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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밝혀진 내력(來歷)
밀실(密室).
일남일녀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탐색하려는듯 오랫동안 상대방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일문과 옥가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탁자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차가 이미 식어 버린 채 놓여 있었다.
진일문이 먼저입을 열었다.
"이제 부탁할 일도 없어졌다면서 나를 왜 꺼내 주었소?"
옥가려는 잠시영악한 기지가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먼저 물어볼 말이 있어요."
"물어 보시오. 그러나 꼭 대답한다는 뜻은 아니오."
"간단한 거예요. 당신과 왕중헌(王中軒)은 어떤 관계인가요?"
진일문은 피식웃었다.
"역시 그 질문이었소? 그 문제라면 구천마옥의 주인인 영호염(令弧焰)이 더 잘 알 것이오. 그는 단지 그 한 가지만으로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사람이니 말이오."
옥가려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중대한 문제예요. 진심을 가지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화는 계속될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은 피차 일반이오. 나 역시 그대의 진심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말해줄 수가 없소."
"농담이 아니에요. 당신은 삼성림의 악인부에 올라 있는 중죄인으로써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고 협상하려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만 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 신분인즉 삼성림내 구대천궁의 하나인 비월궁의 소궁주이니까요."
진일문은 그만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듣기에도 그녀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는 진지한 어투가 되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분은 내 사부요. 하지만 무공을 전수 받은 적은 없었소. 나는 그 분이 무림인인 줄도 몰랐으며 학문만을 배웠을 뿐이오. 헤어진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소."
옥가려는 한 동안 그의 말이 사실인지를 가려 내려는 듯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이어 그녀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사실 우리의 대화는 큰 모험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나는 그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했어요."
진일문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옥가려는 마치 다짐이라도 받아 두려는듯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당신은 정말로 양대협의 손자인가요?"
"물론이오."
"공인할 만한 물적 증거라도 있나요?"
진일 문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대답을 기피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잃어 버렸소. 그러나 내 어머님은 분명 양혜경이라는 함자를 갖고 계셨소."
옥가려는 한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한참 후에야 그녀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물어 보시오."
"당신의 성(姓)은 정말 진씨(眞氏)인가요?"
그것은 진일문으로서는 그 어떤 질문보다도 황당한 것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무릇 성이란 인간의 뿌리를 의미하는 것이거늘, 성을 속이는 사람도 있소? 기막힌 질문이오만 분명히 대답해 주겠소. 내 성은 틀림없이 진가요."
그의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옥가려는 여전히 심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당신의 아버님은? 아버님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진일문은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야 부친의 이름 석자가 고작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노릇이었다.
마침내 그는 탄식을 불어내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부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소. 다만 함자만을 알고 있을 뿐이오."
옥가려는 그 말에 자못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부친의 성함은......?"
"진중서(眞重書)라는 분이시오."
"아!"
옥가려는 탄성을 발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모습이었다.
"대체 왜......?"
오히려 진일문이 놀라 묻고 있었다.
옥가려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신음이라도 쏟아내듯 재차 물었다.
"그것이... 정말인가요?"
"물론이오."
옥가려는 어찌된 영문인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진일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부친께서는... 살아 계신가요?"
진일문은 다시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그녀보다 오히려 그 자신이 더 알고 싶은 일이었다.
그는 실소와 더불어 심경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그 점은 나 역시 알고 싶되 모르고 있는 일이오. 아니, 나는 부친의 얼굴조차 한 번도 뵌 적이 없소."
"아!"
옥가려의 아름다운 눈에 일순 세찬 출렁임이 일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진일문을 잡아 끌었다.
"나를 따라 와요, 당신이 꼭 만나야 할 분이 있어요."
한 가닥 음성.
"오오! 저 아이가 정말 진사형(眞師兄)의 자제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딘가 모르게 닮은 것 같구나."
휘장 뒤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은 격동으로 인해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진일문도 진사형이라는 호칭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휘장에 비친 그림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곳은 옥가려의 안내로 오게 된 밀전(密殿)이었다.
