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 아이돌 〈3〉 팬덤, K팝을 이끄는 엔진

[노랑이네]

“내 다정함에 빠져들 걸?”…그 아이돌의 달달한 SNS 구애

[99℃:한국산 아이돌]〈3〉팬덤, K팝을 이끄는 엔진

요즘 아이돌은 멀리서 반짝이는 스타가 아니라 주머니에 손만 넣으면 만날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다. 언제 어디서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말을 걸고 사소한 일상까지 공유한다. 이제 아이돌의 성패는 대중적 인지도가 아닌 팬들의 충성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팬덤’이 K팝의 엔진인 것이다. CD로 음악을 듣지 않더라도 응원하는 아이돌 그룹의 앨범을 여러 장씩 사들이는 전 세계 팬들은 K팝의 ‘국경 없는 지지자’다. 올 1월 데뷔한 9인조 아이돌 그룹이 ‘팬심’을 붙잡아두기 위해 애정을 쏟아붓는 치열한 현장을 들여다봤다.

올 1월 데뷔한 9인조 남자 아이돌 그룹 T1419의 멤버들이 5월 14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스마트폰 영상통화로 팬들에게 말을 건넸다.

영상통화 팬사인회 중 ‘T1419’ 멤버 카이리(가운데)가 스마트폰 속 팬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왼팔에 깁스를 한 ‘T1419’ 멤버 케빈이 영상통화 팬사인회에서 팬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른 새벽 ‘T1419’ 멤버 제로가 메이크업을 받고 있다.

“(물병을 들어 보이며)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난 다정한 사람이야. 이런 모습에 빠져들게 될 거야.”

“얼른 먹고 자. 그게 제일 건강해지는 길이야.”

팀의 막내 키오가 턱을 괴고 영상 속 팬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다.

‘로즈데이’인 이날 멤버들은 머리에 연두색, 분홍색 꽃으로 장식된 화관을 쓰고 있었다. 곰돌이 티셔츠 차림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든 멤버도 있었다.

긴 탁자에 스마트폰을 고정시킬 삼각대만 올려놓으면 어디든 팬을 만나는 장소가 된다. 이날 영상 팬 사인회를 위해 일렬로 앉은 T1419 멤버 9명 앞에는 스마트폰이 한 대씩 설치됐다. 멤버 1명이 화면 속 팬과 대화하는 시간은 각 90초. 컨베이어벨트가 돌 듯 스태프는 90초마다 일제히 스마트폰을 옆자리로 옮겼다.

멤버 온은 “허락된 시간이 짧으니까 잠시라도 서로 즐거워하자며 팬들과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다. 팬들이 용기를 주니까 더 자신 있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고 했다.

3월 31일 T1419 멤버들이 싱글 2집 컴백 쇼케이스에서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언제든 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존재

T1419 멤버는 한국인 5명, 일본인 4명으로 구성됐다. 걸그룹 모모랜드를 키운 MLD엔터테인먼트가 글로벌 음원 유통사인 소니뮤직과 함께 기획했다. 2019년 일본인 멤버를 뽑을 때 도쿄와 오사카에서 지원자가 5000명 넘게 몰렸다.

9명의 멤버는 사인회 때마다 당첨된 팬 30명과 한 명 한 명 영상통화를 한다. 꼬박 2시간이 넘게 걸린다. 팬들의 국적은 한국, 일본, 캐나다, 네덜란드 등으로 다양해 멤버들은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번갈아 쓴다.

헤어샵 스태프가 ‘T1419’ 멤버 레오의 머리를 만지고 있다.

TV 음악방송이 있는 날이면 멤버들의 하루는 오전 5시에 시작된다. 생방송은 보통 12시간 뒤인 오후 5시지만 메이크업, 리허설 등을 위해 오전 9시 전에 방송국에 출근한다.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영상통화 팬 사인회를 열었던 4월 16일에도 T1419 멤버들은 어둑한 오전 5시에 강남구 메이크업 스튜디오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머리를 감으러 가며 기자에게 “안 졸려요”라던 일본인 멤버 카이리는 헤어드라이어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오자마자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른 새벽 메이크업샵에 온 ‘T1419’ 멤버 제로(왼쪽)가 레오(왼쪽에서 두번째)에 기대어 잠시 잠이 들었다.

한국인 멤버 케빈의 스마트폰에는 오전 5시와 오전 5시 30분 둘로 갈린 ‘사다리타기’ 결과가 남아 있었다. 숙소에서 30분 더 잘 수 있는 멤버를 정하려고 매번 이렇게 사다리를 탄다고 했다.

