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뇌정도(雷霆刀)를 얻다
폐허(廢墟).
그 위로 달빛이 음산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난날의 영화란 정녕 이렇듯 부질없는 것인가?
엄청난 장원의 규모가 되려 비애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불에 타버린 주춧돌이나 무너진 담장, 대들보 등이 번성했던 옛날과 씁쓸하기 그지없는 오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달빛조차 흐린밤.
명가(名家)의 잔해는 차라리 음산한 분위기를 풍겨냈다.
주변에는 잡초가 키를 넘을 정도로 자라나 있었고, 기왓장 사이로는 들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그 곳인가?"
진일문은 허탈한 표정이 되어 비석(碑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남대협(江南大俠) 도성(刀聖) 양공원종지묘(楊公元鍾之墓).'
풍진으로 인해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그 비문이 그에게 던져준 충격이란 이루 형용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강남대협 양원종이라면 양가보의 주인이자 그의 외조부였다.
'후후... 여기서도 나를 반기는 것은 절망뿐이로구나.'
진일문은 혈족을 찾으려는 일념으로 고집스럽게 강행했던 항로를 떠올렸다.
그러자 나오느니 쓴웃음뿐이었다.
그는 거의 넋을 잃은 채 폐허가 된 양가보의 잔해와 이끼에 덮힌 싸늘한 비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였다.
"흐흐흐... 과연 기다린 보람이 있군."
"흘흘! 저 꼬마놈이야말로 우리의 구성(求星)이다."
느닷없이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곳에 누가?'
진일문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즉시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그루의 고목 뒤.
두 개의 인영이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 명은 흑의를, 다른 한 명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 상복(喪服)이라는 점이었다.
병기도 곡상봉(哭喪棒)이었다.
안색은 너무도 창백하여 방금 무덤에서 튀어나온 듯 했다.
"귀하들은 지금 나를 두고 말했소?"
진일문이 묻자그들 중 백의인이 싸늘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여기에 너 말고 누가 또 있느냐?"
흑의인도 곁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꼬마야, 우리 형제는 이 곳에서 십오 년간이나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 같은 놈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지.
흐흐흐... 네 덕분에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가게 생겼구나. 어디, 이리 가까이 와 보아라."
진일문은 그들이 누구인지 이내 알 수 있었다.
오사로부터 들은 말을 기억해낸 것이었다.
- 강호에는 행동이 괴벽하고 무공이 고절한 쌍둥이 형제가 있소. 그들은 흑백무상(黑白無常)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데, 흑무상의 투골지(透骨指)와 백무상의 빙백수(氷魄手)는 유명합니다. 특히 잔랄하기로는 이에 필적할 신공이 없습니다. 한 때 그들은 너무도 많은 살인을 하여 무림의 표적이 되었다가 십육년 전에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소이다.
진일문은 내심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들이 어찌 하여 이 곳에 숨어 있었을까? 그것도 외조부 님의 무덤 근처에서......!'
이 때, 흑무상이 다가왔다.
괴이하게도 걸음을 옮기지도 않고 미끄러지듯 스르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동시에 진일문이 느낀 것은 그의 손에서 뻗어나오는 막강한 흡인력이었다.
"흐흐흐... 귀여운 아이야, 이리 오라지 않았느냐?"
진일문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마치 저항 능력이 없는 듯 상대방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딸려간 것이었다.
반면에 흑무상은 그의 완맥을 잡은 순간, 비명을 발했다.
"억!"
진일문이 기척도 없이 가슴 단중혈을 찍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흑무상은 이처럼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당하자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
설마 하니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한 것이었다.
순간적인 방심이 화를 불렀다고나 할까?
흑무상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멍청히 서 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아혈(啞穴)마저 점해져 있어 이 또한 불가능했다.
한편.
백무상은 흑무상이 처해있는 곤경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반대로 진일문이 제압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흐흐... 꼬마야, 늑장부리지 말고 어서 우리와 함께 가자. 흐흐... 이제 지긋지긋한 이 생활도 끝장......."
말하다 말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뜻밖에도 진일문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백무상은 믿을수 없다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너, 너는......!"
진일문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담담히 말했다.
"내가 오히려 당신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소. 어떻소? 이 곳에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네... 네 놈은 무슨 사술을 쓴 거냐?"
백무상은 분성을 발하며 즉시 곡상봉을 휘둘렀다.
쉬이익--!
진일문도 이쯤은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었다.
곡상봉이 한기를 뿌리며 날아들자 그는 일단 어깨를 낮추어 피했다.
그런 연후, 교묘한 보법으로 다가가며 태극십삼세를 전개했다.
백무상은 일순눈앞이 어지러워지며 왼쪽 옆구리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고수답게 그는 마비된 반대쪽의 힘만으로도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연속하여삼초를 공격했다.
진일문은 그의 손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서리발과도 같은 백기(白氣)가 그의 손끝을 빌어 무섭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빙백수!'
그것은 적중되면 한기가 골수까지 스며들어 전신을 완전히 꽁꽁 얼려 버리는 음한기공이었다.
진일문은 재빨리 태극환허신공을 끌어올려 이 빙백신공에 대항했다.
백무상은 자신이 발출해낸 빙백수의 기류가 무형의 벽에 부딪치는 것을 느끼며 대경했다.
아울러 그것은 흡사 바다에 빠진 돌멩이처럼 이내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얼른 신공을 회수하며 몸을 반대 쪽으로 틀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진일문의 특이한 수법에 걸려들고 있었다.