"그런데 얘야, 너는 진사형의 아들이면서 그의 얼굴도 모른다고? 그 말이 사실이냐?"
자애스러운, 그러나 일면 탄식이 깃든 음성이었다.
진일문은 그만 콧날이 시큰해져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얼굴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럼 혜경은? 그녀는 어찌 되었느냐?"
"어머님께서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
휘장이 바람에휘날리 듯 마구 흔들렸다.
그 안의 여인은 심한 충격을 입었는지 한동안 침묵했다.
진일문은 시선을 돌려 한 쪽에 서 있는 옥가려를 쳐다보았다.
휘장을 향하고 있는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얼마 전의 그 영악하고 교활한 모습에 비한다면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전혀 다른 여인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너를 좀더 자세히 보고 싶구나."
휘장을 격하여들려오는 음성은 진일문에게 있어 마치 생전의 어머니를 대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쪽으로 다가갔다.
휘장 속에서 흰 손이 나와 진일문의 손목을 잡았다.
'따스하다! 무척.......'
진일문은 내심읊조리며 그 손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태사의.
삼십대 정도로보이는 궁장의 미부(美婦)가 앉아 있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기품이 있는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격동에 찬 시선으로 진일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아! 과연 너는 진사형을 빼어 닮았구나. 틀림없다, 너는 그 분의 아들이다."
그 말에 진일문은 묵묵히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끌러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옥사자가 조각된 패옥으로써 앞면에는 사자상이, 뒷면에는 무거울 중(重)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머님께서 제게 주신 아버님의 신물입니다."
"그렇구나. 나도 예전에 이것을 본 적이 있단다. 분명 사형의 것이 맞다."
궁장미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그러한 그녀의 눈에서는 한 가닥 애틋한 정(情)과 더불어 짙은 아픔이 동시에 배어 나왔다.
이윽고 미부는목걸이를 돌려주며 탄식을 불어냈다.
"얘야,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소상히 말해 보아라."
진일문은 그녀로부터 질문을 받게 되자 반대로 부모에 대한 것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지내온 일들을 대체로 숨김없이 말했다.
먼저 어머니와함께 유랑극단을 따라 천하를 떠돌던 얘기에서부터 어떻게 하여 어머니가 죽었으며 자신이 왕사부에게 의탁 되었는지를 털어 놓았다.
그 이후 왕중헌과 헤어져 거지들 속에서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던 일, 그리고 다시 서원으로 돌아갔다가 혈궁의 사자들에게 잡혀 구천마옥에 갇혔던 일까지도 얘기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의 모진 고문이나 황룡사가보에서 겪었던 일 등은 말하지 않았다.
그 부분은 이미 옥가려가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궁장미부도 모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비취암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빠뜨리지 않았다.
은(恩)과 원(怨)이 뒤엉켜 있으므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죽음의 추적이나 그 끝에서 만나게 된 기이한 인연들, 즉 현고자나 환우오사와의 일화들도 얘기했다.
실상 그것이야말로 현재의 그가 있게 된 기반이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차분한 진일문의 음성은 단순히 살아온 나날들의 고백이 아니라 고달픈 운명을 맞이해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일대기를 전하는 것 같았다.
그의 기나긴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궁장미부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동정과 연민이 엿보이는가 하면 일면 대견스러워 하는 듯한 기운도 내비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중 악의적인 요소는 일체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곧 그녀 스스로가 이를 말함으로써 입증이 되었다.
"아이야, 정말 훌륭하구나. 그 혹독한 고난의 세월을 겪었으면서도 이토록 헌헌한 장부로 성장해 있다니....... 지하에 계신 네 어머니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게다."
궁장미부는 이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는듯 진일문의 손을 잡아 무릎에 올려 놓았다.
'아니! 대체 이것은.......'
진일문은 때아니게 내심 부르짖음을 발했다.
그녀의 무릎이 몹시 딱딱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다리 같지도 않았다.