오후 10시가 넘어 사인회가 끝나자 멤버 중 ‘영어 능력자’로 꼽히는 레오, 시안이 곧바로 영어로 페이스북 라이브방송을 시작했다. 미국과 남미 팬들을 위한 자리다. 이날 방송 주제는 한국의 편의점 음식 리뷰. 남미 팬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화면 위로 휙휙 지나가는 스페인어 댓글을 읽을 줄 몰라 미안해하던 두 멤버는 마지막 인사만큼은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이형진 MLD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예전의 아이돌은 콘서트장에 가야 볼 수 있고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지는 존재였다면 요즘 아이돌은 언제든 주머니 속에서 꺼내 보는 존재다. SNS를 통해 팬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고 직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팬들도 그런 아이돌에게 마음을 열고 연인 대하듯 정성을 쏟는다”고 했다.

영상통화 팬사인회를 하고 있는 'T1419' 멤버들.

● 대중성보다 충성심… 팬덤, K팝의 엔진

이제 K팝 아이돌의 성패는 대중적인 인기보다는 정확하게 특정된 팬들의 충성심에 달려 있다. 팬덤을 구축하는 것은 자신들의 콘텐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줄 핵심 성장 엔진을 확보하는 일이다.

박진영 JYP 대표 프로듀서는 최근 한 프로그램 제작발표회에서 “1세대 아이돌은 대중이 다 알았지만 이제는 대중과 아이돌 팬이 거의 안 겹친다”며 “요즘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일반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팬들은 앨범 구매로 아이돌 그룹이 소속된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매출을 늘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즐기는 스트리밍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실물 음반으로 노래를 듣는 일은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돌 그룹의 팬들은 앨범을 사는 데 기꺼이 지갑을 연다.

아이돌 앨범에는 CD뿐만 아니라 포토북, 멤버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포토카드 등이 동봉되어 있다.

이들은 CD로 음악을 듣기보단 기념품으로 소장하거나 응원하는 아이돌을 후원하기 위해 여러 장의 CD를 구매한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적으로 실물 음반 시장은 80% 이상 쪼그라들었지만 아이돌 중심의 한국 아티스트 음반 판매량(수출 포함)은 지난 5년간 4.9배로 급증했다.

해외 각국에 형성된 글로벌 팬덤은 앨범 구매와 더불어 콘서트 관람, 각종 용품 구매 등을 통해 ‘국경을 뛰어넘는 지지자’ 역할을 한다. K팝 아이돌 그룹은 해외 팬덤을 기반으로 미국 빌보드 차트 등 해외 음원 차트에 진입한 뒤 탄탄한 티켓 파워를 앞세워 일본 돔구장 공연이나 미국 유럽의 대형 스타디움 공연을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전 세계에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이 같은 글로벌 전략은 K팝 아이돌의 노래 가사에도 녹아 있다. 방탄소년단(BTS)이나 엑소 등의 노래에는 “자신을 사랑하라” “두려움 따위는 버려라” 등 긍정적인 내용의 가사가 많다. 해외 어느 문화권에서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소독된’ 가사로 곡을 만드는 것이다.

BTS가 소속된 하이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에 1080억 원의 음반·음원 매출과 1910억 원의 공연·팬미팅 매출을 기록했다. 이 기간에 BTS는 31회 콘서트를 열어 138만 장의 티켓을 판매했다.

‘T1419’의 데뷔 100일 기념 브이라이브 방송을 촬영하고 있는 스마트폰.

이선정 유튜브 아태지역 음악 파트너십 및 아티스트 지원 총괄 상무는 “해외의 아티스트가 뮤직비디오 하나에 집중한다면, K팝 아티스트는 팬들과 친밀도가 높다”며 “한국의 파트너들은 앨범 공개 등 이벤트가 있으면 팬덤 자체를 중요한 요소로 보고 계획을 짜는데 그런 부분이 K팝 발전의 큰 요소인 것 같다”고 말했다.

● 팬들, 소속사에 직접 목소리 내기도

T1419 멤버들은 카카오톡으로 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각각 취재기자와 멤버 시안의 대화(왼쪽), 미국 팬 케이티와 멤버 건우의 대화.

T1419는 최근 팬들과 카카오톡으로 직접 메시지를 주고받는 활동을 시작했다. 멤버들이 팬 여러 명에게 동시에 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친구와 카톡을 하듯 일대일로 대화하는 것이다. 국내외 팬들이 공식 채널로 특정 멤버를 선택해 메시지를 보내면 해당 멤버가 직접 답한다.