진일문은 우장으로 원을 그려 상대의 공력을 그 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 바람에 백무상은 앞으로 네 걸음이나 끌려갔다.
다음 순간, 진일문이 그의 옆을 스쳐가며 번개처럼 그의 어깨와 옆구리를 가격했다.
퍼퍽!
우드득--!
"커억!"
섬뜩한 음향과더불어 백무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어깨가 으스러졌는가 하면 갈빗대가 세 개나 부러져 나간 상태였다.
진일문은 그의혈도를 다섯 군데나 찍고 나서야 공격을 멈추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흑백무상이라면 강호에서도 내로라하는 절정의 고수들이거늘, 불과 수초만에 제압해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소리.......
그것은 놀랍게도 백무상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이었다.
그의 눈은 공포로 물든 채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없었다.
왼쪽 어깨에 당연히 매달려 있어야할 팔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부어졌다.
"동정을 구할 생각은 마시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사지를 차례로 뽑아 버릴 참이오."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스산한 음성이었다.
백무상의 잘려져나간 팔은 바로 그 음성의 주인공이 들고 있었다.
"으으... 잔인한 놈! 어린 놈이 어찌......."
백무상의 어깨로부터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혈도가 찍혀 있으니 지혈이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차갑고 조용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날더러 방금 잔인하다고 했소?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당한 것에 비하면 이것은 조족지혈에 불과 하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보다 더한 고문을, 그것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년 동안이나 감내해야 했었소."
백무상은 회의와 찬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너... 너는 누구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음성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소가 담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고문(拷問)이란 고문은 모두 받아 보았소. 원한다면 당신에게도 차례로 맛보게 해 주겠소."
손에 들고 있던 타인의 팔뚝을 저 멀리로 던져 버리는 냉혹한 인물, 그는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백무상은 마치현실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몽상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남의 손에서 장난감처럼 다루어지게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진일문은 그의옷을 벗겼다.
"뭐, 뭘 하려는 거냐?"
백무상은 질 겁을 했다.
저항할 능력을 잃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금새 알몸이 되긴 했지만.
두려움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수치감이 그를 괴롭혔다.
비록 어두운 밤이라고는 하나 만일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자신을 향해 뭐라고 하겠는가?
백무상은 마침내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 다오. 어떤 입장이든 너와 나는 모두 무림인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모욕을 안겨 주는 것이냐?"
하지만 진일문은 여전히 비정하기 그지없었다.
"본인에게 있어 당신을 죽이는 일이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가능하오. 그러나 나는 당신을 통해 필히 알아내야 할 것이 있으므로 그럴 수가 없소."
그는 씨익 웃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흰 이빨이 더욱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당신에게는 편안하게 죽을 권리가 있소.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소."
"으으... 대, 대체 무엇이 알고 싶다는 것이냐?"
진일문은 대답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섬뜩할 정도로 날이 서 있는 한 자루의 비수였다.
쉬익--!
비수가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허공을 그었다.
"으악!"
백무상은 비명과 함께 그만 혼절을 해 버렸다.
비수가 얼굴에 닿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끝장 났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지났을까?
백무상은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얼굴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심결에 손으로 얼굴을 긁으려 했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 단순한 동작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의아하여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팔이 없지 않은가? 양팔이 모두.......'
사실이었다.
어느 덧 무림 전역을 주유하며 악명을 떨치던 백무상은 양쪽 팔을 다 잃은 불구로 화해 있었다.
곧 귓전으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와 그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잠시 후면 이 일대의 개미들이 모조리 몰려와 당신의 얼굴가죽을 갉아먹게 될 것이오."
백무상은 비로소 얼굴이 근질거리는 이유가 개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득한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제, 제발 나를 죽여 다오. 무슨 말이든 다 할 테니......."
그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진일문이 물었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묻지 않았소. 그런데 대체 무엇을 말하겠다는 것이오?"
"물어다오! 다 대답하겠다."
애원하는 백무상의 눈에 문득 맞은 편 나무에 무엇인가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물체가 들어왔다.
"헉! 흑무상......."
백무상은 아예넋을 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흑무상은 자신보다 더욱 비참한 몰골이었다.
그 역시 알몸이 된 채 거꾸로 나무에 매달려 있었는데 가히 처참지경이었다.
흑무상의 위치는 지면과 고작 석 자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땅에는 놀랍게도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 이따금씩 꿈틀거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모닥불의 열기로 인한 것인 듯 그는 머리가 이미 훌렁 벗겨져 있었다.
머리칼은 언제 다 타 버렸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고문을......."
백무상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불이 몸에 닿지 않는다고는 하나 장시간에 걸쳐 그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과연 어떠하리라는 것을.
흑무상은 아무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것을 인식한 백무상은 그가 비명을 지를 기운조차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일문.
그는 지금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일을 벌이고 있었다.
실상 그가 혈옥에서 받은 고문은 이보다 수십가지도 더 되었다.
어쨌든 그는 이를 통해 그야말로 산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문에 대응하는 인간 심리에 관한 것이었다.
'후후... 고문을 당할 시 누구든 처음에는 입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혼절을 거듭하다 못해 일신의 기력을 모두 잃고 나면 달라지게 되어 있지.'
무릇 인간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반항심이 있을 뿐더러 약간의 틈만 있어도 거짓을 꾸미려는 간교함이 있다.
그러나 줄기차게 고문을 해대면 종내에는 그 모두를 상실하게 된다.
한 마디로 양처럼 순해지는 것이다.
