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은 식사 전후에는 되도록이면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 글을 읽다가 비위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글을 보면서 상당히 비위가 상했기에.. 너무 적나라한 내용들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교육에도 안좋아 청소년들이
이 글을 안봤으면 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런 추악한 기록들이 조선(중국)의 어두운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고 오랜 기간동안
(현재까지) 중국대륙에서 면면히 전수되어왔다는 것은 조선 문화의 진실을 알 수 있는 한 방편이기도 하지요
한국인 중에 백인문화나 일본문화를 야만의 문화라고 욕지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런 추악한 역사를 가진 조선문화는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묻고싶군요. 기근이 심하다고 농수산물을 더많이 수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지않고 사람 잡아먹는 것을 당연
시하는 중국(조선)의 문화에 대해서는 야만이라고 생각을 안하십니까?
저는 조선의 역사를 알아가면 갈수록 조선문화에 실망만 쌓여갑니다. 더러움과 식인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음식물과 나무젓가락에
뻔뻔하게 청산가리같은 독극물을 첨가하고 중국이 시장을 개방한 후에 중국의 싼 인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자국민들이 저임금의
고통속에 살고 있어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호감을 못 느낍니다. 오히려 해가되면 해가됐지..
나는 개인적으로 백인문화나 일본문화를 중국문화보다 더 선호합니다. 지금 한국인이 누리는 문화중에 음식과 전통의복과 가옥을 빼고
과연 우리문화 아니 조선 문화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죠? 조선의 문화가 찬란하고 우수했다면 시대가 바뀌었어도
그렇게 쉽게 전통문화를 버릴수가 없을겁니다. 분명히 조선의 문화에는 우리가 수용하기 힘들고, 불편하고 보편적이지 못하고
그리고 추악한 면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예전에 소위 ‘중국집’이라고 하는 중화요리집 음식 맛이 좋으면 그 집은 인육을 쓴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 적이 있었다. 현대문명의 시대에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 중국인들은 인육을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켰다. 흔히 중국문화라고 하면 찬란하고 호화로운 선진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내면에는 식인풍습의 어두운 일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또는 원수에 대한 복수로서의 식인행위는 다른 나라, 문명권에도 많이 발생한다. 한 예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과 정기룡 장군은 왜군의 생간을 내어 씹어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중국의 식인풍습은 그 시초가 이런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존재하며 또한 중국인들의 사고전반을 지배하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을 이해하고 원만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식인풍습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정치사에 얽힌 중국 식인풍습의 사례
식인풍습은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식인의 기록은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등장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것이긴 하지만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의 이야기다.
사마천의 사기,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는 중국왕조사의 대표적 폭군인 은(殷)의 주(紂)왕 이야기다. 그는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 정숙해 자신의 성적인 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해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인육을 소금에 절인 육젓)로 만들어 먹어버린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 또한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린다. 그 외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리는가 하면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하는 끔찍한 짓까지 저지른다. (후에 황비호는 격노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일화로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의 경우가 있다. 공자는 ‘해(윗글에서 언급)’를 무척 즐겨 이것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중국의 고전서인 예기, 동주열국지, 논어등에 언급) 그러나 그의 수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된 후 그 시체가 잘게 토막나 해로 만들어져 공자 자신의 밥상에 올라온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후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은 고대 이전부터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령들을 만들었다. 이 법령에는 ‘일벌백계’의 효과를 위해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살육의 형’이 규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름아닌 ‘식인의 형’으로서 정식으로는 주나라 시기의 율령부터 등장하지만 전 왕조인 은나라 때에 이미 죄수의 살점을 도려내 다른 죄수에게 먹이는 형벌이 존재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로서 식인형은 중국역사에 면면히 이어졌다.