그의 놀란 표정을 보자 궁장미부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에 덮혀 있는 비단천을 걷어 보였다.
"아!"
진일문은 비로소 그녀의 다리가 전하는 감촉이 왜 그러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비단천이 걷혀 나간 자리에는 다리 대신 나무로 만든 의족(義足)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도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하기 편하게 되어 있는 특수 의자였다.
"얘야,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구나. 이제 너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 되었으니 내가 알려 줄 차례인 것 같다."
진일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엇이 가장 궁금하느냐?"
진일문은 그녀를 정시하며 물었다.
"먼저 제 부모님과 어떤 관계이신지 알고 싶습니다."
미부는 입가에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까도 말했듯이 네 부친은 내 사형이시란다. 우리는 동문사형제였지. 그리고 네 어머니는......."
문득 그녀는 말을 끊더니 고통스러운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야 다시 이었다.
"네 어머니와 나는 본래 아주 친한 사이였었지. 친자매 이상으로.... 그러나 후에 네 부친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소원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네 어머니와 내가 다 함께 그 분을 사랑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린 정적(情敵)이었단다."
"으음!"
진일문은 신음을 흘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던진 질문으로 인해 미부가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게 될 줄은 미처 짐작도 못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미부가 그의 심중을 알아 차린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에 둘 것 없다. 모두 지나간 일이니까. 그 때의 감정은 지금 생각하면 한낱 치기 어린 것들이었단다. 다만 그로 인해 내 스스로 천추의 한(恨)을 남기게 된 것이 한탄스럽구나."
그녀의 눈에서는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으나 그녀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 했다.
"한낱 질투로 인해 나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관했단다. 크나큰 죄를 범한 것이지."
회한(悔恨)으로 인해 미부는 아미월 같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진일문은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리려는 것인가?'
그는 미부의 말에서 그녀의 울부짖음이 자신의 부모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는 그가 기다리던 해답이 되는 셈이었다.
궁장미부는 의외로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이십삼 년 전, 삼천공(三天公)께서 폐관하면서부터 였지."
그녀는 바로 무림인들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일대 비사(秘事)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삼천공.
그들이 혈풍의난겁 속에서 무림을 구해냈다는 것은 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 날 무림이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정녕 중원 무림의 구성(求星)이자 천하안녕의 대업을 이룩한 수호신이었다.
오십 년 전.
마교(魔敎)가 창궐하여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들은 무림제패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심지어는 이역의 오랑캐들까지 끌어들여 전 중원을 짓밟았다.
그러나 당시 중원무림은 속수무책이었다.
마교의 힘이 미증유의 것인데 반해 무력한 무림은 그나마도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칠대문파는 복잡한 은원관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상잔을 거듭하고 있었고, 게다가 원황실(元皇室)의 이간책까지 가세
되자 중원 무림은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마교는 바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원(元)의 무인들과 손을 잡고 무림을 정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 이전에도 중원 무림은 한(漢) 왕조를 지키기 위해 반원의 대전에 동참하고 있었으니 마교와는 세불양립의 적대관계였다.
십절천기(十絶千技) 동방절호(東方絶戶).
마교의 교주인그는 마교 내에서는 물론 무림에서도 공히 개세의 고수라고 지칭되는 인물이었다.
동방절호도 애초에는 반원복한(反元復漢)에 가담했었다.
그리하여 그를중심으로 수많은 의인들이 모여 들었다.
그의 뛰어난 무공과 인품, 탁월한 영도력을 굳게 믿은 그들은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방절호는 어느날 갑자기 안면을 바꾸었다.
천하를 기만하고 원의 앞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휘하에 있던 영웅들은 기련산(祁連山) 낙혼애에서 몰살 당하고 말았다.
그의 지시에 따라 그 곳에 집결했다가 원의 매복에 걸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했다.
그 사건은 중원무림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동방절호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대반역자로 통했다.
무림인들은 통분한 나머지 저마다 이를 갈았다.
