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아내와 딸은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
옥천은 김옥균의 부인과 그의 딸이 이곳 아전 집의 노비로 팔려와 고난의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친한 일본인에게 보낸 편지가 1895년 3월 7일자 일본 신문 《시사신보》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갑신 시월 열이렛날 밤, 이 큰 변이 일어나 일이 어떻게 되어 나갈지 가슴 조이고 있었던지라, 두 밤을 새운 열아흐렛날에는 소신을 잡아 가두라는 명이 내렸다 하거늘 세상 일이 이렇게 되면 숨는 것이 도리임을 아는 바이오나 이렇다 겁을 먹는 것은 아니며, 그저 겁결에 조급히 일곱 살 먹은 딸년을 업고 오래 살아 정든 집에서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
이 곳 저곳 아는 사람 찾아다녀 봤지만 지금은 세상에 의지할 곳 없는 모녀인지라 따스한 말 한 마디 해주는 이 없고, 그저 허황히 길을 헤매다가 그날은 저물었습니다.
친정을 멀리 1백리나 떨어졌으려니와 갈 길도 잘 몰라 그날 밤은 길가의 빈집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길 가는 이를 기다렸다가 친정에 가는 길을 묻고 또 가다가 묻고 하노라니, 지친 몸 뉘일 새도 없고, 나를 쫓는 포졸들은 나에 잎서 친정 문 앞에 밀어닥쳤던 것입니다.
형세가 이리하여 ‘우리 운명도 다 했나 보다.’고 일단은 체념도 했사오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어린애 다시 들추어 업고 친정을 등지고 이름도 모르는 마을들을 발 가는대로 맡겨 충청도 천안의 시집에 찾아들었던 것입니다. 생각했던 대로 이 집도 민족閔族이 노리던 터라 포도청의 포졸들이 옹기종기 망을 보고 있는지라 바로 발길을 돌려 배고파 울어대는 딸을 달래가며 친정 선조의 묘소가 있는 옥천으로 발길을 돌렸던 겁니다.
시월도 가고 동짓달에 접어들면서 그 땅에 이르러 아는 이의 집에 숨어 있었사오나 운이 없어 옥천 현감에게 눈치를 채어 을유, 정월 열 아흐렛 날 한 계집 염탐꾼과 포리 때문에 포승에 얽히우는 치욕을 당해 옥천옥사에 갇힌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랜 옥중의 쓰라림을 견딘 끝에 정鄭모라는 아전 집에 비녀婢女로 하천 되어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정모란 분은 친정아버지에 입사한 적이 있는 노인으로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여 따로 한 집을 새로 짓고 비녀로서가 아니라 힘닿는 대로 극진히 대해 주어 우리 모녀는 4년 동안 이와 같은 목숨을 이을 수 가 있었나이다. 하오나 이 동안의 어려움이란 비길 나위가 없고,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온갖 괴로움을 고루 참고 이보다 더한 고생도 있으려니 마음을 달래어 살았사오나 숙업宿業을 못 다하고 여액餘厄을 못 다 치루지 못했기 때문인지 집주인 정씨가 현청縣廳의 관금을 횡령했다는 죄과로 가산이 남김없이 몰수되고 우리 모녀는 다시 몰수된 재산품목에 끼어 팔려 나갔던 것입니다.
오래 헤맨 끝에 있게 된 집은 좁기 그지없는 초막으로 그저 비와 이슬을 가릴 뿐이며, 손에 익지 않은 삯품팔이로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왔으며, 어느 날은 하루에 모녀가 한 그릇 밥으로 살기도 어려워 세상 살 여망을 잃고 몇 번 죽을 마음을 먹고서 이 고생을 면하려 했사오나 옆에 붙어 온기를 나누고 있는 딸년의 티 없는 얼굴을 보노라면 나 죽은 후 이 아이의 갈 길이 먹혀 마음을 되잡곤 했사오니, 죽으랴 죽을 수 없고, 살랴 살길 없어 반 넘어 미쳐, 반 넘어 죽은 채, 그 한 해는 저물었나이다.
그 시대의 뛰어난 천재이자 혁명가였던 김옥균의 아내와 딸이 혁명의 실패로 인해 노비가 되어 주인의 재산품목에 끼어 이 땅을 떠돌았던 것이다.
김옥균의 아내가 옥천에 있을 때 일본식 선술집 같은 가게에서 일을 딸과 함께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보내고 있었다. 그때 김옥균을 흠모했던 병참부 사령관 육군 보병소좌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이 박영효의 조선인 통역관 이윤태李允呆라는 사람과 백방으로 수소문해 옥천에서 찾아냈고, 그 뒤 김옥균의 아내와 딸은 내무대신인 박영효의 비호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김옥균이 조선정부로부터 특사의 명이 있자 후쿠자와 유키치씨는 당시 국회의원이(代議士)었던 문하생 고가네이 곤자부로小金井權三郞의 도한渡韓을 기해, 그에게 김옥균의 위패를 김씨 유족에게 보내주길 부탁했다.