한고조 유방은 팽월을 죽인 후 간장에 절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 양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신하를 삶은 뒤 그 국을 문무백관에게 내려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측천무후 집권시기에 탐관오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는데 군중들(내준신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어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명대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의 계략으로 처형당했는데 군중들이 몰려 와 그의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러 온 이들은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
(2) 일상사에 얽힌 중국 식인풍습의 사례
당나라 시대 이후로 식인풍습은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중국인 일상에 깊이 뿌리박힌 대중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힌 대중적인 소설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은 그들 특유의 식인풍습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싸움에 지고 도망가는 유비에게 자신의 아내를 죽여 그 엉덩이살로 음식을 만들어 바친 자의 얘기,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도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포가 잡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이 먹었다는 얘기 등이 나온다.
특히 수호지는 중국의 일상 식인풍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숨어 있다가 부자가 지나가면 뛰쳐나와 금품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데 씁니다. 뚱뚱한 자는 쇠고기 대용으로, 마른 자는 만두소로 만들지요." 이것은 ‘한지홀률’의 별호를 가진 ‘주귀’란 자가 양산박 법도를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소위 의적이라는 양산박 무리들은 사실은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극악무도한 악인들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송강의 아우인 ‘흑선풍’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난 후 그 인육을 먹곤 했는데 너무 많이 인육을 먹어서인지 눈알이 항상 붉게 충혈되었다고 한다. 무송이 유배가는 과정에서는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끔찍한 주점이 나온다. (이런 곳을 ‘흑점’이라고 한다.)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한 99가지 이유’ 라는 책에 이런 고사가 나온다.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살았는데, 때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곤 했다. 며느리는 시부모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놀라 친정으로 도망을 친다. 친정 아버지는 "누구 딸을 마음대로 잡아먹어!" 라고 분개했지만 후에 그 딸을 잡아먹은 건 친정 아버지였다.
과거 중국의 미식가(美食家)들은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해 즐겨 먹었다.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기까지 하다. 후대로 갈수록 맛으로 인육을 먹는 습관은 대다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인육을 장에서 공공연히 사고 팔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맛을 즐기게 되었다.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중국 식인풍습의 절정은 당나라 시기로, 당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당나라는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으며 끊임없는 귀족들의 특미(特味)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인육을 요리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는데, ‘철경록(輟耕錄)’에는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조야첨재’ 에도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이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당나라 시기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몰래 유통되다가 이때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 공개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상설 인육시장이 있던 곳이다)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으며 또 중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곤 했는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방 등으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곤 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보통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값을 폭락시킬 정도였다.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한다)
상설 인육시장은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 송나라 때의 항주(杭州)와 변경(?京), 명나라 때의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의 안경(安京) 등에 개설되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이러한 인육시장에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육판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송나라때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심지어 외국에서도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인육이 판매되곤 했는데 1919년에는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중국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인육은 어느 시대에나 싼 고기로 취급되었는데, 명나라 때 사천(四川)지방에서는 인육이 남자일 경우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는 것이었다. 1백여 년 전 청나라 때의 정치가 증국번의 일기에는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으며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중국의 식인풍습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곤 했는데 중국문명의 찬미자로 불리는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의 견문록에도 이러한 식인풍습에 대한 목격담이 나타나 있다.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 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광인일기(狂人日記)’ 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정신병자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실제상황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노신은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아Q정전(아Q正傳)’ 에서 다룬 노예근성과 함께 이 식인 풍습을 중국의 ‘2대악’으로 규정, 근절시키려고 노력했는데 당시 중국의 식인풍습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3) 중국의 식인풍습과 유교의 상관관계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노신(魯迅)은 식인 풍습과 연관지어 국가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했다. 그는 국가에 의해 구축된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우리 속에 갇힌 극빈한 군중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역설하면서유교의 원리가 바로 이러한 국가체계를 탄생, 유지시킨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는 직설적으로 ‘유교의 사상이 식인풍습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으며 이후 중국공산당에서도 유교의 폐해 중 하나가 식인풍습을 조장한 것임을 밝혔다. 충효, 인의를 강조한다는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를 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不俱戴天)’ 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는데 그것을 효라고 본 것이다. 부모의 복수를 하는 자는 지원극통함을 푼다는 의미로 한 칼에 원수의 숨통을 끊지 않고 수천갈래로 난도질을 한 후 그 고기를 먹거나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기까지 했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이 흔했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들 뜻에 따라 ‘효자’로 표창을 받거나 혹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가기도 했다.