진일문이 현재 기다리는 것도 바로 흑백무상이 그렇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흑백무상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들이 외조부의 죽음과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고자 이런 방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다지 크게 가책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뒤에 도사리고 있을 배후 세력을 미리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십오년간이나 양가보의 폐허 속에 숨어 감시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니 나름대로 짚히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더없이유순해진(?) 백무상이 입을 열었다.
"흑무상도 나와 같이 죽여다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네가 묻는 말에는 무엇이든 답해 주겠......."
그는 침착을 되찾은 것과는 달리 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곧 한 줄기 따스한 진기가 단중혈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깨어나야 했다.
"좋소. 당신의 뜻대로 해 주겠소. 그러나 만일 약속을 어기고 한 가지라도 대답을 회피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면 그 즉시 내 계획대로 시행하겠소. 아마도 당신은 산채로 껍질이 벗겨져 수천만마리의 개미에게 물어뜯기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백무상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 알겠다."
진일문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숨어 있었소?"
백무상은 이의없이 대답했다.
"그것은 양원종을 찾아오는 자가 있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 후에는?"
"우리는 그 자를 제압해 상부에 올려야 했었다."
"상부? 그 곳이 어디요?"
백무상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들은 녹림존사의 수하들이다. 그 분의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했다."
녹림존사란 녹림의 총사를 뜻하는 것으로써 곧 벽안마군(璧眼魔君) 탁청(卓晴)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녹림존사는 무엇 때문에 당신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단 말이오?"
문득 백무상의입가에 비웃음 같은 것이 어렸다.
"아직 몰랐단 말이냐? 녹림채가 삼성림의 구대천궁(九大天宮)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 윽!"
그는 비명을 질렀다.
진일문이 그의 멱살을 힘껏 틀어쥐었던 것이다.
그는 멱살을 잡힌 채 격앙된 음성으로 물었다.
"흑무상에게서는 얼마나 알아냈느냐?"
진일문은 손을풀며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것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백무상은 그 말에 장탄식 했다.
"아아! 우리 형제가 너 같은 어린 아이에 의해 이런 꼴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너는... 대체 누구냐?"
진일문은 잠시망설였으나 굳이 숨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른대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도성의 외손자요."
백무상의 눈이크게 휩떠졌다.
"양원 종의 외손자라고? 설마 그... 그럴 리가!"
"믿기지 않소?"
"그렇다. 그에게 혈육이라고는 오직 오래 전에 실종된 딸 하나 밖에 없었다."
"딸......?"
진일문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을 알고 있소?"
백무상은 기억을 더듬는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도성의 딸은 강남미가려(江南美佳麗)라 불리웠다. 그만큼 아름다웠지. 이름이 양... 혜경... 이라던가?"
진일문은 모친의 이름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의 음성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왜 실종 되었는지 알고 있소?"
"그런 개인적인 것은 모른다. 소문에는 스스로 집을 나갔다고도 하고, 누군가에게 겁탈을 당했다고도 했지만 정작 양원종이 딸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기를 꺼려했다."
진일문은 그를의식하지 않은 듯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그 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
"역시 네가......."
백무상은 비로소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일문의 무서운 추궁이 이어진 것은 그 때였다.
"대답하시오! 양가보가 참화를 입었을 당시에 그대들은 그 자리에 있었소, 없었소?"
백무상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있었다. 그리고 이는 녹림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뭣이? 그럼 녹림의 무리가 감히......?"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어서일까?
그는 더 이상 겁을 내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진일문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 눈가에 한 가닥 연민을 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했다.
"존사께서도 실은 구대천궁 중 회천궁주의 명을 받아 시키는 대로 하셨을 뿐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 그럴 수가......!
진일문은 크게충격을 받았다.
삼성림이라면 그로 하여금 치가 떨리게 하는 곳이다.
삼성림의 구대천궁 중 하나인 혈궁에서 그토록 모진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외조부인 양원종의 죽음까지도 구대천궁의 사주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삼성림과 그는 어떤 사이가 되는 셈인가?
진일문은 가슴에서 격한 소용돌이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를 간신히 억제하며 입을 열었다.
"양가보의 멸망에 회천궁도 직접적으로 가담했었소?"
백무상의 안색이 와중에서도 일변했다.
"그... 그렇다. 하지만 거기에도 또 내막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같이 말석에 있는 자들이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회천궁도 아마... 광명총궁(光明總宮)의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진일문은 아예기가 막힌 듯 입을 딱 벌렸다.
"정녕 통탄할 노릇이로군! 그래, 일개 가문을 강호에서 멸절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무리들이 개입되었단 말이오?"
백무상은 쓴 입맛을 다셨다.
"무림의 생리란 본시 그렇다. 정인군자인 척 하는 자들도 대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실상 양가보를 무너뜨리기 위해 녹림존사와 회천궁주, 그리고 총궁에서 온 사대천왕(四大天王)들 모두가 협공을 했다."
"우우......!"
진일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기이한 신음성을 발했다.
백무상은 이런 그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 측은 결코 뜻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도성의 무공은 가히 신의 경지였다. 뿐만 아니라 양가보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유치되어 있었다."
진일문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물었다.
"누구요? 내 외조부님을 최종적으로 살해한 자는......?"
백무상은 뜻밖에도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진일문은 쿵 하고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태까지 이 곳을 지키고 있었겠느냐? 그는... 당시 중상을 입은 채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었다."
'오오......!'
진일문은 내심탄성을 발했다.
외조부라면 그에게 있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혈족이다.
