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150장(통일 135장; 갈보리산 위에)
[오늘 예수님 행적 지도]
예수님 이동경로: ⑦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 ③예루살렘 성전 산헤드린 공회 ⟶⑨빌라도(총독관저) ⟶ ⑩헤롯 안티파스 궁 ⟶ ⑪빌라도(총독관저) ⟶⑫골고다 언덕 ⑪⟶⑫ 사이가 고난의 길(Via Dolorosa)
[고난주간 제6일(금) 예수님 행적 개요]
주 제 | 때와 장 소 | 마 태 | 마 가 | 누 가 | 요 한 |
산헤드린공회에 서신 예수님 | 새벽, 대제사장 관저 | 26:57, 59 | 14:55-65 | 22:63-71 | |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 새벽, 총독 관저 | 27:11-14 | 15:1-8 | 23:1-5 | 18:28-38 |
안티파스 앞에 서신 예수님 | 아침, 안티파스 궁 | | | 23:6-12 | |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 아침, 총독 관저 | 27:15-30 | 15:6-19 | 23:13-25 | 19:1-16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 9시, 골고다 언덕 | 27:35-49 | 15:24-37 | 23:33-45 | 19:18-30 |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 15시, 골고다 언덕 | 27:50 | 15:34, 37 | 23:46 | 19:30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님 | 해지기 전, 묘원(墓園) | 27:57-60 | 15:42-47 | 23:50-56 | 19:31-42 |
[오늘의 묵상가이드]
오늘은 새벽부터 심문과 재판을 받으시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다.
[말씀 묵상- 가상칠언(架上七言)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
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첫 번째 말씀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인간에 대한 심판의 집행인 동시에 용서이다. 이 용서에 대한 기도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나올 때 기꺼이 용서하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두 번째 말씀은 ‘약속’이다. 처음에는 예수님 양 옆에 매달린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다. 그런데 나중에 두 명의 강도 중 한 명은 비방하기를 멈추고 예수님을 변호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했다. 주님은 강도를 용서하고, 낙원을 허락하신다.
행악자(κακοῦργος)라고 표현된 헬라어 단어는 ‘범죄자’ ‘강도’ 등을 뜻하지만, 이들은 반란을 위해 살인한 자들이다. 당시 로마는 극악무도한 살인자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두 부류의 죄인들에게 십자가형을 내렸다. 죄인 중 한사람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가 어떻게 ‘당신의 나라’라고 말했을까?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나라’는 육적인 나라이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개한 행악자는 죽어가면서 ‘당신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발견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돌아섰다. 이 땅의 것들로부터 벗어나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께로 돌아섰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한 행악자는 아직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른 사람은 구하면서 왜 너는 네 자신을 구하지 못하느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강도는 영적인 눈을 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천국은 지식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으로 볼 수 있다.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신다. 아직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믿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했던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신다. 숨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시기에 어머니를 생각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무 감정도 없는 그런 초월적 존재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을 입었으며, 여자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피곤하고, 배고프고, 슬픈 감정을 느끼셨다. 인간이 가진 아픔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다. 또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육신의 어머니가 갖는 고통을 이해하신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아 할례를 받으러 갔을 때 시므이는 마리아에게 칼이 마음을 찌르듯 아플 것이라고 예언했다.(눅 2:35) 예수님의 육신적 어머니가 평생 지고 가야 했던 고통의 짐이다. 주님은 이 모든 아픔을 아시며, 마리아를 위로하며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부모 공경하기를 멈추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이미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시면서도 청소년시절 예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해보자. “예수께서 (부모와)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8)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하셨다. 주님은 철저히 버림받으셨다. 주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마치 이 부르짖음은 ‘왜 나를 버리십니까?’ ‘저를 버리실 만큼 죄인들이 가치가 있습니까?’라고 물으시는 듯하다. 그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해 보자.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아들과 맞바꿀 만큼 제가 가치 있는 인간입니까?” 구원은 신비이며, 아이러니이다.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어야 한다. 주님의 외침을 들을 때 우리는 영원한 침묵으로 일관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내가 과연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1.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2.손과 발 날 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3.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목마름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다.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몸에서 피와 수분이 빠져나갔다. 목마름은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준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워하시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었고, 율법 아래에서 나셨다. 자기를 비하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주님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우리가 주님의 목마름을 묵상하면서 진정한 목마름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셨다. 그러나 주님의 그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님의 목마름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목마름이었다. 주님의 목마름은 육신의 목마름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죄인들이 주님 당신을 통해 구원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이었다. 마지막까지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감당하시는 주님의 목마름을 묵상해 보자.
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완전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 사람의 성공은 완전하지 않다.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살면서 실수도 하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죄를 짓는다. 자신이 생각하고 꾼 꿈을 완전히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의 형편을 보자. 무엇을 이루었단 말인가? 제자들은 배신하고 도망갔다. 악은 여전히 강력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한다. 주님은 지금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신다. 누가 봐도 실패한 인생이며, 어떻게 생각해도 제대로 성공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대체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 구속의 완성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인류를 향한 완전한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주님의 죽음은 저주 받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으로 살리는 역설적 죽음이다.
오래전 광야에서 들렸던 놋뱀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셨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 죽어갔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높이 세우라고 하시며, 놋뱀을 본 자마다 살아나리라 약속하셨다. 주님은 놋뱀처럼 높이 들려졌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 주님은 죄의 상징이자, 율법의 저주받음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받으셨고, 죄인들이 받아야할 고통과 죽음을 친히 감당하셨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보는 자들은 살아날 것이다.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7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
가장 강하신 주님께서 가장 약한 사람이 되셨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반항하지 않았고, 요동치지 않았다.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물과 피를 흘리시고 운명하셨다. 주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은 하나님께 의탁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오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영혼을 맡길 수 없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위대한 일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임을 우리 주님은 운명하시면서도 친히 보여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