‘충’을 보이기 위한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는데, 실례로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의 일화가 있다.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침으로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는다. (역아는 후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간신이 된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 자식을 잡아 자신의 주군에게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행위는 충으로 기려졌다.
(4) 중국의 식인풍습이 생겨나게 된 배경
중국의 식인풍습은 중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격한 권력투쟁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이 된 것,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잦은 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의 낙후로 인한 식량 부족의 극심함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적허용이 된 데다 잦은 기근과 전란의 영향이 겹쳐 식인풍습은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박히게 되었다. 따라서 정쟁이나 전쟁에서 패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은 "잡아먹는 고기"가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국민들까지 대량 징발해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식량’으로 사용한 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한 예로 당나라 말 혼란기의 처참함은 극을 이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군대행렬에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가 등장했는가 하면 국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의 군대가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모두 인육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식인현상은 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가 과밀된 지역에서 출현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대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풍습의 전파는 족적이 서로 일치하는 비례관계가 있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일대로 파급되어진다. 그 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한다. 즉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지역은 과잉개발에 의한 자연환경의 파괴로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져 기근이 발생하며 이에 따라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부터 흥평 원년에 이르는 400년 동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일대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양자강)일대에서도 발생하고, 점차 강남, 광동, 복건성에까지 식인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의 일이다.
(5) 식인풍습이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중국의 식인문화가 수천년을 이어 면면히 지속되었고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할 수가 없으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인은 왜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를 믿지 않는지, 왜 돈을 그렇게 중시하는지, 왜 먹는 것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미동조차 않는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왜 중국인은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 모여 사는지, 그 엄청난 인내심은 어디서 나오는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 위주인지 (그래서 중국계 기업의 수명은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짧은 편이다.) 등등 모든 중국인의 일상문제를 살피고자 한다면 그 저변에 깔린 중국특유의 식인풍습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서로에 대한 불신은 식인문화에 기인한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오랫동안의 식인풍습은 그의 말처럼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의 그 자체를 없애 버렸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 때는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로 그때만 예나 도덕 따위의 단어가 나온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강자 앞에서는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중국인 특유의 사고방식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 하나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식인 풍습이 발생하게 된 이유는 고대시대부터 식인이 형벌의 하나로 성문화 된 것, 막강한 황제권의 존재, 식인의 미화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직접적 원인은 식량부족에 있었다. 그 당시 식량의 개념은 곧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농업기술 발달 이후 식량자체는 그 가치가 하락되었고 그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가치로 자리잡은 것이 바로 ‘돈’이었다. 식인풍습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절박한 생존본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본능은 대대로 유전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 강렬해져 생명과도 같은 ‘돈’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는 것이다.
전쟁, 기근등으로 식인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등으로 순서가 옮겨간다. 다음은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 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이 다음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 간에는 관청에 줄이 있어 면벌이 쉬운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는다.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식인 풍습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 명이 뭉쳐서 숫자적 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다. 잡아먹히는 순서로 봤을 때 머릿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이다.
임어당은 삼대 뿐 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가족등 거의 모든 구성원이 한 집에서 사는 중국의 대가족제도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의 인내력을 키웠다고 말했다.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그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 큰 인내를 강요했다. 싫어도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는 처세 또한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의 사람과 부딪혀야 하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자연스레 몸에 익혔다는 것이다.