그가 살아있다는 말은 곧 암흑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무상은 괴이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우리들이 기다리던 자가 바로 그였다. 크크... 그리고 너를 보았을 때 그의 끄나풀이라 여기고 좋아했던 것이다."
진일문은 서서히 우수를 치켜 올렸다.
"고맙소, 이제 약속을 지켜 주겠소.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더 물을 것이 있소. 당신이 말한 광명총궁이란 무엇이오?"
백무상은 죽음을 맞이하려는 듯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광명총궁이란 구대천궁에서......!"
그는 말꼬리를흐트리는가 싶더니 입을 딱 벌렸다.
동시에 번쩍 눈을 떴으나 그의 동공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누가 암습을!"
진일문은 부르짖으며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던 흑무상도 벌써 죽어 있었다.
그의 목에는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서라--!"
진일문은 서쪽으로 하나의 인영이 유성처럼 날아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력을 다해 추격해 갔다.
흑백무상.
그들은 진일문이 아닌 다른 자에 의해 제거된 것이었다.
휙! 휘휙!
그것은 차라리두 줄기의 유성(流星)이라고 해야 옳았다.
두 개의 그림자는 질풍처럼 비쾌하게 치달려 강변의 갈대숲을 가로질렀다.
숲을 지난 것도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간격은 줄곧 일정했다.
서로 간에 시종 변함없이 십장을 유지한 채 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중 뒤쫒는 자, 즉 진일문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누구일까? 지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청력으로도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토록 먼 거리를 추적해 왔는데도 아직 따라 잡을 수가 없다니.......'
대략 사오십 리쯤 달렸을까?
진일문은 상대의 질주 속도가 차츰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자신의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진기는 오히려 샘솟듯 솟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내공이 워낙 심후한 탓이기도 했으나 이보다는 그가 태극환허신공이라는 도가의 절정신공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진일문은 괴영과의 거리를 오장 이내로 좁힐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의외로 체격이 왜소한 자였다.
진일문은 그를향해 진력을 돋구어 소리쳤다.
"서라! 서지 않으면 네 등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협박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이 정도의 거리라면 암기를 날려 능히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기사의 암기술은 괜히 익힌 것이 아니다.
더구나 특별히 선사받은 다섯 가지 종류의 암기는 이런 때 말고 언제 쓰겠는가?
앞서 달리던 괴영이 신형을 뚝 멈춘 것은 그 때였다.
"이봐욧! 당신은 왜 나를 자꾸 따라오는 거죠?"
진일문은 이 느닷없는 반전에 자신도 모르게 괴영과 마찬가지로 신형을 멈추었다.
하지만 역시 시간적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의 거리는 이미 지척지간에 이르고 있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괴영은 여자였다.
전신을 흑의로 감싸고 있었는데 날씬하면서도 마치 옷자락을 뚫고 터져나올 듯 팽팽한 육체를 가진 여인이었다.
나이는 십팔, 구세쯤 되었으며 치켜 올라간 듯한 눈매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에서도 또한 야릇한 풍정이 느껴졌다.
"당신은......."
진일문은 일시지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그가 우물거리는 찰나, 여인은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다시 물찬 제비처럼 신형을 뽑아 올렸다.
"아차!"
그가 실수를 깨달았을 때, 이미 여인은 이삼십장이나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재차 추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사리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인이 교묘하게도 지형(地形)을 이용해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특히 산기슭으로 접어들자 이 지역을 잘 아는 듯 바위와 나무 따위를 은폐물로 삼으며 귀신처럼 도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교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때는 그를 향해 나뭇잎을 훑어 날렸으며 어느 때는 흙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바위 아래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암습을 해서 그의 진로를 방해하기도 했다.
'괘씸한!'
진일문은 이를악물며 계속 여인을 추격해갔다.
그녀의 잔꾀에는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으되 그에게는 대신 웬만한 경우라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이 있었다.
마침내 그는 또다시 승기를 잡을 수가 있었다.
여인은 지쳤는지 눈에 띌 정도로 신법이 느려져 있었다.
그는 여인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는 것을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
"그만 포기하시오! 그대가 설사 하늘 끝까지 달아난다 해도 내 손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자 여인은되려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이봐요, 젊은 양반! 그 정도로 나를 좋아한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왜 진작 고백하지 않았나요? 혹시 내가 인심을 써서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해 주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호호호... 이건 당신이니까 말해주는 건데요, 나는 보기보다 품질이 우수한 여자예요. 당신도 필히 맘에 들 걸요?"
"뭣이? 이 수치심도 모르는......."
결국 여인의 말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또한 그러다 보니 그는 자연히 주춤하게 되었다.
"그럼 잘 생긴 분, 어디 끝까지 따라올테면 따라와 봐요!"
여인이 문득 신형을 날렸다.
"이런!"
진일문은 미간을 잔뜩 지푸렸다.
기진맥진 했던 여인은 노골적인 언사를 통해 기력을 보충하고 다시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는 시야에서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정녕 무서운 여인이다! 단지 세 치 혀로 상대를 농락해 위기에서 벗어나다니. 하지만 절대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진일문은 곧 칠금신법을 구사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단번에 십여장을 갈랐다.
그 정도라면 여인을 따라잡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다급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여인이 가고 있는 방향이 바로 불빛이 명멸하는 항주의 번화가였기 때문이었다.
그 곳으로 들어가면 어찌 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일문은 그야말로닭 쫓다가 지붕이나 쳐다보는 견공(犬公)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여인의 모습은 어느덧 휘황한 불빛 속으로 함몰되고 있었다.
