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보문학카페> 등단시인방에서는 '남한산성'이라는 시가 올랐다.
시 내용 일부를 퍼온다.
삼전도의 굴욕을 기억하는 남한산성
소나무의 몸속에도 생생하게
나이테로 새겨져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아랫처럼 댓글 달고는 퍼서 세상사는 이야기방에도 올린다.
나한테는 글감이 되기에.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기억하는 남한산성'
서울 송파구 잠실지구 석촌호수 서호 둔덕에는 '삼전도비'가 있지요.
이따금 중국사람들이 삼전도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쏼라솰라 하대요. 그만큼 중국인한테도 알려졌다는 뜻이지요.
삼전도비 무엇을 뜻하는가요?
이 비는 서울 송파구 삼전동이 있었지요. 석촌호수 남쪽 길 건너편이 삼전동.
1636년 12월 청태종은 압록강을 넘어서 조선으로 급격히 내려왔지요.
쪼다 조선조 16대 인조는 급하게 피신하려고 경기도 남한산성을 도망쳤고
그 추운 겨울철, 남한산성에 뭐가 있겠어요? 춥고 배고프고..
47일 정도 버티다가는 항복해서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으로 내려와 맨발로 선 채 9번 절하고 굽신거렸요.
돌팍에 이막빡을 찧으면서...
청태종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웠지요.
훗날 한강에 내던졌다가 꺼내서 송파구 삼전동에 세웠다가 고증을 거쳐서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수 동쪽 부위로 옮겼지요.
남한산성 축성(1624 ~26년 완공)에 관한 이희장군의 슬픈 전설도 있지요.
쪼다 이씨조선... 남한산성... 삼전도비... 청태종/아골타..
저는 예전에는 이따금씩 올랐는데 퇴직한 뒤로는 별로 오르지 않았지요.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병자호란 당시에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도망쳤던) 조선조 제16대 인조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버티다가는 끝내 항복해서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와서 항복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퍼왔다.
'... 1636(인조 14)년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병자호란).
방비를 안 했던 조정은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12월 14일 허둥지둥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청군은 산성을 함락시키진 못했지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학살하고 마구 납치해 갔다. 준비 없이 산성으로 들어갔던 인조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1월 30일 항복했다.
인조는 저들의 요구대로 청 태종이 머물고 있던 삼전도 군영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로 땅을 찧는 것)를 했으니 죽음보다 더한 수모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저들은 공덕비를 세우라고 했다. 그래서 받침돌인 귀부(龜趺)를 만들었더니 작다고 하여 크게 만들어 세운 것이 대청황제공덕비(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너비 1.4m)다. 비석 상단에 가로로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그 밑 앞면에 몽고어와 만주어가 각각 20자씩. 뒤에는 한문으로 된 3개 국어가 들어 있는 국내 유일의 비석이다. 세워진 동기는 불순했지만 글씨 쓴 것과 비석을 만든 것은 우리의 솜씨다. 오랜 풍상에 시달려서인지 글자는 마모되어 보이지 않았다.'
'...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했다.'
'...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 등을 볼모로 데려갔다.
조선인 여자 50만 명도 함께 끌려갔다.
당시 심양 시장에서 팔린 조선인만 해도 66만여 명이나 됐다.
인조가 항복의 예를 마친 뒤 백관과 함께 도성으로 향할 때, 포로로 잡힌 남녀 조선인 1만여 명이 길의 좌우에서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라며 울부짖었다.'
1925년 한강 대홍수로 쓰러진 대청황제공덕비
2010년에 송파나루공원에 이전 : 현재의 모습이다.
참고 :
화냥년 :
' ... 중국에서 기녀를 가리키는 말 ‘화낭(花娘)’이 있다. 정묘호란(1627년)이나 병자호란(1636년) 때 적들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들을 가리켜 화낭과 비슷한 발음의 환향녀(還鄕女)로 빗대 쓴 듯하다. 이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오랑캐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하여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결혼한 여성의 경우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인조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환향녀란 이유로 이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쪼다 이씨조선 가운데 특히나 선조, 인조는 ...
아쉽다. 이런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현실이...
조선조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원종)가 왕이냐?
왕은 아니다. 그런데도 왕 대접을 해야 하는가?
' ...김포 장릉은 조선 16대 왕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가 묻힌 곳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40개 중 하나다. 김포 검단 신도시 아파트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범위인 장릉 외곽경계로부터 500m 이내에 지어지고 있다.'
2021년 11월 현재
경기 김포시 장릉(사적 제202호)에서 문제의 검단 신도시 아파트가 건설 중이다.
장릉 500m 이내에 건물이 들어섰다. 장릉이 문화유적지라면서 아파트 일부를 철거해야 하는지로 다툼이 생겼다.
내가 보기에는 이 장릉은 왕릉이 아니다. 파묘해서 다른 곳으로 이장하면 된다. 2021년 지금이 이씨조선시대도 아니다.
전국에는 무덤들이 넘쳐난다. 국토 1% 이상이 무덤이다. 무덤의 숫자, 크기, 제례 등을 크게 줄여야 한다.
파묘해서 납골당에 이전하고 대신 국민이 사는 아파트 등을 지어야 할 게다.
지금은 새로운 세상이며,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사회이다. 무덤보다는 집이 없는 국민을 먼저 보듬어야 한다.
내 경우이다.
선산의 많은 무덤을 파묘하여 한 곳으로 집중했으며, 봉분 크기도 아주 작게 썼으며 각종 석물 등을 철거해서 없애고.. 단지 누구의 무덤인지를 알리는 작은 비(와비)를 세웠다.
이희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남한산성을 축조하던 이희장군을 모함해서 처형했고, 그의 부인은 자결하고...
이희장군에 관한 와비가 최근에 삼전동 주민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 공원 안에 설치했다.
남한산성 축조했던 이희장군에 대한 야사를 조금 인용한다.
'.. 수어장대 건물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주민들을 지키는 수호신인 이희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주민들이 신으로 받들어 모실 만큼 이희장군은 남한산성의 역사에서 특별한 인물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이희장군은 성남쪽 성벽을 쌓는 도중 공사비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남한산성 서장대 앞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구명성금을 모으기 위해 각지를 돌아 다니던 아내 송씨부인은 사형소식을 든고 통곡하다가 쌀을 한강에 모두던지고 자신도 투신하고 맙니다. 나중에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한결과 이희장군이 쌓은 남쪽벽은 미완성이나마 견고하게 축성된 것이 밝혀졌답니다.'
2021. 11. 19.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