백인드의 식인 문화는 공공연했던 풍습이란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식인문화가 발달한 곳은...역시 왜족들의 서식지임도 공공연한 사실입니다...차이나의 기록에 식인문화가 있음은...장강 이남의 왜족들이 섞인 지역이 주축인 것이요...거기가 지나인 것이지...우리의 직계인 조선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식인에 관한 범죄가 적혀있다 했을 땐...조정 차원에서 인정한 식인이 아닌...날로 번식하던 왜족들의 본토 유입에 의한 자연스런 남녘풍습 전파일 거로 사료됩니다...청 말기 양이들이 중원에 겨 들어올 때는...남명이 망한 싯점이니...자연스럽게 양이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남방 왜족들이 중원으로 파고 들어왔을 때입니다...당나라를 우리의 그 조선족들로 보기도 어렵습니다...남송도 고려의 남방족이지...직계 고려족이라 보기 어렵습니다...그게 차이나지...조선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식인 풍속이...중원 북부가 먼저요...그게 남방으로 전파된 것이라 그럴듯한 분석을 하셨으나...지나의 삼국지 수호지 주 무대는 양가강 이남일 거란 최근의 재야사학자들 ..아니,대만 학자의 연구가 있습니다..중원 북부 동이족들의 삼국을 모사한 지멋대로들의 소설이란 것이져...누가 뭐래도 식인 풍속의 메카는...동남아 지역이란 겁니다...왜족들의 전통 서식지였을 것으로 강력히 예상되는 지점여...
사서에...북방족인 몽골,거란,여진,탕구트등이 식인을 제도적으로 묵인했다거나...공공연히 지도층이 인육시장을 묵인했었다면...이를 라이벌인 타 국가들이 기록하지 않았을 리 만무한 것이니...이선생님께서 꼼꼼하게 제시해 주신 위의 식인 풍속은...제가 인지하는 그 조선족들의 풍속이 아닌...그 남방 속노들였던...동남아 잡족들이란 겁니다...그렇다고 현재의 동남아인들 전부가 왜노들이란 건 아닙니다...그들도 이미 서양인들과 혼혈된 것이라...또한,구한말에 중원으로..한반도로...일본열도로 대거 진출했기에...이젠 그 원 종자들을 찾기 난해하다 하겠습니다.
이성계가 왜노들을 칠 당시...즉,아지발도를 화살로 먹여 버리고 승전할 당시...기록엔...왜족의 야만풍속을 성토한 대목으로...우리의 어린 여아들을 잡아다 삼계탕 마냥 배를 갈라 곡식을 담아 익혀 고사를 지냈단 처참한 기록이 있습니다...또한,반대로...적당들의 산과같이 쌓인 인육으로 굶주린 삼남의 백성들을 먹여 구제했단 덕담(?)도 없습니다....최소한 조선은 그 풍습이 허용되지 않았단 반증입니다.
자.현재의 풍속을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현재도 식인이 공공연히 일어난단 소문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동남아지여...?..이미 남방 지나족들이 유입된 지나대륙이지여...?...북한여...?...북한 정부가 장려한다거나 묵인한단 예긴 못 들었습니다...북한 주민들의 식인도...과장된 면이 다분하단 것이...식인이 그리 많다면...암시장에 나돈 굶어 죽은 자들의 인육들로...살들이 뽀얗게 올라야지...그리 말라 비틀어졌을리 만무한 겁니다.