"오호호... 안녕! 다음에 또 봐요."
진일문은 그만맥이 빠져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흡사 무언가에 잠시 홀려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일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체 그 여인은 누구길래 흑백무상을 암살한 것일까?
삼성림의 인물일 가능성이 가장 크긴 하지만 속단할 수는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일에는 천착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도 진일문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아쉬움에서 놓여나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이내 다른 목적을 떠올리며 신형을 날렸다.
항주는 중원제일의 색향(色鄕)이다.
- 하늘에는 천당(天堂)이 있고, 땅에는 소항(蘇杭)이 있다.
고사가 말해주듯 소주(蘇州)와 항주는 아름다울 뿐더러 풍류인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기를 소원하는 곳이었다.
항주는 이른바기녀(妓女)들이 아름답기로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덕분에 유흥가나 기루, 심지어는 청루에까지도 미녀들이 구름같이 몰려 있었다.
그래서일까? 번화가에 들어서면 벌써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기이한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사람들이 북적내는 것도 그렇거니와 색향(色香)다운 정서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특히나 밤의 풍경이 화려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진일문.
그는 정체불명의 흑의녀를 놓치고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 번화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애초 그는 금릉에서 살았으므로 대도(大都)의 풍경에는 그런대로 익숙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곳은 그가 느끼기로도 분위기가 금릉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무튼 진일문은 그런 면에 관심을 둘 경황이 없었다.
그는 우선 거리에 즐비한 주루나 객점 등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다름이아니라 환우오사가 남긴 기호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과 헤어질 때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암기(暗記)를 미리 정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략 한 시진이 지나도록 진일문은 어디에서도 그들이 남긴 기호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잠시 요기나 한 후에 다시 돌아 보아야겠다.'
그리하여 그가발길을 옮긴 곳은 시장통이었다.
야시(夜市)는 볼만했다.
대낮과 마찬가지로 도처에 쌓여있는 물건들도 그렇거니와 불빛을 사이에 두고 상인과 고객 간에 벌이는 흥정 따위까지도 그에게는 모두 구경거리들이었다.
진일문은 잠시모든 것을 잊은 채 마치 이끌리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녔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소를 지었다.
'후후... 아직도 내게 치기가 남아 있는 것일까?'
사실 이는 타인이 들었다면 그저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그가 지내온 삶 중 나름의 비애가 엉켜 있는 부분이므로.
금릉 시절을 제외하면 그 이전이든, 이후든 진일문은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변경의 곡예단에서 그랬는가 하면 지옥같던 혈옥에서의 나날들, 또 사가보에서는 어떠 했는가?
그 이후로도 줄곧 쫓기는 입장이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야 옳았다.
'어찌 되었건 좋구나. 이렇듯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기분을 가져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진일문은 내심자위하듯 부르짖으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가 멈춰선 곳은 한 병기점 앞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곳에 비해서 유독 한산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한밤중에병기를 사러 오는 손님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파장을 앞두고 헐값에 팔아치우는 음식류나 일용품에 비해 결코 인기가 높을 리 없었다.
"어서 옵쇼, 공자! 헤헤헤... 본 점에는 어장(魚藏), 막사(莫邪), 간장(干將), 천추검(千秋劍)을 빼고는 세상의 명검보도가 모두 있습죠. 헤헤... 공자께서는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병기점의 주인은 배가 공처럼 튀어나오고 살이 디룩디룩 찐 중년인이었다.
침을 튀겨 가며 설명하는 그를 보자 진일문은 절로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어차피 이 곳에 있지도 않은 물건들은 굳이 뭣하러 나열하시오? 그것도 상술의 일환이오?"
실상 그 네 가지 검은 천고의 기병들로써 무림인들은 그것들을 일컬어 전설의 사대신병(四大神兵)이라 부른다.
"헤헤헤... 물론입죠. 그에 못지 않은 보병이 폐점에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손님들께 알려드리는 것입니다요."
"하하하... 일리가 있는 말이구려."
"혹 믿지 못하시겠다면 한 번 구경해 보시지요."
"하하... 주인장의 구변이 우선 마음에 드오. 그럼, 대체로 어떤 것들이 있소?"
"헤헤... 폐점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병기라면 무엇이든 있습죠. 검은 물론 도의 종류만 해도 단도(短刀), 쌍도(雙刀), 유엽도(柳葉刀), 귀두도(鬼頭刀), 대감도(大坎刀), 참마도(斬馬刀), 구환도(九環刀) 등등 없는 것이 없습죠. 어디 그 뿐입니까? 장창(長槍), 대극(大戟), 제미곤(齊眉棍), 낭아봉(狼牙棒), 백랍한(白蠟桿), 강편(鋼鞭), 철간(鐵 ), 점혈궐(點穴 ), 괴자(拐子), 아미자(蛾眉刺), 팔각추(八角椎)......."
병기점 주인이지껄이는 대로 두었다가는 밤이 새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진일문은 그만 손을 내젓고 말았다.
"되었소, 그것들을 다 살 것도 아니니 눈으로 본 뒤에 결정하겠소. 나는 한 가지면 충분하니까."
"헤헤헤... 좋으실 대로!"
병기점의 주인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띄운 채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그의 자랑은 허언만은 아니었다.
안 쪽으로 들어가 보니 병기점은 의외로 규모가 큰 편이었다.
물건만 해도 입구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것은 몇 가지 밖에 안되었으나 그 내부의 사정은 무척 대조적이었다.
