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글감이 올라오는 걸 구경하는게 생각보다 쉬운 공간은 유로파 정도 밖에 없을 듯 합니다. 대다수의 커뮤니티에서는 이야기 하기가 꺼려지기도 하고, 대체로 참을성 있게 듣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좀 길게 써볼까합니다. 아주 작은 글감은 아니고, 엄청 큰 글감인데, 현대 신학에서 주목할만한(물론 상당히 비판도 받기도 하고, 나름 한물갔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지만서도) 바르트의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창조론에 대한 인식이 어떤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물론 제 이야기는 신학적 정통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이야기이니 귀 담아 들으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못쓰는 글재주가 더 못쓰게 되버립니다. 글이 지루합니다. 많이 개선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I. 존재의 추적: 탈레스부터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고대 철학에서부터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물론 '존재'라는 것을 본질에서 구분지어서 독립된 형태로 구체화시킨 것은 아퀴나스의 특유한 존재론이 매우 강한 이펙트를 주긴 합니다만 일단 그 이전까지는 단순히 있음의 영역으로 냅둬진 상태였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등을 거쳐서 본성으로 전환되고, 결과적으로는 그놈의 본성을 향한 탐구가 이윽고 형상과 질료로 분화되기에 이릅니다. 본질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고, 본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드러내는 성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 탈레스가 세상은 물이다라고 한 것은 세상의 '본질'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온갖 것을 거치더니 이윽고 아페이론이라는 뭣도 아닌 묘한 것으로 변화하였고, 본질탐구를 포기하고 본성탐구로 전환했습니다. 사물의 본성이 무엇이냐를 묻는 질문은 바로 이 때부터입니다. 본성에 대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그것을 규정하는 것, 규정하는 원칙으로서의 형상(eidos)을 지명한 것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형상은 사물을 규정하는 '본성'이며, 질료는 그러한 사물의 기체(基體)이자, 규정된 본성을 '제한'하여 개별화의 원리로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통적인 구성은 질료와 형상이라는 기본적인 그리스 사유의 틀을 구성합니다.
여기서의 형상이 점점 각광받더니, 신플라톤주의에 이르러서는 이윽고 존재 즉 형상의 원류로서의 있음이 등장합니다. 존재는 형상의 완전체요, 이른바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로서 순수현실태에 이르게 됩니다. 형상과 존재는 이처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있음'과 '~이다'의 함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존재와 본질의 합류적 상황을 깨버린 것은 다름 아닌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① 전통적으로 질료가 본성으로서 배척되는 것을 거부하고, 질료를 과감하게 본성을 규정할 수 있는 원리로서 규정합니다. 인간과 사자는 동물이라는 형상은 같더라도, 질료가 다릅니다. 그러한 질료가 다른 것은 그것의 본성을 달리하게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②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다라는 본질의 규정이 결코 ~이 있음 즉 존재성을 도출할 수 없다고 보았고, 모든 것의 기본, 기저에는 질료보다도 '그것이 있음'이 없다면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 본질과 존재는 일치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은 본질의 극단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이 정리로 인해서 본질과 존재는 분리되었으며, 신에 대해서 역시 본질과 존재가 나누어집니다. 다만,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을 이 존재론과 함께 보게 되면, 신을 아는 것은 단지 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만 알 수 있으며. 신이 무엇이다라는 규정 즉 신의 '본질'은 알 수 없음에서 그치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이제 형상, 질료, 존재는 서로 분리되었고, '존재'는 형상과 질료를 떠받드는 기저가 되었습니다.
II. 신의 의미: 존재와 신
존재가 이처럼 분리된 이후에 신은 존재하나 본성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묘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신에게는 존재와 본성이 구별되지 않음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대두했습니다. 이것은 신을 자존하는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그 존재의 근거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명제는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본질의 기저인 존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3번째 증명 즉 자기필연유로서의 신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우리가 무로부터 도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무에서는 무뿐이 나올 것이고, 오직 유에서만 무가 나올 따름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유 즉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신은 바로 이 증명에서 나타나는 신의 의미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III. '창조'와 존재성
도대체 그럼 왜 이 어려운 얘기를 끌어서 왔느냐? 바로 이 창조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창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천지창조가 7일에 이루어졌다라는 단순한 명제로 이해하는 것은 그닥 좋은 이해에 속하지는 않는 듯 합니다.