가장 굶주렸던 일제 말기 특히 6.25 동란때...죽일 필요도 없이 산야에 널렸던 시체들...이런 판국에도 식인에 관한 얘기들 들어 보셨습니까...?...그 시체만으로도 굶어 죽진 않았을 텐데여...?...그저 확인도 않된...문등이들이 어린애 간을 빼 먹는단다~ 요것뿐 아니였던가여..?...고로,우리 조선민족은...굶어 디져도 인육은 거의 먹지 않는 관습의 풍속들임이 반증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일제 전후에도 삼계탕 애기로 고사를 지냈단 왜족들...현재도 가끔씩 사진에 잡힌 광동성의 처참한 어린아이 식인...어디가 대륙 식인의 메카요...어느종족이 주범들이였는질 반증한다 하겠습니다...한 나라의 황후를 공개적으로 사질 절단하고 욕보이곤...다시난자 난자하고 욕을 보여 잔인하게 태워 살해하는 그 아이들...그 아해들이..청나라 형장에서 없어진 시신들의 마지막 작물애비 들였을 소양이 많은 고로...범인일 확률도 많단 겁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제가 그렇게 써놓고는.. 갈수록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니 저도 여러가지로 짜증도 많이 나고 살기도 힘들어지는데다 또한 어려서부터 갖고있었던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충동적인 마음에 조선에 대한 원망감같은게 생겨났는데 홍진영님 글을 자세히 읽다보니 본래의 청렴한 문화의 조선이 왜족과 양노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제가 옮긴 글도 혹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위작일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 북경의 주인 역할을 하는 최초의 모택동계 공산군들은...식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긴 합니다...그들이 남방에서 티벳 험지를 넘어 장안성을 칠 당시에...영웅적(?) 행군의 기록이 기네스에 오르는데...한 줌의 곡식만을 가지고...인가도 없는 오지를...그 엄청난 거리와 몇달이란 긴 기간의 행군을 했답니다...그 야사를 들으면...군화도 삶아 먹었다...사람뼈도 삶아 먹었다 합니다...뼈도 먹는데...거기 묻어 있는 살점은 어쨋는진 불 보듯 할 겁니다...행군중 죽은 병사들도 고히 그냥 흙속으로 보냈을까도 의심스런 대목이고여...역시 , 왜족들의 주 서식지로 의심가는 서남방 군대들입니다.
물론,현 한반도에도 그 식인종들의 유전자는 적잖다 예상대는 대목이...6.25전후에...적군도 아닌 민간인들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던 자들...광주에서 칼로 시민들을 어쨋던 자들...일제의 만행을...그럴듯한 공식 사과도 별반 없는데... 더이상 논하지 말잔 도덕(?)군자들... 월남전에서 여인들의 시신 일부를 부적이라며 전리품으로 챙겨온 몇 몇 자들...이들 중...상당수는...구한말서부터 뒤섞인 왜족들의 유전자 탓이 아니겠나 하는 예상때문입니다.
저는 그 반대로 봅니다...고 지도 등에도 나오듯...현 일본열도는...청조땐 타타리아로 표기됐었습니다...내내 한반도나 만주의 동이계열였다...임란 때부터 남부부터 왜로 표시됩니다...열도가 완전 왜족들의 혼혈화가 된 때는 구한말 양이들의 용병질을 할 때 부터라 사료되는 대목입니다...물론 한반도 남부 도서들도 왜노족들은 고기잡이 노예로 사용됐엇을 수 있기에...그 유전자는 어떻게든 남아있다 보여집니다...어쨋거나 고대부터 중세 이전까진...열도중북부는 왜노들을 다스렸을 진 몰라도 왜노족들관 혈통적으로 그리 크게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식인이 발생하는 지역은 공통적으로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곳입니다. 식인발생지역은 대개 내륙삼림지대입니다. 해안지대는 생선을 먹어서 단백질을 보충하지만 내륙은 삼림으로 둘러싸여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기 어렵고 주변에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며 연연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흉년기가 되면 공통적으로 식인이 발생했습니다. 