하지만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무예를 가진 동방절호를 꺾을 수 있는 자는 무림을 다 뒤진들 아무도 없었다.
참극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무림정복의 야망을 표출시켰다.
덕분에 무림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갔다. 도무지 피가 마를 날이 없는 가운데 점차 존폐의 벼랑으로 떠밀려 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동방절호가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가장 신임하던 삼인의 고수가 그를 유인해 천산(天山)의 무극단(無極檀)에서 추락시켜 버린 것이었다.
원래 그들 세 고수는 동방절호의 수하였다.
즉, 마교에서 가장 강하다는 삼인의 교령(敎令)이었다.
그들이 하극상을 불사하고 그 일을 단행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마교의 일원이기 이전에 중원의 후예였던 것이다.
비록 동방절호를 존경해 왔던 그들이었으나 그의 변심에는 역시 등을 돌렸다.
그들은 모의 끝에 마침내 동방절호를 무극단의 계곡 아래로 떨어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또한 마교의 조직을 무너뜨리는데 그야말로 혼신을 다 바쳤다.
그 결과로 수년이 지나자 마교는 뿌리까지도 철저히 분쇄되고 말았으니, 이 모든 것이 그들 삼인의 공적이었다.
천하도인(天下道人).
천검불패(天劍不敗).
만상군자(萬相君子).
이들을 일컬어중원 무림이 소위 삼천공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부터였다.
그 뒤로도 이들 삼인은 무림 내에서 반원의 힘을 다시 모으는 데 주력했으며 마침내 원을 만리장성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그러니 칠대문파를 위시하여 삼교구류(三敎九流), 또 백도의 수십개 문파가 연명으로 삼성령(三聖令)을 만들어 그들에게 바친 것은 능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삼천공은 천하가 평정되자 곧바로 은거에 들어갔다.
세인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해 그들의 은거지를 삼성림(三聖林)이라 불렀는데, 그 곳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르도록 무림의 성지(聖地)로 추앙 받았다.
삼천공은 이후로 약 삼십여년간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무림은 이례적으로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흑백도를 막론하고 삼천공을 의식한 나머지 반목이 정체된 것이었다.
어쩌면 삼천공의 은거는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이 무림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오히려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삼천공은 스스로 명리(名利)를 일체 포기하는 것으로써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부상하게 되었고, 색다른 방식으로 무림 평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불십년(勸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던가?
이러한 무림 태평성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세월이 흐름에따라 무림인들은 차츰 지난 날을 망각하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분열과 쟁투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 분란은 정도의 간판격인 칠대문파(七大門派)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들로 이르자면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을 중원무림의 종주로 자처해 온 명문대파였다.
그런 그들의 분란인즉 다름 아닌 삼성림이 원인이었다.
칠대문파는 삼성림이 성지가 되면서 자신들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되자 명예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오 년마다 한번씩 논검대회(論劍大會)를 개최하여 그 승자를 가칭 맹주(盟主)로 받들어 모셨다.
하지만 결국 이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암투와 모략이 싹트게 되었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급기야 그 영향은 무림 전역에 미치게 되었다.
중원 무림은 또 다시 혼란기로 접어 들었다.
그 소식은 삼천공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
- 어리석은 자들이여, 벌써 잊었단 말인가? 반목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십절천기 동방절호와 같은 자가 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 때의 무림 정세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국면을 치달리고 있어 삼천공조차도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로부터 불과 수년 후.
무림에는 또 하나의 대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무림 각대문파에 삼천공의 연명으로 된 서찰이 한 통씩 날아 들었다.
그 내용인즉, 삼성령으로 각 파의 장문인들과 무림 명숙들을 삼성림이 있는 숭산(嵩山)의 삼성곡(三聖谷)으로 초빙한다는 것이었다.
서찰을 받은 인물들은 크게 당황했다.
아무리 삼천공의 위세가 전날과 같지 않다고 해도 그들 중 감히 삼성령을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속속 삼성림으로 모여 들었다.
