌어졌다.
그녀의 눈꼬리에도 역시 기쁨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몸을 파는 창녀들이 의례 그러하듯 해교아는 늘상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아무하고나 동물적인 행위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열정은 있었다.
그녀는 간혹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스스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다만 아쉽게도 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를 찾는 작자들이란 대개가 건달이거나 하급의 관원, 또는 시답지 않은 늙은 상인 등이었다.
'정말 잘 생긴 사내야!'
해교아는 내심같은 중얼거림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상대방에 대해 매파로부터 귀띔이 있긴 했으나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상 진일문의용모는 준수할 뿐더러 남다른 면이 있었다.
눈썹이 진하고콧날이 반듯해 남성적인 면을 느끼게 하면서도 유독 선이 아름다왔다.
특히 그의 입술은 남자로서는 드물게 매우 붉었으며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기이한 감상을 자아냈다.
그러나 진일문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눈이었다.
워낙 큼직해서 서늘한 느낌을 주기도 했거니와 오랜 인고를 거친 탓인지 열정과 더불어 짙은 우수가 담겨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단순한 봉목이었는데 살짝 찌푸리니 절로 신비감이 묻어 나왔다.
해교아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나으리!"
그녀는 마침내팔을 뻗어 진일문의 목을 와락 끌어 안았다.
'윽!'
진일문은 아연실색했다.
갑작스럽게 봉변(?)을 당하게 되자 그는 하마터면 그녀의 뺨을 칠 뻔했다.
"흐응......!"
해교아의 달뜬신음이 그를 은근한 분노로 몰고 갔다.
'추잡한!'
심중에서는 순간적으로 이런 부르짖음마저 일고 있었다.
진일문은 가까스로 이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것... 놓으시오."
하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해교아가 누구인가?
"호호호호......."
그녀는 오히려더욱 몸을 밀착시켜왔다.
물에 젖은 여체가 매달리니 진일문의 옷도 금새 젖고 말았다.
"놓지 않으면......."
그는 해교아에의해 본의 아니게 뒤로 밀려가며 스산한 음성을 흘려냈다.
여차하면 손을 쓸 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진일문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는 곧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고, 그 곳은 바로 나무침상이었다.
"이, 이런!"
그는 부드러운천의 감촉이 등에 느껴지자 전율이 일었다.
이어 뭐라 외치려 하자 해교아의 손이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호호... 미남 나으리, 그럼 이 곳에 와서 무얼 하려고 했나요? 자, 그렇게 부끄러워 하지만 말고... 흐응......."
그녀는 완전히곡해를 하고 있었다.
당황해 하는 그가 재미있어 죽겠다는듯 키득거리며 슬그머니 올라탔다.
'실수다! 차라리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얘기해 볼 것을.'
진일문은 내심통렬히 부르짖고는 상황을 돌이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역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교아의 거대한 유방에 얼굴이 푹 파묻혀 버렸으니 어쩌겠는가?
말을 꺼내는 것은 고사하고 숨이 막혀서 그야말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으... 으음......."
진일문은 호흡이 곤란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해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해교아는 그가흥분해 있는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까르륵거리며 그 큰 젖가슴으로 그의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으음!"
진일문의 입에서 또다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이번의 신음성은 방금 전과 내용이 사뭇 달랐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모든 것이 혼탁해져 버린 데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가 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냉철하던 이성도, 예리한 판단력도 모두 흐려지고 있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단 한 가지, 전신이 나른해지는 느낌뿐이었다.
해교아는 마침내 능숙한 손길로 진일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태초의 모습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진일문이 그렇게 되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더구나 해교아의 손이 교묘하게 움직일 때마다 그가 느낀 것이 쾌감이었다면 믿겠는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나무통에서는 계속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향나무 특유의 향기도 점점 짙게 풍겨나오고 있었다.
해교아.
그녀는 자신이습득하고 있는 온갖 기교를 다 동원해 진일문을 애무했다.
그것은 오랜 청루의 생활이 가져다 준 이력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흥분이 부른 결과라고 해야 옳았다.
진일문에게 반해 버린 해교아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욕망을 발산하고자 제 스스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흐으응......."
그녀가 흘려낸땀방울로 인해 두 남녀의 나신이 함께 번들거렸다.
또한 한 덩이로 엉켜있는 두 개의 육체는 어느 덧 뜨거운 열기를 발산해 내고 있었다.
해교아의 몸이여러 번 자세를 바꾸었다.
그 때마다 진일문은 정신이 아득해져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발하곤 했다.
그는 천정이 빙글빙글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진일문은 얼굴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부딪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본 순간, 정지되어 있던 그의 의식이 암울하게 외쳤다.
'목걸이! 나의.......'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그것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 때, 그의 귀로 어렴풋이 한 가닥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그것은 자신과 무관한, 아주 먼 느낌이었다.
얼굴 위로 뜨끈한 액체가 뚝뚝 떨어져내린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그는 경황 중에도 끈적한 감촉과 더불어 비릿하고도 역겨운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피!'
마음 같아서는벌떡 일어나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몸 위에 엎드려 있던 해교아가 옆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불현듯 한 여인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웃고 있었는데 해교아가 아니었다.
'색사(色邪).......'
그것 뿐, 진일문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진일문은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요미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요미미의 그런 태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후후... 세상사란 것이 힘이나 상리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다더니....... 하마터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다. 수치스럽게도 한낱 청루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하지 않았던가?'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었다.