홍진영님께선 양이들의 식인풍습 운운하셨는데 실제로 같은 유럽이라도 영국,북프랑스,독일,폴란드,스칸디나비아,발트지역같은 북유럽에만 흉년기에 식인이 유행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호근님께선 "기근이 심하다고 농수산물을 더많이 수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지않고 사람 잡아먹는 것을 당연 시하는 중국(조선)의 문화에 대해서는 야만이라고 생각을 안하십니까?"라고 하셨는데 봉건시대엔 아무리 농업기술이 발달해도 흉년기가 오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흉년기에 대한 농업적인 대처는 근대시대에 식량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첫댓글 이 글 어디서 본듯 한데.. ^^ 과거에 사람이 사람을 먹었는지 어떻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당시의 문화라면 현제 우리의 잣대로 그것이 악하니 선하니 판단할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냥 그 당시 문화라로 생각하면 어떨지요? 지금 안그러면 되지요.^^
그 당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잦대나 과거의 잣대나 틀릴것이 없습니다. 동족을 먹는 카발라니즘 사람의 인륜과 상식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문화가 아닌 야만 그자체입니다
백인드의 식인 문화는 공공연했던 풍습이란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식인문화가 발달한 곳은...역시 왜족들의 서식지임도 공공연한 사실입니다...차이나의 기록에 식인문화가 있음은...장강 이남의 왜족들이 섞인 지역이 주축인 것이요...거기가 지나인 것이지...우리의 직계인 조선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식인에 관한 범죄가 적혀있다 했을 땐...조정 차원에서 인정한 식인이 아닌...날로 번식하던 왜족들의 본토 유입에 의한 자연스런 남녘풍습 전파일 거로 사료됩니다...청 말기 양이들이 중원에 겨 들어올 때는...남명이 망한 싯점이니...자연스럽게 양이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남방 왜족들이 중원으로 파고 들어왔을 때입니다...당나라를 우리의 그 조선족들로 보기도 어렵습니다...남송도 고려의 남방족이지...직계 고려족이라 보기 어렵습니다...그게 차이나지...조선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식인 풍속이...중원 북부가 먼저요...그게 남방으로 전파된 것이라 그럴듯한 분석을 하셨으나...지나의 삼국지 수호지 주 무대는 양가강 이남일 거란 최근의 재야사학자들 ..아니,대만 학자의 연구가 있습니다..중원 북부 동이족들의 삼국을 모사한 지멋대로들의 소설이란 것이져...누가 뭐래도 식인 풍속의 메카는...동남아 지역이란 겁니다...왜족들의 전통 서식지였을 것으로 강력히 예상되는 지점여...
백인들과 일본인들의 식인문화에 대해서 자세한 자료가 있으시면 올려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본 사이트에도 그 글들을 본 적 있습니다...한 번 직접 찾아 보시길 권고해 봅니다...직접 찾으셨을 때의 감동이 훨 큰 법이니까여...
북방이 식인풍속의 메카라면...당연히 남방 지나족들 입장에선...흉노를 폄하함에 있어서...이를 젤 먼저 언급했어야 하며...역시 북방계인 삼국과 고려(탕구트?)등을 비판함에...그 구절이 나왔어야 순서일 겝니다.
사서에...북방족인 몽골,거란,여진,탕구트등이 식인을 제도적으로 묵인했다거나...공공연히 지도층이 인육시장을 묵인했었다면...이를 라이벌인 타 국가들이 기록하지 않았을 리 만무한 것이니...이선생님께서 꼼꼼하게 제시해 주신 위의 식인 풍속은...제가 인지하는 그 조선족들의 풍속이 아닌...그 남방 속노들였던...동남아 잡족들이란 겁니다...그렇다고 현재의 동남아인들 전부가 왜노들이란 건 아닙니다...그들도 이미 서양인들과 혼혈된 것이라...또한,구한말에 중원으로..한반도로...일본열도로 대거 진출했기에...이젠 그 원 종자들을 찾기 난해하다 하겠습니다.
이성계가 왜노들을 칠 당시...즉,아지발도를 화살로 먹여 버리고 승전할 당시...기록엔...왜족의 야만풍속을 성토한 대목으로...우리의 어린 여아들을 잡아다 삼계탕 마냥 배를 갈라 곡식을 담아 익혀 고사를 지냈단 처참한 기록이 있습니다...또한,반대로...적당들의 산과같이 쌓인 인육으로 굶주린 삼남의 백성들을 먹여 구제했단 덕담(?)도 없습니다....최소한 조선은 그 풍습이 허용되지 않았단 반증입니다.
