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항포 들머리에서
십일월 둘째 목요일이다. 길을 나서면 어디나 시야에 든 주변 산하는 온통 만추의 서정이 넘쳤다. 어제는 도심 거리를 누비면서 울긋불긋 물든 늦가을 가로수 단풍의 진수를 완상했다. 용지호수로 나가 용지문화공원에서 관공서가 밀집한 중앙대로와 도청까지 걸었다. 이후 용추계곡으로 들어 용추고개에서 우곡사로 내려가 자여에서 시내로 복귀해 도계동에서 명곡교차로로 향했다.
그간 산이나 들판을 찾아 많이도 누볐다. 구절초나 꽃향유의 열병을 받으며 인적 드문 길을 무념무상 걸었다. 가뭄이 지속되는 속에도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은 방향으로 강둑을 걸으면서 제철에 핀 쑥부쟁이나 산국의 향기에 코끝은 호사를 누렸다. 목요일은 날이 밝아온 이른 아침 도시락을 준비해 자연학교로 등교했다. 이번에는 바닷가가 어떤지 궁금해 행선지를 바꾸었다.
집 앞에서 마산의료원으로 나가 당항포 들머리 진전면 정곡으로 가는 77번 농어촌버스를 탔다. 마산역이 기점인 버스는 어시장을 거쳐 댓거리에서 밤밭고개를 넘었다. 진동 환승장에 들러 진전면 소재지를 거쳐 탑동과 이명리에서 창포 해안을 지난 동진교에 내렸다. 고성 동해면과 창원 진전면을 잇는 당항포 입구에 놓인 동진대교는 공교롭게도 버스 번호와 같은 77번 국도였다.
7번 국도는 부산에서 경주 포항을 거쳐 삼척 강릉으로 동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77번 국도도 역시 부산 기점으로 마산 통영을 거쳐 여수와 완도에서 안면도와 태안으로 올라가 인천 파주에 이른다. 동해안에 검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7번 국도가 있다면 남해에서 서해로 올라가는 리아스식 해안에는 77번 국도였다. 마산합포구 진동에서 진전 연안으로 77번 국도가 통과했다.
동진대교는 호리병의 손잡이 목처럼 생긴 당항포 들머리에 놓인 다리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왜군을 당항포로 유인해 승리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 해전은 모두 해안 지형과 해류의 흐름을 이용한 승리였는데 당항포에선 독 안에 든 쥐를 잡은 꼴이다. 당항포 해전은 왜군 첩자가 지닌 지도를 변조해 승리로 이끈 ‘월이’라는 고성 기생의 전설이 전해 온다.
동진대교에서 국도변을 걸어 창포마을로 향하니 충수와 같은 잘록한 반도가 나왔다. 낙남정맥이 적석산에서 분맥으로 뻗어온 끄트머리 주회산 산자락에는 예천 용궁을 본관으로 쓰는 전(全) 씨 문중의 영모원 산소였다. 창포의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엔 모텔과 펜션이 들어서 있었다. 모텔과 펜션을 지나 해안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으니 끝은 어딜까 점점 궁금해졌다.
논밭이나 인가가 없이 바닷가로 뻗어나간 인적 드문 산지였고 연안 갯벌은 이명리 어촌계가 관리하는 듯했다. 산모롱이를 돌아 한참 가니 회산을 본관으로 쓰는 남와공파 황(黃) 씨 문중 가족 묘원이었다. 회산(檜山)은 창원과 마산의 옛 지명으로 창원 황씨라고도 한다. 엊그제가 음력 시월 보름이었기에 시제를 지내려고 후손들이 다녀갔을 여러 대 자동차가 지난 바퀴 자국이 보였다.
무서리가 내렸을 테지만 남녘 해안이라 길섶 쑥부쟁이는 연보라 꽃잎이 시들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산마루에는 바로 앞 유인도인 우도와 양도로 전기를 보내는 송전탑이 세워져 있었다. 전망이 좋은 자리를 골라 도시락을 비우고 도로를 내려서니 제법 넓은 연안에 캠핑카를 비롯한 사람이 머문 흔적이 보였다. 연안의 갯바위를 따라 돌아가니 아까 내가 지나온 동진대교가 드러났다.
빤히 건너다 보이는 연안은 고성 동해면이었다. 청정 해역 갯바위에서 서성이다가 내려왔던 길을 되짚어 산마루로 올라 국도변을 걸어 창포리로 나갔다. 수산물 선별장에는 이맘때 양식 어패류로 제철을 맞은 가리비를 포장하는 일손이 바빴다. 썰물로 갯벌이 드러난 창포만에는 새들이 날아와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암하마을 정류소에서 둔덕에서 나오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왔다. 22.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