더우기 칠대문파와 삼교구류, 천하 각지의 수십개 군소방파 수뇌들이 총집결한 것은 삼성령이 선포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지라 오히려 더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삼천공은 생각지도 않은 제안을 해 왔다.
그들이 키웠다는 아홉 명의 소년들을 내세워 각 파의 주요 인물들과 대결하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실로 의외였다.
놀랍게도 각파의 고수들은 소년들의 십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급기야 장문인들이 나섰으나 그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소년들의 백초를 넘기지 못하고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이 일은 각대문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무림의 태산북두를 자처하던 소림은 물론 그들 모두가 완전히 의기가 꺾여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삼성림을 나왔으니.......
신비의 소년고수들은 일명 구대성군(九大星君)이라고 불리웠는데 팔남일녀였으며 삼천공이 공동으로 키운 제자들이었다.
그들의 출현으로 무림의 분열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게다가 삼천공의 통렬한 경고 또한 그들의 재준동에 제동을 걸었다.
- 아무리 철저하게 근절시켜도 잡초란 언젠가는 다시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이처럼 수천년 이래 수없이 타도 되었어도 기회만 있으면 또 새롭게 부활하는 것이 마도(魔道)의 생리다.
그리고 그대들의 반목은 바로 그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 말은 곧 하나의 경종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그 일이 있는 이후로 무림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무림의 각 파는 한결같이 삼성림에서의 치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일개 소년소녀에게 최고 고수들이 패하고 보니 그들로서는 모멸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즈음 삼성림으로부터 하나의 칙령이 각파에 하달되었다.
거기에는 소위구대천궁(九大天宮)을 세우겠다는 의지가 표명되어 있었다.
그 구대천궁이란 구대성군이 이끌게 될 삼성림의 호궁으로써 무림의 시비와 반목을 억제하는데 우선적으로 그 목적을 둔다고 했다.
그 외의 무림사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천명도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역시 가장 큰 목적은 마교의 잔당들이 무림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무림제파는 구대천궁의 설립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 구대성군이 마음만 먹으면 무림을 제압하는 것 쯤은 시간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이후로도 구대성군이 무림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삼천공은 무림인들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궁장미부의 얘기를 들으면서 진일문은 묘한 감정의 파고를 겪어야 했다.
그가 아는 현재의 삼성림과 그녀가 말하는 삼성림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분의 말이 분명 거짓은 아닐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진일문은 그 밖에도 심중에서 여러 가지 의문이 꾸역꾸역 일었으나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필시 이후로 무슨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굳이 이 얘기를 내게 들려주는 것도 역시 이유가 있어서겠지.'
실상 궁장미부에게 그가 물었던 것은 자신의 부모와 연관된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궁장미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얘야, 네 부친과 나는 바로 그 구대성군의 일원이었단다."
"넷?"
그녀의 이 한 마디가 던져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설사 벼락을 맞은들 이보다는 덜할 것 같았다.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아! 그래서 이 분이 아버님을 사형이라고.......'
미부는 한껏 치떠진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얘기는 실상 서론에 불과하단다."
"오오!"
"전대의 일이니까 그렇다는 뜻이지. 잘 듣거라, 네 아버님에 관한 사항은 이제부터가 본론인 셈이다."
그녀는 옛 추억을 더듬는듯 뿌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구대성군은 이름 외에도 각기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즉 탐랑(貪狼), 무곡(武曲), 파군(破君), 거문(巨門), 우필(右弼), 문곡(文曲), 좌보(左輔), 염정(廉貞), 녹존(祿存)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 팔남일녀 중 유일한 여인은 염정성군으로써 그녀의 이름은 하수진(河秀珍)이었다.
그들은 삼천공의 공동전인이었는데, 저마다 독특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만큼 습득한 무공도 달랐다.
삼천공이 이 아홉 명의 제자들을 거둔 데에는 특별한 의의가 있었다.
그들은 마교의 재창궐을 불안해 한 나머지 바로 그 대비책의 일환으로써 제자를 양성했던 것이다.