팬들은 멤버들에게서 답이 오면 동료 팬들과 공유한다. 미국 팬 케이티는 지난달 22일 한국인 멤버 건우에게 “나를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케이티는 건우에게서 “악 부끄렁ㅎㅎ…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도 더 행복하게 해줄게요옹ㅎㅎ”이란 답장을 받고 이를 팬 카페에 올렸다.

팬들은 아이돌 그룹이 컴백하면 신곡을 여러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반복 재생해 음원 차트 순위를 올리는 ‘스밍(스트리밍)’ 작업을 하는 등 지원 사격에도 나선다. 활동 기간이 겹치지 않는 다른 아이돌 그룹 팬들과 협력해 서로 힘을 모아주는 ‘스밍 품앗이’도 자주 한다.

3월 31일 T1419 멤버들이 싱글2집 컴백 쇼케이스에서 타이틀곡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아이돌 멤버의 건강관리를 위해 팬들이 소속사에 직접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4월 20일 T1419 데뷔 100일 기념 SNS 라이브방송을 앞두고 멤버 케빈은 진통제를 먹고 쉬고 있었다. 이날 오전 TV 음악방송을 녹화하다 왼쪽 어깨를 다쳤던 것. 케빈은 팬들과의 라이브방송 중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픈 어깨에 여러 번 손이 갔다. 그러자 “케빈 괜찮아요?” “어디 안 좋은가요?”라고 묻는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렸다.

다음 날 TV 음악방송에서 케빈이 왼손을 허리춤에 붙이고 춤을 추자 곧 트위터에 케빈을 지켜 달라는 ‘#PROTECTKEVIN’ 해시태그와 함께 “케빈을 쉬게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자 소속사는 “3일 뒤 예정된 방송을 끝으로 음악방송 활동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T1419 멤버와 팬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고 있다.

● 즐길 콘텐츠 꾸준히 공급해야 팬덤 유지

지난달 13일 T1419는 싱글 2집 마지막 공식 일정으로 오프라인 대면 팬 사인회를 열었다. 코로나19 방역수칙에 따라 서울 마포구 누리꿈스퀘어에 초대된 팬은 정확히 50명. 팬들은 투명 아크릴 벽을 사이에 두고 멤버와 1분씩 대화를 한 뒤 옆 멤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팬들의 선물은 스태프가 따로 챙겨 멤버별로 상자에 나눠 담았다.

팬들은 자기 순서가 끝난 뒤에도 행사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른바 ‘대포’라고 불리는 망원렌즈를 단 고화질 DSLR로 자신의 ‘최애(가장 좋아하는) 멤버’를 향해 계속 셔터를 눌렀다.

팬에게 꽃 선물을 받는 T1419 멤버 케빈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1시간 반가량의 만남이 끝난 뒤에는 멤버들이 팬들의 요청에 화답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고양이 주먹’을 쥐어 보라는 요청에 일본인 멤버 키오는 양손에 고양이발 모양의 장갑을 끼고 고양이 흉내를 내며 춤을 췄다. 케빈은 “내가 준 꽃을 들고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꽃을 든 채 활짝 웃었다. 객석에서 “누가 꽃인지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BTS가 활동 초창기부터 일거수일투족을 SNS에 공유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이 같은 팬덤 관리는 아이돌 그룹이 밟아야 할 ‘필수 코스’가 됐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2019년 타임 인터뷰에서 가수와 팬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BTS나 K팝 아이돌의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라이프스타일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런 열망을 채워 줄 상품은 시장에 없다. 물론 일반적인 가수들의 팬들도 콘서트에 가고 앨범을 산다. 하지만 K팝 아이돌 그룹 팬들은 아이돌과 더 친해지고 싶어 한다. BTS 팬덤과 함께하는 일이 빅히트(현재 하이브)의 가장 주된 서비스 중 하나다.”

팬과 대화하고 있는 T1419 멤버 시안.

이날 T1419 팬 사인회에 순번 1, 2번을 받은 직장인 레정(팬카페 닉네임·23)과 순애(23). 두 사람은 다른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다 ‘탈덕’(좋아하는 일을 그만둠)한 뒤 T1419에 ‘입덕’(새롭게 좋아하게 됨)했다고 한다. 전에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은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꾸준히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애는 “T1419를 보면 진짜 열심히 한다는 게 느껴진다. 콘텐츠가 많고 팬들과 카톡도 해준다. 평생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팬들이 아이돌에게 건네는 “열심히 한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과 함께, 앞으로도 팬들이 열광할 만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K팝 아이돌의 스케줄은 무대 밖에서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김도형 기자

▽기사 취재: 김배중 임보미 위은지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