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박유하, {역사와 마주하기}, 2022, 뿌리와이파리
이우연
II 전시노동자[징용노동자] 문제
제2장은 저자가 그간 다룬 바 없는 징용 문제다. 저자의 생각은 {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책을 낸 도쿄대학교의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교수와 비슷해 보이는데, 동원에 있어서는 ‘강제연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일본에서의 노동과 생활은 “차별과 폭행, 사과와 질병에 의한 죽음이 일상화”된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평자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저자가 말하는 “징용”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글자 그대로의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실시되어 25-3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조선인 노동자 전시동원은 1939년 9월부터 “모집”과 “관알선”,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도일[渡日]이라는 형태로 출발하였고, 그 인원은 43-48만 명으로 생각되며, 일본으로 간 이들 전시노동자는 총 73만 천 여명이었다.
많은 한국 연구자들이 이들 전시노동자를 모두 불응시 법적 처벌이 따르는 국가적 강제동원, 즉 “징용”으로 통칭하여 사실을 왜곡해왔고, 그 결과 일반 한국인들은 실태와 동떨어진 “상식”을 갖게 되었다. 저자의 서술에서는 이들 73만 명 모두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기존 연구자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된다.
두번째는 조선인의 노동과 생활에 대한 서술에서 안회남(安懷南, 1909~?)의 소설 [소]와 [불]을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에서 징용된 조선인 주인공은 자신을 “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불]에서는 ‘48명 중에서 7명만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마치 실태라도 되는 듯이 서술한다.
“소”나 “노예”라는 자기인식이나 기업의 조선인에 대한 극히 열악한 대우는 당시 자료가 말하는 바와 전혀 다르다. 노무현 정부에서 6천 억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면서 만들어진 국가기관에 의해 수집, 채록된 증은은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위로금 지급 전 그들의 회고는 ‘고생은 되었지만 살아가는 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역시 신세계였다’는 건강함이 기본적인 정서였다.
사망자 수에 대한 이야기는 통계적 실태를 심각히 왜곡한다. 저자는 SNS를 통해 평자에게 답하면서 ‘나머지 41명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 아니며, 일본에 남은 사람들도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종전과 함께 일자리를 잃은 전시노동자는 거의 모두 조선으로 돌아왔다. 1960년대에 수행된 일본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재일조선인 중 전시노동자 출신은 채 2%도 되지않았다.
“차별과 폭행, 사과와 질병에 의한 죽음”이라는 서술과 관련하여, 하나의 숫자를 소개하고 싶다. 1939-45년간 전쟁과 무관하게 순수한 자유 의지로 일본에 단기 노동이민한 조선인이 전시노동자의 2.3배인 170만 명이었다. 조선 남부의 2-30대 청년이 260만 명 가량이었으니, 한국사 최초의 대규모 이민이 전개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전시노동자와 같은 곳에서 같은 조건으로 일하고 생활했다. 전시노동자와 기타노동자가 함께 일하는 곳이든, 아니면 기타노동자만 있는 곳이든, 조선인이 이렇게 뒤섞인 상황에서 전시노동자에게만 극악한 대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시노동자의 실태가 저자가 소설을 이용하여 주장하는 바와 같다면, 이 기타노동자 170만 명은 스스로 노예가 되어 죽기를 자원한 셈이 된다.
저자는 안회남을 “작가”, “지식인”으로 소개하는 데 그친다. 그런데 안회남은 짧은 징용생활 뒤에 815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동맹]이라는 공산주의 문학단체의 결성에 소설분과위원장으로 참가했다. 소설 [소]는 1945년에, [불]은 1946년에 씌어졌다 그는 1947년에 월북한 후, 6`25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단]으로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동료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간 뒤, 1960년대에 숙청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의 소설이고, 그러니 그 소설은 무조건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1차대전부터 2차대전까지의 시기에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전략전술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1단계 혁명으로서, 정치적으로는 "반제반파쇼 민족해방투쟁", 조직적으로는 “통일전선”의 구축을 당면과제로 설정했고, 이 1단계 혁명을 급속도로 2단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조선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였고, 일본은 “제국주의”, 조선인은 소나 말과 다름없는 그 “노예”로서 혁명의 주체세력이었다.
공산주의 작가들에게 문학은 '혁명을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이고, 공산주의 문학운동에 앞장선 안회남은 이러한 전략전술에 충실하게 소설을 쓴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산주의혁명가에게 혁명 과업의 수행은 자신의 존재이유다. 그가 [소]와 [불]을 쓴 것은 반일 〮반미 반제국주의 혁명을 위해 그 주체세력인 조선인에게 투쟁을 선전선동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수행함에 안회남은 오히려 순수했던 것이다. 그 일본이 실시한 징용에 대해 조선인을 상대로 공산주의 작가 안회남이 하는 “창작”이, 선전선동이었던 것은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징용의 진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평자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소설을 이용하면서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는 저자의 답변을 듣고 크게 놀랐다. 얼마전 한 위안부 연구자가 ‘자료를 넘어 상상력을 동원하자’는 말을 듣고 참으로 황당한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