병기가가 주욱늘어져 있는 모습이 일종의 병창(兵倉) 같다고나 할까?
그 곳에는 과연 그의 말대로 없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너무도 많은 병기를 대하자 놀랍다기 보다는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오히려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꼭 맞는 병기를 가지고 싶어했다.
다만 검으로 해야 할지, 도로 해야 할지 결정을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그가 익힌 무공이 딱히 어느 쪽을 주(主)라고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그는 외조부의 별호가 도성(刀聖)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는 달리 더 생각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도(刀)를 봅시다. 쓸만한 것이 있소?"
혈족에 대한 막연한 향수는 어느 때고 이렇게 거침없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곤 했다.
병기점의 주인이 갑자기 기이한 시선으로 그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공자 같이 얌전한 분께서 어찌 도를......?"
진일문은 뭐라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쓰게 웃었다.
그는 비록 무릎을 다쳐 다리를 약간 절기는 했으나 누가 보더라도 준수한 미공자였다.
더우기 무공을 익힌 이후로는 다리가 불편한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충분히 병기점 주인의 아름다운(?) 오해를 살만도 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오해이건 진일문은 성품상 그대로 묵과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정색을 지으며 말했다.
"본시 외양이란 그 사람의 어떤 면도 대변하지 못하오. 미안하오만 나는 귀하가 말하는 귀공자가 아니외다."
그 말에 주인은 새삼스럽게 진일문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참 후, 그는 사뭇 의미심장한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공자는 정녕 대단하신 분입니다요. 헤헤... 소인은 오랫 동안 강호의 괴객들을 무수히 상대했습죠. 그리고 대개는 어느 구석에서든 그들의 살아온 내력을 눈치 채곤 했습니다요. 하지만 공자께만은 영 실패했군요. 헤헤헤......."
"그 말 뜻은......?"
"헤헤헤... 절대 이상하게 듣지 마십시오. 진면목을 숨기려 애를 써도 잘 안되는 작자들이 되려 불행한 것입니다요."
"호오!"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상대가 병기점의 주인 치고는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리 오십시오, 나으리."
주인은 놀라고있는 그를 잡아끌더니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그럴 듯해 보이나 무림의 호걸들께서 쓰시기에는 썩은 몽둥이에 불과합지요. 헤헤헤... 소인이 정말로 물건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 쪽으로 모시겠습니다요."
진일문이 다시안내된 곳은 역시 하나의 창고였다.
자물쇠까지 채워 놓고 있어 언뜻 느끼기에도 귀중한 물건들만 따로 보관하는 듯 했다.
이윽고 주인이문을 열자 퀘퀘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안을 들여다 본 진일문은 눈을 크게 떴다.
왜냐하면 이 곳에는 보다 많은 병기들이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기가가 사방을 돌아가며 세워져 있는가 하면 도검창, 극편추 등 십팔반 병기 뿐 아니라 각종의 외문병기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진일문은 창고안의 분위기를 통해 실로 묘한 기분과 접하고 있었다.
굳이 이르자면 병기들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예광과 살기에서 비롯되는 현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진일문은 곧 고개를 저어 이를 부인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병기들은 대부분 심하게 녹이 슬어 있어 본래의 형태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은......?"
진일문은 주인을 돌아다 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헤헤... 이 병기들은 모두 이상한 기운을 품고 있습지요. 이것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주인이 있던 물건들로써 그 주인들마저도 결국 죽었기 때문에......."
"아!"
진일문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인즉 병기의 주인들은 무림인이었고, 그들이 죽은 이유는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림의 법칙 때문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들은 병기에피를 묻혀왔듯 자신 또한 남의 손에 의해 죽어간 것이다.
아마도 황야에서, 혹은 이름 모를 산정에서 상쟁을 벌이다가 애용하던 병기만을 남긴 채 죽었으리리라.
진일문은 한 가닥 괴이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대개 무림인들은 자신의 병기를 생명처럼 여긴다.
따라서 그들이 죽으면 의례 친인이나 문하의 제자들이 시신과 함께 거두어 주기 마련이거늘, 어찌 하여 이것들이 이렇듯 한 자리에 모여있을 수 있단 말인가?'
병기점의 주인은 그의 생각을 눈치 챈듯 빙그레 웃었다.
"공자께서 의아하실 줄로 압니다만, 헤헤... 여기 있는 물건들은 전부가 한 때 무림을 휩쓸던 영웅호걸들의 것입니다. 이들 병기에는 그 분들의 혼이 담겨 있습지요. 그러니 그 주인은 비록 풍진 속에 쓰러졌을지언정 이 병기들마저 땅속에 묻혀 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도 애석한 일이 아닙니까요?"
진일문이야말로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대할수록 오히려 신비한 인물이다. 생각하는 바도 특출하거니와 대체 이 많은 병기를 어디서, 어떻게 수집했단 말인가? 이것은 웬만한 노력을 가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주인은 그의 눈길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헤헤... 공자, 소인은 이 병기들이 옛주인을 대신할 만한 새 주인을 만났으면 합니다요. 그리하여 그 예리함으로써 협기를 떨치고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 쓰여진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정녕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오. 내 처음에 주인장께 구변이 좋다고 했던 말을 정정하겠소. 이제 보니 당신은 단지 구변에 능한 것이 아니라 뜻이 분명한 분 같소."
이것은 진일문의 진심이었다.
이어 그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물었다.
"혹 주인장께선 이 병기의 주인들을 알고 있소?"