이 일은 또 무림의 분열과도 무관하지 않았으며 삼천공은 암중으로 이 아홉 명을 선발하여 무공을 전수하기에 이르렀다.
구대성군의 재능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것이었다.
그들은 삼천공의 휘하에서 나날이 급성장 했고, 종내에는 각 파의 장문인들을 간단하게 격파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로 인해 무림의 분란이 종식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직후, 구대성군은 삼천공의 지시에 따라 모두 삼성림으로 되돌아가 구대천궁을 건립하는데 주력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내부의 분열을 다스림과 동시에 외침(外侵)을 방비하려는 의도에서 키워진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이십삼 년 전, 삼천공이 삼성곡 내의 무천비동(無天秘洞)에 입동하면서 상황은 일변 되었다.
삼천공은 폐관직전, 구대성군의 첫째와 둘째인 탐랑성군과 무곡성군에게 후사를 당부했다.
그들 이인은 서열상으로도 수위였지만 무공도 구대성군 중 가장 강해 능히 자신들을 대행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삼천공의 명을 받은 탐랑성군과 무곡성군이 다른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삼천공의 명령 자체를 일곱 사제들에게 왜곡시켜 전달했다.
즉, 이름 뿐인 구대천궁을 실질적인 세력으로 확장시키라는 엄명을 받았노라고 했다.
탐랑과 무곡을제외한 칠대성군은 충격과 더불어 처음에는 몹시 의아해 했다.
본래 삼천공은 강호의 일에 나서는 것은 물론 조직을 갖추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했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워낙 삼천공을 신뢰하고 존경했으므로 길게 회의하지 않았다.
그 간접적인 명령에 따라 암암리에 세력을 구축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수년후.
마침내 구대천궁은 강호상에 등장했다.
그 사이에 구대성군의 무공은 더욱 발전해 있었고, 그들이 관장하던 아홉 개의 궁은 모두 나름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탐랑성군은 자신의 궁을 광명총궁(光明總宮)으로 명명하고는 은연 중 나머지 팔개 궁을 다스렸다.
그에 반해 무곡성군의 잠룡궁(潛龍宮)은 직접적인 활동보다는 수하를 키우는데 주력했다.
존립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파군성군의 혈궁(血宮)은 이미 광명궁주인 탐랑성군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
과연 혈궁은 그 이후로 강호에서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워졌다.
그것은 무림의 숱한 마두나 죄인들을 무작정 잡아 가두고 고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거문성군의 철기궁(鐵騎宮), 우필성군의 현음궁(玄陰宮), 문곡성군의 신조궁(神鳥宮), 녹존성군의 회천궁(回天宮), 좌보성군의 태양궁(太陽宮), 염정성군의 비월궁(飛月宮) 등도 모두 세력 기반을 든든하게 다져 놓고 있었다.
구대천궁.
그들은 삼성림이라는 후광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팽창해져 단시일 내에 기존의 문파들을 눌렀을 뿐더러 점차 무림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구대성군 개개인의 막강한 무공과 그들을 연결하고 있는 연맹적인 성격 때문에 그 어떤 문파도 감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구대천궁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무림 평화를 추구한다는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패류(覇流)를 달리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구대천궁의 연맹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패(覇)라는 것이 의례 그렇듯 종국에는 절대성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구대천궁은 두 개로 갈라졌다.
탐랑성군을 중심으로 한 광명궁을 위시하여 혈궁과 현음궁, 회천궁이 그 한 쪽이었고, 무곡성군의 잠룡궁이 철기궁, 태양궁, 신조궁 등과 손을 잡았다.
염정성군의 비월궁만이 중립을 지켰다.
이는 사실 탐랑성군과 무곡성군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무공이 강한 만큼 개성도 강한 인물들로써 매사에 뜻이 맞지 않았다.
한 가지 닮은 점이 있다면 두 사람 다 무림독패라는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마침내 그들은일대 전쟁을 벌였다.
그 동안 묵묵히 수하들을 키워온 무곡성군이 먼저 광명궁을 쳤다.