(잠깐 옆길로 새면, 과학주의적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 신학이나 철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 스스로 증오하는 과학의 등짐을 올라타고 그 위에 신학을 올리려하는 적반하장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신학계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그렇게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학을 과학 위에 세우려고 합니까? 기저라는 것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방법론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이른바 실증에 가까운 것인데. - 연구가 실증이라기 보다는 접근하려는 방법론이 실증이라는 말입니다. 신학이 실증이라...ㅎ 현상학이면 혹시나 몰라도 실증? 귤이나 까라. - 필자의 매우매우 사적인 의견이니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어디가서 얘기하진 마시구..)
그렇다면 창조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바르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① 분리로서의 창조와 ② 존재의 근거로서의 창조입니다. 분리로서의 창조는 창조의 의미에서 신이 우리를 창조한다는 그 구절에서 나옵니다. 신이 스스로에서 나와서(유출) 스스로로 돌아가는(회귀) 기계론적, 합리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철저하게 인간을 신과 분리시킵니다. 신은 인간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굳이 인간은 존재할 이유가 없지요. 창조신앙의 근본에는 바로 그러한 '분리'를 통한 신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은 인간을 창조(뭐 굳이 쓰자면, 꼭 손으로 빚었다는 이야기는 일단 제거하고)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이 두 번째 존재의 근거입니다. 인간의 존재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퀴나스의 존재론에서는 ~이다가 ~의 있음을 보장할 수 없고, ~의 있음이 있어야 ~이다를 성립시킬 최소한의 근거가 됩니다. 덧붙여서 인간 존재는 그 존재에 있어서 항상 누군가에게 의존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칙상 명백합니다. 우리의 존재 근거는 우리의 부모가 될 것이겠지요. 어찌되었든 우리의 존재는 근거를 필요로 합니다. 창조신앙의 핵심은 바로 이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존재의 근거를 요합니다. 그러한 근거를 무한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신에게서 추론하는 것입니다. 신은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신을 의미합니다. 만물은 신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나, 존재하며, 그러한 존재의 기저에는 신이 있습니다. 신이 없다면 우리 존재의 기저에는 무엇이 존재하여야 합니까. 어찌보면 매우 합당한 추론과정을 거쳐서 도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매우 경험적인 것이지요. 결국
① 세계의 모든 것은 신에게 필요없는 것이다. 신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므로(본래 필요없는 것인데, 피조물과 조물주의 분리를 암시)
② 그러나 세계의 모든 것은 현재 있다. (왜 있을까?)
③ 그것은 신의 의지에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존재의 기저로서의 신'관념에 의거하여)
④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의 근거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다만 유의하여야 할 것은 '신이 기저에 있으니 만물이 신의 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냐'라는 범신론으로 나갈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논변으로 갈음하자면, 아퀴나스는 어떠한 사물로서 신이 드러나기보다는 사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에서 신께서 드러나신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세계의 그 자체가 신을 기저로 한다는 것을 통해서 신이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조화롭게 운영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신론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17-18세기 계몽주의는 바로 그 테크트리를 탔습니다만, 현대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IV. 결어
사람은 왜 있는가?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면, 최소한 그리스도 교도라면 동일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의 이러한 '창조'에 근거한 것이며, 세계의 조화를 통해서 신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용되고 있음이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는 뿌리가 없이, 근거가 없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깊은 사고와 성찰, 경험을 통해서 구축된 인류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목적이나 가치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쓴다면,
[ 철학 제1의 적은 회의주의이고, 철학의 가장 큰 동반자도 회의주의다. "그러므로 모른다는 것을 회피하지 말라." 모름 그 자체를 아는 날이 되면 비로소 회의하며 깨닫는다. ]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요근자 그리스도교와 무신론이 호혜적으로 지낸다는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 솔까 저도 발언의 레벨을 조절한다는게 쉽지많은 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