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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만 외쳐대면서 음식의 소중함 잃어버린 건 아닌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이녘이 정지에 가서 좀 해오소”라는 말을 자주하셨다. 그리고 세 아들한테는 “사내 자식들이 정지에 들락날락하면 뭐가 떨어진다”는 말도 하셨다.
‘이녘’은 상대를 지칭하는 친근하고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이고, ‘정지’는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와 충청도까지 폭넓게 쓰였던 부엌의 방언이다.
그러므로 ‘이녘이 정지에 가서 좀 해오라’는 당신이 부엌에 가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고, 아들들한테는 ‘사내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즘은 남자들이 부엌 출입이 잦을수록, 그러니까 부엌데기가 될수록 인기 있는데 말이다.
아내와 요즘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냉장고를 부탁해’가 있다. 사람들이 알 만한 스타가 자기 집 냉장고를 통째로 스튜디오로 옮겨와 거기 있는 식재료로 제한된 시간 내에 그 냉장고 주인이 맛있어 할 만한 요리를 만들어 누가 더 맛있게 만들었는가를 판정받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냉장고를 부탁해’에 참여하는 스타 셰프들이 전부 남자들이다. 요즘은 ‘요섹남’이라 해서 요리 잘하는 남자가 섹시한 남자로까지 인정받는 시대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계셨다면 이런 세태를 보고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다.
아무튼 정지는 예로부터 가족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어머니가 그곳에서 어떤 음식을 만드느냐에 따라 집안 공기의 색깔과 냄새가 달라졌다.
지금 나는 이제 내 어렸을 적 부모님 나이가 되었다. 시대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사는 게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고, 이날이 그날 같고, 그날이 저 날 같다. 크게 좋아하는 것도 없고 푹 빠져 있는 것도 없다.
사십대 초반에 21세기를 맞았는데 그냥 무덤덤했다. 시간의 연속성으로 볼 때 오늘과 내일이 무엇이 다른가.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갈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늘 시큰둥하다.
그런데 가족과 일 말고 유일하게 관심이 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우정만리(友情萬里). 벗과의 우정은 만리를 간다 했던가. 가끔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며 수다 떠는 일이다.
서로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라 별로 예의 차릴 것도 없고 격의도 없이 크게는 나라 걱정부터 건강 얘기, 자식 얘기 등등 사람 사는 얘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다. 그런데 저녁 약속 장소를 잡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
그것은 다시 말해 맛있는 밥집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과연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나의 경험으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배고팠을 때 먹은 음식이다. 전 세계 모든 음식은 나름 역사가 있고 철학과 문화가 있다. 중국 요리는 다양하면서 맛있고, 일본 요리는 정갈하고 맛있다. 이탈리아 요리와 프랑스 요리 역시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즐긴다.
전 세계의 음식을 다 먹어본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의 짧은 미각(味覺)과 빈약한 견해로는 그동안 여러 나라 돌아다니며 먹어본 음식 중 천하제일은 역시 우리 음식, 한식(韓食)이다. 우리가 외침(外侵)을 천 번 이상 받았지만 타국을 단 한 번도 침략하지 않은 이유가, 나가 보니 맛있는 음식이 없어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냥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꽤 그럴듯한 얘기 아닌가.
오래전에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명한 셰프가 쓴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해 메모한 기억이 있다. ‘
당신은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 한 끼로 무엇을 먹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유한한 삶에 누구나 마지막 한 끼는 먹게 될 거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가? 난 여러 가지 음식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주 명료하게 김치찌개 아님 된장찌개 두 개가 떠올랐다. 당시 그 질문이 재미있어 주위 지인들에게도 해봤는데, 그 마지막 한 끼가 제각각 다 달랐다.
그런데 참 인상적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지인이 운영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국수를 파는 식당에서 일하는 20대 중반의 젊은 셰프였다. 그는 내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요”라고 답했다. 그때 난 ‘역시 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자기 철학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마지막 음식으로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가?
이 코너의 타이틀이 소울푸드(Soul Food), 영혼의 음식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는데, 내 인생의 어떤 음식이 과연 소울푸드일까? 음식은 기억이고 추억인데. 내 기억 속 음식 중에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팥칼국수가 있다. 붉은 팥을 삶고 채로 거르고 어머니가 밀가루를 반죽해 일정 시간 숙성시킨 후 다시 밀대로 민 다음 칼로 일정한 간격으로 썬다. 이렇게 썬 것을 다시 팥물에 넣어 삶아내는, 시간과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 팥칼국수다.
내가 팥칼국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주 어려서부터였다. 어려서는 설탕으로 간을 해서 달달하게 먹었는데 나이 먹을수록 소금 간이 더 맛있었다.
거기에 김치나 깍두기를 얹어 먹으면 정말 기막히다. 나는 그 팥칼국수를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신혼 때였다. 방송일이 끝나고 집에 왔는데 미열과 함께 몸이 으슬으슬 춥고 아팠다.
감기 몸살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입맛도 없고 누워 있는데,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게 바로 팥칼국수였다. 집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에게 혹시 팥칼국수를 만드실 줄 아냐고 물어보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곤 정성껏 만들어 주셨다. 그 팥칼국수를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 나니 몸이 개운해지면서 정상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팥칼국수는 내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어머니의 정성 그 자체인 소울푸드다.
사족을 붙이자면 요즘 TV에서 먹방 프로가 인기다. 스타 셰프들이 누가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느냐 경쟁이 치열하다.
그런데 신혼 초에 아내와 밥을 먹다가 이 음식은 맛있네 저 음식은 맛없네 얘기를 하니까 듣고 있던 아내가 내게 했던 얘기가 있다. 그 말이 지금도 밥 먹을 때마다 가끔 생각난다. 아내의 얘기는 세상 모든 음식은 그냥 소중한 음식이다.
맛있다, 맛없다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맞는 얘기 아닌가. 너무 맛있는 음식만 찾지 말자!
첫댓글 다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