거기에는 태양궁과 신조궁, 그리고 철기궁이 가세 했다.
그것은 연 삼주야에 걸친 처절한 혈투였다.
이 싸움에서 무곡성군 등은 대패했다.
광명궁 측이 이미 정보를 입수하여 그들을 완벽하게 몰살시킬 수 있는 함정을 파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삼성곡은 온통 피로 씻기우고 말았다.
시체가 산을 이루는 가운데 광명궁은 승리의 개가를 울렸다.
그것은 또 탐랑성군의 주도권 장악을 자축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무림 전역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자 탐랑성군은 즉각 전 무림에 삼성령을 발동해 무곡성군이 무림정복을 꾀하다가 들켜 척결 되었다고 공표했다.
무곡성군은 분루를 흘리며 그 곳을 탈출했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탐랑성군은 역시 삼성령으로 그의 추살 명령을 내렸다.
그 명은 곧 천하지상의 것이었다.
덕분에 무곡성군은 천하에서 발 붙일 곳을 잃고 말았다.
무림수호의 기치를 드날리던 구대성군의 일원에서 졸지에 대마왕(大魔王)으로 전락해버린 것도 그 때부터였다.
무곡성군.
그가 바로 왕중헌(王中軒)이었다.
거듭되는 충격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했다.
'아! 왕사부께서 무곡성군이셨다니.......'
그의 뇌리에는부지 중 은천서원에서 학문을 가르치던 한 중년문사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듯 놀라는 일면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과연 사부님은 악인도, 대마왕도 아니셨다. 단지 평생 동안 쫓기는 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불운한 분이었을 뿐.이다.'
진일문의 눈에문득 한 가닥 연민이 어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더불어 잔잔한 그리움으로 이어졌다.
'뵙고 싶다! 지금은 또 어느 곳에 은둔해 계실지......?'
염정성군 하수진은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아이야, 실상 나는 네 부친이자 당시의 신조궁주였던 문곡성군께 큰 죄를 지었단다. 내가 만일 질투로 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화개악(華蓋嶽)이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을텐데......."
말 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진일문이 물었다.
"화개악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탐랑성군의 이름이란다. 광명궁주이기도 하지."
그는 하수진의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시의 싸움에서 무곡성군과 함께 패자(敗者)로 몰렸던 부친의 생사 여부였다.
"저의 존부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하수진은 그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나로서도 의문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구나. 철기궁주와 태양궁주는 탐랑의 손에 죽었다. 왕사형과 진사형, 두 사람만이 그 곳을 빠져 나갔었지. 그런데 이후로 왕사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지만 진사형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으음......!"
진일문은 낮게탄식을 불어냈다.
부친의 실종은 어떤 면에서 사망 소식보다는 백배 나았다.
하지만 찾았구나 싶은 순간 부친의 그림자는 다시 저만치 멀어지고 만 것이다.
"당시 혜경은 진사형을 아이를 갖고 있었지. 진사형이 행방불명된 후, 그녀도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의당 그녀가 사형을 찾아 갔으리라고 생각했었지."
진일문은 생전의 어머니가 눈 앞에 선연히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천하 곳곳을 떠도는 유랑극단에 속한 채 늘 누군가를 찾던 그 모습까지도.......
'그 때 어머니께서는 바로 아버님을 찾고 계셨었다.'
그는 새삼 가슴이 찢기우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양혜경.
그녀는 도성 양원종의 딸로 강남제일미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도성이 그녀에게 일체의 무공수련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문곡성군 진중서와의 인연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그는 강남을 유람하던 중 항주에서 양혜경을 발견했다.
그는 한 눈에 그녀에게 반해 구애를 하기에 이르렀고, 두 남녀의 애정은 불붙듯 급격히 타올랐다.
사실 진중서는그 전에 염정성군과 염문이 있었다.
하지만 양혜경을 보자 마음이 돌아서고 말았다.
