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가은*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칸델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었네. 그 아래, 누렁개 한 마리가 뉘엿뉘엿 먹이를 찾아 다녔네. 아버지는 눈만 반짝이는 광부들을 지휘하고 있었네. 황금빛 해가 옥녀봉 꼭대기에 우스꽝스레 걸려 있었네. 나는 보았네 멋쟁이 신 선생이 도래실*로 가는 모롱이에서 어떤 키 큰 남자와 연애하는 것을, 봉암사 상좌승은 시주바랑을 메고 북쪽으로 가는 길 위 놓여 있었네. 나직한 돌담 너머 집들이 비틀 서 있었네
나는 보았네 어린 고염나무가 조랑조랑 매달고 있는 버거운 식구들을. 분홍 양산을 쓴 처녀들은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네. 도랑마다 물이 넘치고 둑방에는 문득 몸메꽃이 피어 있었네 검은 숲이 검은 새들을 날리고 있었네 나는 보았네 바람난 옥자가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고통처럼 길고 질긴 가죽혁대가 그녀가 날아간 허공에 떠 있었네
* 가은, 도래실 :경북 문경의 마을 이름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4.06.07. -
인생의 후반에 이르러 시인은 담담하게 어린 시절을 뒤돌아봅니다. 어릴 때는 그저 배경처럼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나이 들어 돌아보니 그곳에는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홍 양산”을 쓰고 “위험한 레일 위를 걷고 있는” 사랑에 빠진 “처녀들”과 “조랑조랑” 매달린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막장으로 가는” 광부들, “고압선”이 걸린 “전봇대”를 오르는 철없는 소년…… 그리고 그들의 인생처럼 위태로운 “집들이” 비스듬히 서 있던 마을. 그곳에서 수도승도, 아가씨도, 가장도, 주부도, 소년도, 노인도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쓰러질 것 같은 집들이 모여 있는 “비탈”진 곳에는 “도라지꽃”이 “자지러지게” 피어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인생이 “가죽혁대처럼” 길고 긴 고통의 과정이지만, 그 힘듦 속에도 아름다운 것들은 존재한다는 걸 일깨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