만일 요미미가 때 맞추어 등장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는 발가벗겨진 채 땅 속에 생매장되었을 것이다.
사실 진일문이그처럼 고역을 치른 이유는 군옥원의 무서운 함정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해교아가 바로 그 하수인이었다.
발단은 매파였다.
그녀는 진일문이 서슴없이 은덩이를 내놓는 것을 보자 대부호의 자제쯤으로 여기고는 나머지 은자를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청루에서는 비밀리에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특히 떠돌이 상인이나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자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욕실의 나무통과 바닥에는 일종의 최음제가 뿌려져 있었다.
뜨거운 물이 닿으면 향기와 함께 효능을 발휘하는 특수한 것으로써 진일문을 여지없이 위기에 빠뜨렸다.
해교아가 그에게 반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를 실컷 농락하고 난 후, 그가 지닌 은자를 빼앗으려고 한 것이다.
천행으로 요미미가 그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녀는 별호가 색사인만큼 그런 일에는 누구보다도 밝았다.
그녀는 애초 진일문이 혼자서 청루로 갔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를 따라왔다가 결국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내게 되었다.
요미미는 극적인 순간에 해교아의 목을 베어 버렸다.
진일문이 얼굴에 느꼈던 액체는 바로 해교아의 피였다.
객잔으로 돌아오면서 요미미는 목걸이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진일문에게 단지 이렇게만 말했다.
"물건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대가."
진일문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감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없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고맙소."
요미미는 그를향해 가볍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이제 천하를 울렸던 그 색녀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먹구름 사이에서 비치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실제로 요미미는 진일문과 생사지교를 맺은 이후로 극단적으로 행동을 절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일문이 특별한 당부를 결코 잊지 않았으며 이를 철저히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를이렇게 변화시켜 놓은 진일문은 막상 어떠했는가?
원인이야 어쨌든 그는 요미미의 앞에서 알몸으로 추태를 보였다는 자책만은 줄곧 면할 수가 없었다.
이외에도 진일문을 괴롭힌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자각이었다.
'나는 명색이 이들의 대형이 아닌가?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 따위 저급한 술수에 넘어가고 말았으니....... 이들은 아마도 이번 일로 크게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그를 위로한 것은 오히려 요미미였다.
"대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이런 경험은 대체로 좋은 약(藥)이 되니까요."
진일문은 그 말에 감격해마지 않았다.
"고맙소. 정말......."
요미미는 생긋웃으며 덧붙였다.
"대가, 절 미미라고 불러 주시지 않겠어요?"
실상 요미미와진일문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의 이 제안은 그로 하여금 음울했던 심정을 털어버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오, 미미."
두 사람은 나란히 객잔으로 돌아왔다.
객잔에서는 사사가 눈이 빠지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색사 요미미를 보내 놓고도 염려를 떨치지 못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자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요미미는 군옥원에서 있었던 기변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대신 그녀는 밝은 음성으로 이렇게 상황을 전했다.
"대가의 물건은 의외로 쉽게 찾았어요. 호호호...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소매는 대가가 여인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대가가 들어가시자 군옥원이 온통 난리더군요."
환사가 재빨리맞장구 쳤다.
"쩝! 부럽군. 나도 한 때는 그랬었지. 천하의 여인들이 내 꽁무니만 줄줄 따라 다녔으니까."
기사의 날카로운 혓바닥이 이를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크크크... 만생, 착각도 지나치면 병이니라. 네가 원한다면 거울을 가져다 주겠다. 네 면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이나 하고 거짓말을 해라."
"뭐, 뭣이!"
환사 만생의 얼굴이 금새 울그락푸르락 해졌다.
"하하하하......."
좌중은 금새 웃음의 마당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진일문만은 웃지 못했다.
찔리는 바가 있는지라 그들의 농담에 끼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 때, 맹사가 무엇을 느꼈는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대형은 앞으로 각별히 조심하셔야겠소이다. 강호의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소. 여자와 어린 아이, 또는 중과 늙은이를 조심하라고. 보이지 않는 칼은 방비하기가 어려우며 방심하는 곳에는 항시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이오. 부디 이 속담을 잊지 마십시오."
진일문으로서는 정녕 뼈에 사무치는 말이었다.
그는 맹사에게도 역시 고마움을 느끼며 대꾸했다.
"명심하겠소."
이제 더 이상 금릉에 머물 일은 없었다.
진일문은 은천서원을 찾고 싶었으나 곧 마음을 돌렸다.
그래 보아야 쓰라린 고통만 더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그 곳에 또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움은 일체 없으되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진일문은 금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의 목에는 부친의 신물인 예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의 두번째 목적지는 외가(外家)가 있는 항주(杭州)였다.
뿌리를 찾고자하는 집념은 한순간도 진일문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동안 헛되게 낭비한 시간들을 그는 통탄하고 있었다.
그는 오사와 떨어져 가기로 했다.
그것은 오사가 무림의 주목을 받는 위인들이기 때문이었다.
함께 다니다 주의라도 끌게 되면 피차에 좋을 일이 없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오사와 재회할 장소와 날짜를 약정한 뒤, 항주의 전당강(錢塘江) 가에 있다는 양가장(楊家莊)을 향해 출발했다.
첫댓글 이들의 행로가 궁금합니다. 즐감
즐감요!
잘읽고갑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추운 날씨에 몸건강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했습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