그가 김옥균의 아내를 만난 것은 1895년 5월 10일 전동典洞 거리에 있는 유진근兪鎭瑾의 집이었다. 그 집은 미망인의 친정으로 유진근은 그의 동생이었다. 구스 겐타쿠 葛生東介가 지은 <김옥균 , 인문사 윤상현 편>>에 실린 고가네이 곤자부로小金井權三郞의 회고록을 보자,
“미망인은 금년 47세로, 키가 크고 피부가 거무스름하여 언뜻 보아도 그녀가 현명한 부인임을 알 수 있으나, 얼굴빛에 떠도는 초조함은 12년간 떠돌며 숨어 지낸 모습임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조선 관습 상 부녀자가 이처럼 외국 남자를 마주 대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로, 미망인은 처음 나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 없이 말씨가 명석하고, 행동거지는 침착하니, 진정 김옥균씨의 영규令閨(남을 놓이어 그의 아내를 이르는 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여장부였다. 그녀의 딸은 방년 29세로, 맑은 눈동자에 새하얀 치아, 그리고 몸은 가냘프고 피부는 희며 어머니를 닮아 키가 컸다. 또한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는지 그 기상도 굳세며, 선천적으로 영리한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가 대화할 때는 항상 자신의 몸을 낮춰 어머니 뒤쪽에 가려 비스듬히 앉아 손님을 대하는, 그 초연하고 다정다한多情多恨한 모습이 춘화추월春花秋月에는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느끼는 바가 컸다.
모녀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여 오래된 하얀 옷도 몇 번인가 기우고 빨아 단정하게 입은 모습으로 다시 한번 우아한 인품을 느끼게 했다.
”살구나무의 가벼운 비단이 비로소 따뜻함에서 벗어났는데,
배꽃 핀 깊은 뜰에 절로 바람이 잦구나.”
모녀의 풍모를 이렇게 평한 그가 미망인과 나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작년 김씨가 흉변을 당한 보도를 접하고 난 이래, 그 지인 중에는 그를 위해 추모하며 공양하려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빨리 불단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불사를 드린 것은 아마도 우리 집일 것이다. 그러니 만일 김씨가 죽은 후에도 혼령이 있다면, 꿈속의 넋이라도 자신이 그리워하던 곳에 반드시 위패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김씨와 아주 친한 관계였기에 그의 조국에 가서 김씨의 유족을 만나 내가 김씨의 유족을 만나 내가 김씨를 생각하는 마음을 전하고 이 위패를 친히 미망인에게 드려야 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미망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지금 후쿠자와 선생의 귀한 제자인 당신을 만나는 것은 마치 남편의 은인인 선생을 만나는 것과 같이 생각되며, 또한 죽은 남편의 친구인 귀하를 만나는 것 역시 죽은 남편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마친 미망인은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터트리며 오열했다. 그 모습에 일행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망연자실한 채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지금 귀하에게 죽은 남편의 생사 전후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비통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감정이 이내 갚은 감정에 빠진 것을 부디 책망하지 말아 주시길,
이 몸은 정이 남아 있는데도 어찌 죽음을 참으라 하는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부족하나마 저희 딸이 남자였다면 저 멀고 험한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 가서 사려 깊은 선생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싶어도 여자의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생각하는 바를 전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음만 공연히 안타까울 뿐, 더욱이 그 당시에는 조선의 변란이 횡행할 때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에 언제 제가 당할지 염려되어 바람에도 걱정하는 신세이다 보니 편지 한 장 쓸 수 없었고, 이 변란 중에 겨우 목숨만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언제고 편지를 보내 선생께 용서를 바라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귀하가 다행히 소첩의 심경을 헤아려 주셨기에 선생에게 대신 사과해주오,. 실은 후쿠자와 선생의 후의는 죽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따님이 나이가 젊어 앞날이 창창하니 지금부터 자신의 뜻을 세워 도쿄로 유학을 떠나 훗날 조선 여자교육의 선구자가 되었으면 하니 부인의 고견이 어떠한지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쿄에 유학하게 되면 학비 같은 문제는 내게 여러 방법이 있으니 부인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 고가네이 곤자부로는 김옥균의 딸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신교육을 시켜 조선여자교육의 선구자가 되길르, 간청했는데, 김옥균의 아내가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그때 김옥균의 딸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신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역사의 격랑을 살다가 사람들, 그 몇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일보 일보 진전해 온 것이다.
2021년 2월 21일 밤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김옥균, 자객 홍종우, 옥천 청풍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