그것은 염정성군에게서는 볼 수 없는 여성적인 분위기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하수진은 정인의 변심을 알고는 질투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무공을익히지 않는 양혜경을 약간은 경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연적(戀敵)이 된다는 것은 실로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그 때에 이미 양해경은 태중에서 진중서의 아기를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하수진은 자신을 버린 얄미운 정인에게 복수를 했다.
미리부터 왕중헌 등을 제거하려는 화개악의 음모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이를 진중서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월궁주 하수진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얘야, 너는...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진일문은 대답대신 멍한 표정으로 천정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대체 무엇을 용서 하며, 무엇을 용서 받겠는가?
그는 전대의 비사를 통해 차라리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어찌 그런 일이....... 하지만 아버님과 왕사부가 그렇듯 어쩌면 이 분도 피해자일 수 있다. 내 존재를 꺼리기는 커녕 이처럼 사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이 분은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죄과에 대한 형벌을 치루셨을 것이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탐랑성군 화개악, 광명궁주......."
이 읊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 자신도 아직 알지 못했다.
일단은 그저 허탈한 심경이 되어 모든 불행의 원인 제공자인 그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곁에서 하수진은 탄식을 불어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내심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갸웃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이야,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구나. 너는 분명 십년 가까이 왕사형과 지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하수진은 미간을 곱게 찌푸렸다.
"따지고 보면 왕사형은 네 부친과 뜻을 같이 했으며 동시에 몰락했던 분이다. 운명을 공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왜
그 분이 십년 동안이나 굳이 네게 이런 내력들을 숨겨 왔는지 납득이 가지를 않는구나."
그 말에 비로소 진일문도 한 가닥 의문이 일었다.
'그렇군. 사부께서는 애초부터 내 신상에 관한 것들을 모조리 알고 계셨으면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을까?'
그는 새삼 왕중헌과의 조우, 그리고 함께 지내던 나날들을 더듬어 보았다.
진일문의 모친은 깊은 병이 들어 있었다.
어린 자식이 딸려 있는 데다가 무공을 모르는 여인으로써 천하를 방랑하며 무희 노릇을 하자니 일찌감치 기력이 쇄진해 버린 것이었다.
극단에서는 더이상 쓸모가 없어졌다고 여겼는지 그녀를 쫓아냈다.
당시 진일문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들 모자는 이후로 거리에서의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갔다.
바로 그러던 중 우연히 왕중헌을 만났다.
그는 단지 길을 가던 한 사람의 행인으로써 동정심에서 거지 모자에게 동전 한 문을 던져 주었던 것 같았다.
반면에 그의 얼굴을 본 양혜경의 반응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비록 오래 전의 일이기는 하나 진일문은 그 때 어머니가 그를 보자 몹시 격동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왕중헌과의 첫 만남이었고, 두 번째의 만남은 모친 쪽에서 그가 머물고 있는 객점을 찾아감으로써 이루어졌다.
진일문은 모친과 왕중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눈물을 비오 듯 쏟아냈던 모친과 충격을 입은 듯한 왕중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에 모친은 이미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한 나머지 전자의 인연을 빌어 왕중헌에게 진일문을 의탁시키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어머니는더 지탱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진일문은 그 날로부터 왕중헌을 따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진일문이 하수진의 말에 동조하게 된 이유는 실상 그 후에 보아왔던 왕중헌의 기이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날더러 늘 심약하다고 나무라셨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나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당시의 어린 그로서도 한 가지만은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왕중헌이 그를 각별히 총애하면서도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었다.
즉, 사부에 대한 신뢰가 깨질까 두려워 무의식 중에 완강하게 부인해왔던 부분이 마침내 표면화 된 것이다.
첫댓글 잘읽고갑니다
다음 전개는 어찌될까요. 다시 진일문 중심으로~
감사
즐감요
모네타님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을 기대하면서 감솨 *^^*
ㅈㄷㄱ~~~~~~~~~~~`````````````````````
늘 감사합니다.
굿,,즐감,,,
감사~~^^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