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김씨 '나탈리아'
하얀 피부에 금발머리, 키 크고 날씬한 서른세 살
나탈리아. 그녀는 우크라이나 출신 결혼 이주 여성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사람이다.대전 김씨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러
가서 서류에 김 나탈리아라고 썼더니 담당자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기에 서슴없이 “내가 지금 대전에 살고 있으니
대전 김씨”'라고 했단다. 객지에 살면서도 주눅 든 구석이
없이 밝아 보여 그녀에게 호감이 간다.
박 권사네 집에서 교우들 몇 명이 모여 백김치 담그던 날,
그녀를 처음 만났다. 다문화 가정을 돕고 있는 교우 한 분이
김치 담그는 법 배우라고 데리고 왔다.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치껏 싹싹하게 일을 잘 했다.한국어도 꽤 잘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우리와 금세 친해졌다. 그런데, 무슨 생각
에선지 그녀는 집 주인에게 다짜고짜 아기 돌 사진 좀 보여
달라고 했다.집 주인은 아들 돌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탈리아는 액자를 어루만지며 자기 아들도 이렇게 한복
입혀서 사진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2주 후면 아기 돌인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수없이 되풀이했다.
약간 뻔뻔해 보이는 돌출행동이 어이없긴 하지만, 그녀
눈빛이 너무 간절하고 애틋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기의 돌상을 우리 손으로 차려주기로 했다.박 권사와
나는 적은 예산 가지고 제대로 차리려고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아기 한복 모자와 염낭까지 사고, 파티용품
전문점에서 벽에 장식할 배너와 풍선, 돌잡이 용품 등을
샀다. 하루 전날엔 떡집과 과일가게, 제과점 등을 다니며
쓸 것을 미리 주문하고,얼굴이 벌게지도록 풍선을 불었다.
그럴듯한 파티장이되었다.시간이되자 그녀가 아기를안고
들어왔다. 거실에 차려진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더니
돌아서서 비죽비죽 울었다.
준비한 한복을 아기에게 입히고, 그녀에게 박 권사 한복을
빌려주었다. 한복을 입으며 그녀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자기 인생에 이렇게 좋은 날이 올줄 몰랐단다. 주인공 노릇
하느라 피곤했는지 아기가 잠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여유
롭게 나탈리아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12년 전에 한국에 와서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으며,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오늘 자기 아들이 이렇게 멋진 돌잔치를 하게 된 것은
기적이 분명하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겨우
서른 셋. 남들은 한 번도 안 갈 나이에 그녀는 시집을
두 번이나 갔다 왔다. 하고 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
이면 그녀는 그런 사람들만 골랐을까.
나탈리아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스물한 살 난
아가씨가 동경하며 꿈꾸던 세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생소한 문화 속에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녀는 온몸으로
부딪쳤고 가끔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당당한 한국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대전 김씨라고 칭하니
대견하고 고맙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를 더욱 깊이
박고 튼실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