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인은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근위병 총지휘자였는데 성인이 두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두 형제는 성실한 어머니 슬하에서 고이고이 자랐다.
가예타노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될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해 24세에 이미 법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는 잠시 교회의 행정관으로 지낸후, 1516년 그의 나이 36세에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로는 예전보다 더 열성을 내어 자기 성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 이듬해 성탄 절, 그가 말구유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아기예수를 그의 품에 안겨 주셨다.
그때부터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1518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시는 어머니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시중해 드린 가예타노는
그 후 오랫동안 비첸자에 머물러 있으면서 병자를 돌보기 위한 형제회를 세웠다.
또한 불치의 환자만을 수용하는 요양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항상 환자들과 지내고자 햇다.
그러다가 장상의 명령대로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병원을 세우고 손수 그 간호에 종사했다.
그의 친척들은 그런 사업을 대단히 반대하며 그에게 갖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가예타노는 아무 말도 없이 겸손과 인내로 모든것을 받아들였다.
그를 만난 사람,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경건한 모습에 감화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그가 미사 성제를 올릴 때의 모습은 마치 천국에서 움직이는 성인과 같았으며
그의 강론의 힘은 가장 완고한 죄인이라도 능히 움직일 수 있을 힘을 가졌었다.
가예타노는 인류의 구원 사업을 더욱 크게 넓히기 위해 성직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하고
이런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고 심사 숙고하여 열심히 하느님의 가르치심만을 구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을 법학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는 이를 기뻐하며 격려해 줄 뿐 아니라 제일 먼저 회원이 되어 주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주교 가라파가 이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서였다.
이분도 역시 성인이시지만 성격 상으로는 가예타노와 아주 다른 분이었다.
대단한 정력가로서 아무리 활동을 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분이며, 대단한 정치적 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가예타노에게 있어서는 수도회의 발전상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수도회 설립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교황의 인가였는데
교황은 새 수도회의 인가를 대단히 주저했으므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가예타노를 아는 많은 명망가들의 간절한 청원도 있고 더욱이 가라파 주교의 덕망을 보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4년 이 회를 인정했다.
수도회의 창립자는 가예타노지만 명칭은 테아틴회(Theatines)라 했다.
이는 겸손한 가예타노가 그 회의 초대 총장인 가라파 주교의 거주지인 테아티노를 따서
그 회를 불렀기 때문이다.
가라파 주교 역시 그 회의 창립자인 가예타노를
회의 창립자(사부,師父)로 섬기기를 서슴지 않았던 겸손한 분이었다.
회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예식을 성대히 하며 순명, 정결, 청빈의 서원을 지키며 자신을 성화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는 곳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게 되어 각 지방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엇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마다 그의 덕망이 나타났고 그의 열렬한 기도로 때로는 기적도 일어났다.
가예타노는 쟁론을 조정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명한 재판으로 당사자들을 언제나 감복시켰다.
이런 성인에게도 고통이 없을 수는 없었다.
1547년 나폴리 지방에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가예타노에게 불의 부당한 비방과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침내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담당 의사의 모든 치료에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다른 의사를 또 초청하려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가예타노는
"저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의사 한 분 이면 충부합니다"하며 거절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편안함을 찾지 않았다. 오직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고,
동료들에게는 자기의 부덕함을 깊이 사과하고
그들의 후의(厚意)를 감사하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47년 8월 7일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1671년에 시성되었다.
축일 : 8월7일
복자 아가탄젤로 순교자
Beato Agatangelo Noury Martire
Blessed Agathangelus of Vendôme , OFM Cap. MM (AC)
(Tours, 31 agosto 1598 - Gondar, 7 agosto 1638 )
Born:31 July 1598 near Vendome, France
Died:stoned to death or hanged with the cords of their own robes (records vary)
on 7 August 1638 at Dibauria, Abyssinia
Beatified:23 October 1904 by Pope Pius X; formal recognition on 1 January 1905
Canonized :pending
복자 까씨아노 순교자
Beato Cassiano Lopez-Netto Martire
Blessed Cassian of Nantes, OFM Cap. MM (AC)
(Nantes, 15 gennaio 1607 - Gondar, 7 agosto 1638 )
Born:1607 at Nantes, France
Died :stoned to death in 1638 in Abyssinia (modern Ethiopia)
Beatified :1904
Canonized :pending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 망의 카푸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뽀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회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뜨의 카시아노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노는 즉시 아카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두 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루브르박물관,파리
목판에 그려진 이콘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두고있다.
(이콘.신비의 미-장긍선신부편저.참조)
이집트 정교회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이콘 가운데 하나로서,
구세주 예수님과 곱틱(Coptic)교회의 수도원장 성 메나(Mena)와의 친교가 잘 담겨져 있다.
(정웅모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여러분들은 나의 벗들입니다.
이 이콘을 자세히 보면 메나스라고 전해진 성인 곁에 나란히 서서 그의 어깨에
다정히 당신 오른 손을 얹고 계시는 예수님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계십니다.
메나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함께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메나스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체험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길에서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체험도 부족합니다’라고 거듭 고백합니다.
그런 메나스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예수님께서 정겹게 어깨를 마주하시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서,
가장 소중한 친구로서 예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체험합니다.
"혹,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혹 어미가 어린 젖먹이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메나스의 나약한 믿음이 하느님 안에서 굳건해 집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분께서 함께 가시기에 자신의 약점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함께 가시니 힘이 납니다.
(소공동체길잡이2003년7,8월호에서)
요한 15,11-17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콥트교회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
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
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
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
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콥트 성가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