이 왜노족들의 야만적 풍속은...중원이 양이와 이 사냥개들인 동남아 왜족들의 북상으로 더럽혀 지면서...그 인구이동만큼 중원 북부로 번진 것이며...청조때의 사형수 고기를 추렸던 그 잡족들도...출신이 어디인지는...불 보듯 뻔한 이치라 하겠습니다...머리를 깍고 마빡에 문신을 한 애들이라 하셨져...?...청나라엔 마빡에 문신새기는 풍습이 없습니다...청족의 통치를 받던...남명...즉 양자강 이남의 차이나족들중 왜노족들을 이름한 것일 겁니다.
자.현재의 풍속을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현재도 식인이 공공연히 일어난단 소문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동남아지여...?..이미 남방 지나족들이 유입된 지나대륙이지여...?...북한여...?...북한 정부가 장려한다거나 묵인한단 예긴 못 들었습니다...북한 주민들의 식인도...과장된 면이 다분하단 것이...식인이 그리 많다면...암시장에 나돈 굶어 죽은 자들의 인육들로...살들이 뽀얗게 올라야지...그리 말라 비틀어졌을리 만무한 겁니다.
가장 굶주렸던 일제 말기 특히 6.25 동란때...죽일 필요도 없이 산야에 널렸던 시체들...이런 판국에도 식인에 관한 얘기들 들어 보셨습니까...?...그 시체만으로도 굶어 죽진 않았을 텐데여...?...그저 확인도 않된...문등이들이 어린애 간을 빼 먹는단다~ 요것뿐 아니였던가여..?...고로,우리 조선민족은...굶어 디져도 인육은 거의 먹지 않는 관습의 풍속들임이 반증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물론,현대의 한반도 어느 싸이코들이나...전란기의 어느 굶어죽기 싫은 인사들은...암암리에 식인도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현 한반도에도...왜 잡족들은 엄청 겨 들어왔다가... 다 못 나갔으니까여...
일제 전후에도 삼계탕 애기로 고사를 지냈단 왜족들...현재도 가끔씩 사진에 잡힌 광동성의 처참한 어린아이 식인...어디가 대륙 식인의 메카요...어느종족이 주범들이였는질 반증한다 하겠습니다...한 나라의 황후를 공개적으로 사질 절단하고 욕보이곤...다시난자 난자하고 욕을 보여 잔인하게 태워 살해하는 그 아이들...그 아해들이..청나라 형장에서 없어진 시신들의 마지막 작물애비 들였을 소양이 많은 고로...범인일 확률도 많단 겁니다.
제가 2004년쯤에 쓸 식인에 관해 쓴 글에서도 현재의 한국인과 식인문화는 정서상, 풍습으로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습이라고 썼었습니다 한번 찾아보시죠 이번 글은 식인에 관해 쓴 두번째 글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제가 그렇게 써놓고는.. 갈수록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니 저도 여러가지로 짜증도 많이 나고 살기도 힘들어지는데다 또한 어려서부터 갖고있었던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충동적인 마음에 조선에 대한 원망감같은게 생겨났는데 홍진영님 글을 자세히 읽다보니 본래의 청렴한 문화의 조선이 왜족과 양노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제가 옮긴 글도 혹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위작일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요..올해에도 봤습니다...특히 양이들의 식인여...
현 북경의 주인 역할을 하는 최초의 모택동계 공산군들은...식인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긴 합니다...그들이 남방에서 티벳 험지를 넘어 장안성을 칠 당시에...영웅적(?) 행군의 기록이 기네스에 오르는데...한 줌의 곡식만을 가지고...인가도 없는 오지를...그 엄청난 거리와 몇달이란 긴 기간의 행군을 했답니다...그 야사를 들으면...군화도 삶아 먹었다...사람뼈도 삶아 먹었다 합니다...뼈도 먹는데...거기 묻어 있는 살점은 어쨋는진 불 보듯 할 겁니다...행군중 죽은 병사들도 고히 그냥 흙속으로 보냈을까도 의심스런 대목이고여...역시 , 왜족들의 주 서식지로 의심가는 서남방 군대들입니다.
