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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Jens Fellke 1982년 스웨덴 국내선수권 복식에서 준우승(파트너는 아펠그렌). 영화와 탁구 평론에서 폭넓게 활약하는 스웨덴의 저널리스트. 97년 "When the feeling decides… J-O Waldner"를 집필하였다. |
"지금까지 누가 너를 가르쳤니?"라고 코치가 물었다. "누구한테서도 배우지 않았어요"라고 6세의 발트너는 대답했다.
그날, 맨체스터의 G-MEX 체육관에서는 한사람의 플레이어에 대한 칭찬과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얀-오베 발트너가 벨라루스의 블라디미르 삼소노프를 꺾은 순간이었다.
발트너는 그 순간에 세계의 탁구계를 녹아웃시킨 것이었으나 동시에 자신도 녹아웃당한 것처럼 우승한 순간 바닥에 쓰러져서 드러누워 버렸다. 무겁고 커다랗게 쌓여온 그동안의 시간이 한꺼번에 그에게 덮어씌워진 것처럼......
그에게는 2번째의 세계선수권 우승이며 이 대회에서는 21게임(세트)을 연속으로 따내어 모든 시합 스트레이트(3대 0) 승리라는 말도 안되는 일을 이 "달인"은 해내고 만 것이다. 발트너는 이 대회에서 그 자신이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의 레벨로 뛰어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점프한 그가 센터 코트에 착지했을 때에 얀-오베 발트너는 역사상의 베스트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G-MEX 체육관의 바닥 위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발트너의 뇌리에 다양한 추억들이 흘러갔다.
아마도 그는 녹색의 낡은 탁구대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교외에 있던 그의 집의 작은 창고에 있는 탁구대였다.
거기에는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인 오케, 어머니인 마리안느, 2살 연상인 셸-오케가 거기에 있었다. 우선 모두가 "라운드 탁구"를 하면서 놀았다. 그것은 상대의 코트에 쳐넣으면서 모두가 탁구대 주위를 빙빙 도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보통의 탁구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5세의 발트너는 1점 1점 점수를 따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탁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부엌의 테이블에서 가족이 모여서 트럼프를 할 때나 여름에 별장에 가서 축구 시합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골을 넣고 싶어, 넣고 싶어!"라고 작은 얀-오베는 항상 떼를 쓰곤 했다. 스웨덴의 여름은 백야 때문에 밤에도 어둡지 않다. 그는 그런 놀이를 그만 하는 것이 싫었고 침대에 들어가는 것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은 아버지인 오케가 침대로 데려가기 위하여 안아올리면 얀-오베는 발을 동동거리면서 싫어했고 오케의 손에서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몸을 비틀면서 저항했다. 그리고, 그가 흘린 커다란 눈물이 정원의 잔디밭 위에 흘러떨어지곤 했다.
다음날 아침, 얀-오베는 모두가 아직 자고 있을 때에 일어나서 "아이스하키 게임"을 혼자서 시작하곤 했다. 이것은 판 위에 아이스하키 선수의 인형을 달아 놓고 그것을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봉으로 조종하여 상대의 골에 퍽을 집어넣는 놀이로서 스웨덴에서는 인기가 높은 게임이었다.
얀-오베는 혼자서 이 게임을 즐겼고 마음대로 세계선수권의 스웨덴 대 핀란드의 시합을 꾸몄다. 거기서 스웨덴이 득점을 올렸다고 침실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외치곤 했다.
"스웨덴이 이겼어요! 스웨덴이 이겼어요!"
72년 2월의 어느날, 형인 셸-오케가 겨울방학을 맞았을 때 어머니는 신문을 읽으면서 어떤 광고에 눈을 돌렸다. 그것은 "탁구 시합이 바스타토프 학교에서 열립니다!"라는 것이었다.
"서로 얘기해 본 후에 모두 함께 그곳을 향했습니다"라고 어머니 마리안느는 회상한다.
"아이들은 매우 즐거운 듯했고, 메달까지 따 왔어요."