"헤헤... 그야 여부가 있습니까요? 간략하나마 각 병기마다 옛 주인의 이름과 전력들을 기록해 놓았습지요."
주인은 그 말을 하며 눈에서 기광을 번뜩였다.
그러나 진일문은 병기에 신경을 쓰느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만일 그가 그것을 보았다면 좀 더 이 병기점의 주인에게 관심을 기울여 보다 놀라운 점을 알아냈을 것이다.
훗날에야 진일문은 알게 된다.
이 인물이야말로 강호의 이름난 괴객(怪客)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아무튼 진일문은 도가에서 여러 자루의 고색 창연한 도를 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하고 무거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병기마다꼬리표가 붙어 있고, 거기에 전 주인의 명호및 전력이 기재되어 있는 것만은 똑똑히 보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 참정도(斬情刀), 북송(北宋) 때 예주 지방의 철기가에서 주조. 첫번째 주인은 단혼도(斷魂刀) 육정풍이었으며 이후로 주인이 열 다섯 번 바뀌었음. 마지막 주인은 풍뢰진인(風雷眞人)으로 원(元) 무종(武宗) 때의 인물. 삼십육초의 풍뢰연환도법(風雷連還刀法)을 구사하여 하북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음. 그를 죽인 자는 낙성신검(落星神劍) 전자구란 위인으로, 백육십구합 만에 심장을 찔려 사망.
실로 놀라운 역사의 기록이었다.
참정도의 주인들을 알아내어 시대 별로 구분해 놓은 것도 그렇지만 그 주조 사실까지 밝혀냈다는 것은 가히 경악에 이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진일문은 대강몇 개의 꼬리표를 읽어보는 동안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가 한 번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상고기인(上古奇人)들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진일문은 도가의 맨 아래쪽에서 괴상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원하는 도가 아니라 팔찌였는데, 칙칙한 검은 색의 철환(鐵環)이었다.
"설마... 이것도 도란 말이오?"
주인은 다시 예의 웃음을 흘렸다.
"헤헤... 그것은 오직 연자(緣者)만이 얻을 수 있는 상고기병입지요. 어떻습니까요? 공자께서도 이 기회에 한 번 운을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내 운......?"
진일문은 예의묵환(默環)을 들어보았다.
의외로 묵직했을 뿐, 자세히 살펴 보아도 별로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에는 유독 꼬리표마저도 없었다.
"이 물건의 주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나 보구려?"
"헤헤... 실은 제가 한 번 그 주인이 되어볼까 했었습지요."
"당신이 직접 말이오?"
주인의 말은 그만큼 비중을 두었다는 뜻이리라.
그 바람에 진일문은 더욱 호기심이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애착이 가는듯 묵환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것을 내게 파시오."
주인은 갑자기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희대의 보물입지요. 만일 공자께서 그 연자시라면 소인은 한 푼도 받지 않고 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신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요."
"그 두 가지 조건이란 무엇이오?"
"그 첫째는 우선 그것을 손목에 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조건은 언제고 소인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일문은 내심주인의 요구들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은연 중 긴장감을 가지며 묵환을 손목에 차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묵환이 손목에 채워지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윽! 이럴 수가......."
팔찌의 안쪽에는 애초부터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끼워짐과 동시에 손목의 맥혈을 세게 조여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는 기혈이 통하지 않아 뜻밖에도 반신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과 만나야 했다.
"헤헤헤... 이제껏 저 말고도 많은 인물들이 그것을 가지려고 했으나 단 한 분도 성공하지 못했습죠."
진일문은 입을열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는 묵환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것이 어찌 하여 도(刀)인지도 몰랐으나 그 내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만은 느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주인이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으로 미루어 필시 어떤 묘용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진일문은 이를악물고 맥혈을 누르는 예의 뾰족한 부분에 대항하기 위해 손목으로 진기를 흘려 보냈다. 그러나.......
"으윽!"
그의 입에서 또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기가 주입되자 팔찌가 급격히 수축되며 그로 하여금 방금 전보다 백배나 더한 고통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금시라도 손목이 잘리울 것만 같았다.
온 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림에도 불구하고 팔찌는 더욱 무섭게 죄어들었다.
진일문은 당장에라도 팔찌를 벗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찰나지간에 그치고 말았다.
꼿꼿한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기도 했으나 주인의 말마따나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진기를 회수하지 않고 반대로 더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감축되는 것이 아니라 되려 가중되었다.
"으으음......."
마침내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한편.
병기점의 주인은 그 광경을 내내 지켜 보고 있었다.
아울러 그런 그의 얼굴에는 한 가닥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급기야 진일문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진기를 거두지 않았다.
보다 못한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요. 진력을 거두면 팔찌는 즉시 늘어나게 되어 있습죠."
"고맙지만 염려는 사양하겠소."
진일문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진기를 손목으로 흘려보내 팔찌의 조여드는 힘에 저항했다.
"크으으......!"
그는 비명인지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려냈다.
그의 손목으로부터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팔찌의 뾰족한 부분이 기어이 손목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그대로 있다가는 영락없이 손목을 잘리울 판국이었다.
그런데 진일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눈을 번쩍 빛냈다.
그는 이어 혼신의 힘을 다해 진기를 모조리 떨쳐냈다.
"얍!"
바로 그 순간, 실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쩡......!
묵환에서 괴이한 음향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진일문은 고통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 자신이 되려 어리둥절하여 팔찌를 내려다 보았다.
팔찌는 기이하게도 그의 손목에 꼭 맞게 채워져 있었다.