물론,현 한반도에도 그 식인종들의 유전자는 적잖다 예상대는 대목이...6.25전후에...적군도 아닌 민간인들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던 자들...광주에서 칼로 시민들을 어쨋던 자들...일제의 만행을...그럴듯한 공식 사과도 별반 없는데... 더이상 논하지 말잔 도덕(?)군자들... 월남전에서 여인들의 시신 일부를 부적이라며 전리품으로 챙겨온 몇 몇 자들...이들 중...상당수는...구한말서부터 뒤섞인 왜족들의 유전자 탓이 아니겠나 하는 예상때문입니다.
김종윤 선생께서 예전부터 지금의 한반도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의 선조가 왜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시사하셨지요.. 확실한 증거를 아직 못찾은듯하지만 여러가지로 유추해볼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정적으로 유추해본 결론은 지금의 한국인은 본래 중국대륙의 조선족과 한번도에 본래 거주했었던 왜족의 일부가 혼혈된 상태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한국인중에는 양반같은 사람도 많이 있지만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왜족과 같은 인간도 많지않습니까?
저는 그 반대로 봅니다...고 지도 등에도 나오듯...현 일본열도는...청조땐 타타리아로 표기됐었습니다...내내 한반도나 만주의 동이계열였다...임란 때부터 남부부터 왜로 표시됩니다...열도가 완전 왜족들의 혼혈화가 된 때는 구한말 양이들의 용병질을 할 때 부터라 사료되는 대목입니다...물론 한반도 남부 도서들도 왜노족들은 고기잡이 노예로 사용됐엇을 수 있기에...그 유전자는 어떻게든 남아있다 보여집니다...어쨋거나 고대부터 중세 이전까진...열도중북부는 왜노들을 다스렸을 진 몰라도 왜노족들관 혈통적으로 그리 크게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식인이 발생하는 지역은 공통적으로 단백질 섭취가 부족한 곳입니다. 식인발생지역은 대개 내륙삼림지대입니다. 해안지대는 생선을 먹어서 단백질을 보충하지만 내륙은 삼림으로 둘러싸여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기 어렵고 주변에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며 연연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흉년기가 되면 공통적으로 식인이 발생했습니다. 홍진영님께선 양이들의 식인풍습 운운하셨는데 실제로 같은 유럽이라도 영국,북프랑스,독일,폴란드,스칸디나비아,발트지역같은 북유럽에만 흉년기에 식인이 유행했을 뿐입니다.
20세기 중엽부터 미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에서 가축을 대량사육하고 있기 때문에 가축을 대량사육할 수 없는 북유럽 삼림지대 사람들에게 육류가 보급되고 있습니다. 다른 삼림지대도 서구지역으로부터 육류가 보급되어서 현재는 예전에 비해 식인발생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이호근님께선 "기근이 심하다고 농수산물을 더많이 수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지않고 사람 잡아먹는 것을 당연 시하는 중국(조선)의 문화에 대해서는 야만이라고 생각을 안하십니까?"라고 하셨는데 봉건시대엔 아무리 농업기술이 발달해도 흉년기가 오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흉년기에 대한 농업적인 대처는 근대시대에 식량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흉년기가 오더라도 동족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의 극치입니다.
그게 현생인류의 현실입니다. 선량한 부족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역사서엔 세계인구의 90%에 관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역사는 지배층의 이야기만 서술됩니다.
그리고 예전에도 콩쥐팥쥐라는 동화에 조선의 식인풍습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조선은 식인문화를 엄청나게 발달시켰군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