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퇴계 이황과 쌍취한 권철과의 만남에 대한 글을 실어봅니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시골로 내려간 퇴계를 일부러 찾아갔는데 채식 위주로 검소하게 살던 퇴계가 음식을 가져오자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아 몇 숫갈 뜨는 둥 마는 둥
물리고는 돌아가겠다면서 내게 한 말씀 충언을 들려 달라 하니 퇴계는 이 음식은 백성들이 먹는 음식인데 맛이 없다며 상을 물리는 모습을 보고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는 뼈아픈 충고를 했답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정치에 심열성복(心悅誠服)하겠나이까. 대감께서는 그 점에 각별히 유의하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부끄러워진 권철은 집으로 돌아가 가솔들에게 절대로 좋은 음식을 지기 못하게 하고 검소하게 살았답니다. 사업해서 성공하고 조금 위치가 높아졌다고 백성들과 다른 삶을 산다면 누가 그들을 존경하겠습니까?
나부터 검소한 삶을 습관화하고 가족들에게도 가르쳐서 후세에 부끄럼 없는 삶이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민동락’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孟子)》에서 유래되었다.
퇴계 이황선생과 영의정 권철 대감의 逸話
퇴계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양성한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일찌기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쌍취헌 권철(雙翠軒 權轍)이 서울서 퇴계를 만나보고자 도산서당을 찾아 내려오게 되었다.
권철은 그 자신이 영의정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인 데다가 그는 후일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만고명장(萬古名將)의 이름을 떨친 권률(權慄) 장군의 친아버님이기도 했었고, 선조 때의 명재상(名宰相)이었던 백사 이항복(白沙李恒福)의 장인영감이기도 했다.
권철은 워낙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남달리 투철하여 불한당(不汗黨)이나 다름없었던 소년 이항복의 사람됨을 진작부터 알아보고, 온 門中이 극력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우겨 사위로 삼은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그처럼 견식이 탁월한 권철이 퇴계를 추앙하는 마음에서 서울서 멀리 예안까지 퇴계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서울서 예안까지는 5백 50리의 머나먼 길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 머나먼 길에 일개 사숙(私塾)의 훈장을 몸소 찾아온다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철은 관계(官階)를 초월하여 大學者인 퇴계를 친히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권철은 초헌(?軒,종이품이상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을 타고 국도를 따라 안동까지 내려오는 데는 별로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동에서 도산서당이 있는 예안까지는 길이 험하여 초헌을 타고 오기가 몹시 불편하였다. 그래서 감영에서는 권철 대감을 편히 모시기 위해 안동 고을에서 도산까지의 길을 새로 확장 해야만 하였다.
권첩 일행이 도산서당에 도착하자 퇴계는 동구 밖까지 예의를 갖추어 권철을 융숭히 영접하였다. 그리하여 두 學者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끼니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 반찬은 콩나물국과 가지 잎 무친 것과 산채뿐으로 고기붙이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 아닌가.
퇴계는 평소에도 제자들과 꼭 같이 草食생활만 해 왔었는데 이날은 귀한 손님이 오셨기 때문에 山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북어를 특별히 구해다가 무쳐 올렸던 것이다. 평소에 산해진미만 먹어오던 권철 대감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 없었다.
그는 그 밥을 도저히 먹어낼 수가 없어서 몇 숟갈 뜨는 척 하다가 상을 물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는 다음 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놓았다. 산골인 관계로 고기를 구할 수도 없었지만,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점도 없지 않았다.
권철 대감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床을 물려버렸다. 주인이 퇴계가 아니라면 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가 워낙 스승처럼 존경해 오는 사람이고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 대감은 도산서당에 며칠 더 묵어가고 싶어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은 예정을 앞당겨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 대감은 작별에 앞서 퇴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만나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기념으로 선생은 좋은 말을 한 말씀만 남겨 주시지요" "촌부가 대감 전에 무슨 여쭐 말씀이 있겠나이까. 그러나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대감에게서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퇴계는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을 못해드려서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 前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 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습니다. 농부들이 먹는 음식은 깡 보리밥에 된장찌개 하나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되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정치에 심열성복(心悅誠服)하겠나이까. 대감께서는 그 점에 각별히 유의하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퇴계가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누구도 말 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다. 권철 대감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는 충고이십니다. 나는 이번 행차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집에 돌아가거든 선생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성인이 능지성인(能知聖人)이라고나 할까. 권 철 대감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퇴계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권 대감은 서울에 올라오자 가족들에게 퇴계의 말을 자상하게 전하는 동시에 그날부터는 퇴계를 본받아 일상생활을 지극히 검소(儉素)하게 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 중에는 퇴계 선생처럼 직언을 하는 사람도, 권 정승처럼 직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민은 불안하다.
[역사의 교훈]
☆ 세월은 흐르고 변해도 진리는 변함이 없을터 작금의 우리나라에는 이런 지도자와 직언할 유능한 인재들은 없는가?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