마치 일부러 맞춘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 손목에 붙어있었던 것처럼 이물감도 전혀 없었으며 편안하기까지 했다.
이 때였다.
"오오! 드디어 뇌정신도(雷霆神刀)가 주인을 찾았도다."
병기점의 주인이 흥분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는 격동에 찬 시선을 진일문에게 던지고 있었다.
"방금 뇌정신도라고 했소?"
진일문이 물었다.
그것은 실제로 그가 묵환의 내력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를 바라보는 주인의 눈에는 어느덧 격랑의 소용돌이와 더불어 경외감마저 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최고의 천병(天兵)인 전설의 뇌정도입니다요. 오오, 공자는 춘추시대 뇌환공(雷幻公) 이래로 두번째 뇌정도주(雷霆刀主)가 된 것이오."
진일문은 그가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묵환이 전설적인 도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크나큰 행운을 만났다는 것 등이었다.
"그럼 혹 발도법도 알고 있소?"
주인은 그 때까지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일명 천상천하유아독존도(天上天下唯我獨存刀), 천지간에 가장 강한 기운이 바로 뇌(雷)의 힘이니 뇌의 정기를 갈무리한 뇌정도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요? 공자께서는 한 번 뇌정신위를 떨쳐 보십시오."
진일문도 그 말을 듣자 웬지 가슴이 진동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어떻게 말이오?"
병기점의 주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심즉발(心卽發), 발즉도(發卽刀), 도즉살(刀卽殺), 살즉패(殺卽覇)! 이 구결에 따라 시행해 보십시오."
그가 말하는 구결이란 간단한 것 같으나 매우 심오한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진일문의 심중에 한 가닥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이 일면 뻗어 나가고, 그것을 발동하면 도가 된다. 그리고 도를 펴면 무엇이든 벨 수 있어 천하를 주름잡게 된다......'
그는 내심 구결을 음미하며 우수를 앞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그의 체내 진기는 순식간에 팔뚝을 타고 손목으로 뻗쳤다.
우우웅......!
흡사 용(龍)의 울부짖음인 듯한 진동음이 울리더니 그것은 이내 상상치도 못할 굉음으로 이어졌다.
쩡--!
"오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경탄성이 울려 나왔다.
그들은 넋을 잃은 채 눈앞에서 벌어진 기적과도 같은 현상을 응시했다.
묵환은 어느 새 간 곳이 없었다.
그 대신 진일문의 손에는 한 자루 번갯불 형상의 도(刀)가 쥐어져 있었다.
"전설의 뇌정도! 내 살아 생전에 결국 이를 보게 되는구나."
병기점 주인은크게 감명을 받은 듯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른바 전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기병(奇兵), 그것은 섬뜩한 푸른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으나 어찌 보면 그 형상이 분명치 않아 환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 이것이 바로 뇌정도였구나.'
진일문은 멍하니 수중에 있는 뇌정도를 바라보았다.
무게도, 심지어는 도를 쥐고 있다는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즉 문자 그대로 그것은 마음(心),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스읏!
그는 손을 저었다.
그러자 한 가닥 눈부신 뇌전(雷電)이 맞은 편의 검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촤아악--!
다음 순간, 놀랍게도 검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곳에 남은 것이라곤 오직 시커멓게 탄 자국 뿐이었다.
"아!"
그 광경을 바라보던 병기점의 주인은 그만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실상 오랫동안 뇌정도를 탐냈던 장본인이었으나 설마하니 그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츳!
진일문의 손에서 뇌정도가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싶게 그의 손목에는 예의 묵환이 채워져 있었다.
"오오! 이럴 수가......."
진일문은 벅차오르는 희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비로소 뇌정도가 자신의 혈류와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당초 묵환이손목을 파고든 것은 바로 묵환에 포함되어 있는 모종의 장치가 혈도와 접합이 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지만 종내에는 단지 진기의 흐름에 따라 자유로운 발출과 회수가 가능했다.
뇌정도를 만든사람은 춘추시대의 인물이었다.
야소(爺 ).
그는 정녕 하늘이 낸 장인(匠人)이었다.
그의 유일한 고심이란 지상에 떨어지는 뇌전을 보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도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평생에 걸친 노력 끝에 마침내 한 자루의 도, 즉 뇌정도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제대로 사용할 인물이 없었다.
그 기운이 인간의 힘으로 부리기에는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뇌환공(雷幻功).
그의 손에 뇌정도가 들어간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뇌환공은 원래 도가의 인물이었는데 그 역시 일찌기 낙뢰를 보고 스스로 뇌정심법을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창안한 뇌정심법과 뇌정도법(雷霆刀法)은 그야말로 뇌정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당시 뇌환공은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흐름에 따라 그도 결국 진토로 화하고 말았다.
더우기 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고, 뇌정도는 아쉽게도 그의 대가 끝나자 실전되고 말았다.
아득한 세월의공백이 비로소 메워지고 있었다.
진일문이 그것을 단숨에 뛰어 넘어 뇌정도의 전인이 된 것이다.
뇌정도의 도신에는 뇌환공의 무학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뇌정심법과 삼초의 뇌정도식이었다.
희대의 기연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지?
첫댓글 즐감하구갑니다
즐감 입니다~~좋은 하루 되세요~~
작가님 감사 합니다`~
감사
즐감요!!!!
ㅈㄷㄱ~~~~~~~~~~~~~~~~``````````````````````````
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굿,,즐감,,,,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잼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즐독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재밌네요.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호랑이가 날개를 단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