그 토너멘트에서는 발트너 형제보다도 연상인 소년들이 선명한 라이트블루의 셔츠와 곤색의 쇼츠를 입고 플레이하고 있었다. 발트너 형제는 시합을 하면서 탁구라는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토너멘트가 끝나고 며칠 후부터 형제는 스톡홀름 남쪽에 위치한 "스팔바겐"이라는 클럽에서 본격적으로 탁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연습하는 날은 화요일과 목요일이었다. 그러나, 클럽의 연습장에 있는 SL 홀에 가족이 찾아가서 클럽 입회 수속을 하료고 했을 때에 한가지 귀찮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6살의 얀-오베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클럽에는 7살이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바스타토프 학교에서 열린 토너멘트에서 얀-오베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았던 연상의 소년들은 코치인 요한 멧사에게 셸-오케만이 아니라 얀-오베도 같이 들어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멧사 코치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결정하고 싶었다.
발트너 형제는 코치 앞에서 2, 3구를 쳐 보였다. 멧사 코치는 얀-오베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누가 너를 가르쳤니?"라고 멧사 코치가 물었다. "누구한테서도 배운 적 없어요"라고 6살의 발트너는 뺨을 붉히면서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멧사는 양친 쪽을 돌아보면서 대답했다. "OK. 그는 우리들과 함께 탁구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클럽의 마스코트가 되겠군요."
"나는 클럽에서 가장 서투른 채로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이때 "스팔바겐"의 탁구 부문(이 클럽은 종합 스포츠 클럽이었다)은 SL 홀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탁구대가 5대 있었다. 남자 팀은 몇 년 전부터 스웨덴 리그의 1부 리그에 올라가 있었다. 더우기 이 클럽이 유망한 것은 16세의 울프 토셀, 로져 라가펠트라는 촉망받는 젊은 선수들이 그 제 1선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팔바겐"에는 많은 젊은 선수들이 있고 그 중에 들어간 발트너 형제는 연습장의 구석 쪽에서 둘이서 공을 주고받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셸-오케는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연상의 사람들과 공을 주고받는 흔치 않은 기회-포핸드 드라이브로 공을 주고받았다-는 대단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스웨덴 내셔널 팀의 감독을 역임한 소렌 알렌도 역시 이 클럽에서 플레이하고 있었으나 발트너 형제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 뿐만은 아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저는 집에 돌아가서 어머지에게 불평했던 것 같습니다. 두명의 조그만 아이들(발트너 형제)이 새로 들어와서 연습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연습에 방해가 돼요."
발트너 형제는 일주일에 2회 클럽의 동료들과 함께 자동차로 연습장에 찾아왔다. 그리고 자택으로 돌아간 후에도 둘이서 창고의 탁구대에서 놀았다.
"클럽에 들어간 것에 의해 우리들의 탁구에 대한 흥미는 더욱 높아졌고 더욱 즐겁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점점 클럽의 경기자 그룹과의 기술적인 차이가 좁아져 갔다. 클럽에서 가장 서투른 채로 있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라고 얀-오베는 회상한다.
둘은 체스 클럽에도 들어가 있었으나 그것은 그만두기로 하고 탁구에 집중해 가게 된다. 72년의 여름방학, 발트너 일가는 스웨덴의 남서해안의 "칼마"라는 마을로 가서 클럽의 합숙에 참가하였다. 양친은 근처의 숙소를 빌려서 숙박하고 있었다. 합숙을 시작했을 때 얀-오베는 갑자기 워밍업을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옆에서 같이 하게 되었다. 이 합숙에서 그 지방 신문사가 이 작은 탁구선수를 인터뷰하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이것은 얀-오베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인터뷰였다.
가을이 되자 발트너 형제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다양한 대회에 출장하게 되었다. 셸-오케는 남자 클래스 D의 9세 그룹에 출장하였고 얀-오베는 7살이 되었지만 일반 소년부에 그 나이에 맞는 클래스가 없었기 때문에 형과 같은 클래스에 출장할 수밖에 없었다. 즉, 얀-오베는 2살 위의 키가 자기보다 20cm 정도 큰 집단과 시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발트너는 어린 시절부터 거물이 될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첫댓글 천재는 1%의 영감 99%의 노력이라고 하던데 그렇지도 않나봐요... 재능이란 어떤 사람을 향한 특별하신 계획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화목한 가정도 한 몫이군요!
지가 7살인 듯 한 기분이 슬슬 드는데요?,ㅎ,,,^^**
이동진님 소식 집어왔읍니ㅏㄷ. 대구의 신사 이동진님께서 열흘전 모친상을 당하셨다는 전갈이 늦게서야 도착하였습니다 먼저 삼가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