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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벽은 절벽이 되고 어느 벽은 새벽이 된다
젊은 시절에 이상(李箱)의 시를 참 좋아했다. 이상 시의 언어가 갖는 매력은 자의식 과잉의 폐허 의식과 멜랑콜리(m?lancolie),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언어유희의 즐거움이다.
이상의 시는 대개 깊은 멜랑콜리를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우울증과는 약간 다르지만 (수전 손태그는 우울증을 멜랑콜리에서 매혹을 뺀 것이라고 정의한다.) 죽음에 이르는 깊은 심연을 보여 주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모순어법이나 역설, 반어 등을 통해 아주 깊은 인간 실존의 진실을 리얼하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무의미한 것 속에 양가적 의미의 풍요가 꽃피는 아름다운 난해의 수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바람에 휩쓸려 문학에 대한 열정 하나를 들고 ‘공부’하러 간 도쿄에서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지만, 늘 그렇게 어디에서 살아도 마음으로는 길을 찾고 있는 아포리아(aporia)적 주체가 시인 이상이었다.
그의 현란한 언어에는 어딘가 해석되지 않는 미정형의 공백이 스며져 나온다. 언어의 해석되지 않는 공백 안에 결론을 찾을 수 없는 아포리아가 꽃피고, 그 아포리아는 독자에게 자신의 생의 맥락에 놓고 곰곰 생각해야 할 사유의 고뇌를 넘겨주는 것 같다. 그렇듯 좋은 시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시는 항상 현재형이다. 백 년 전에 태어난 시인의 눈물은 나의 현재의 눈물이 되고, 시인의 꿈은 나의 현재의 꿈으로 독자에게 파고든다. 좋은 시는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시간적, 공간적 현재 감각을 준다. 그래서 백 년 전 혹은 50년 전의 먼 나라 시인의 절규와 슬픔, 사랑과 꿈이 현재의 나의 것으로 오롯이 살아나기도 하지 않는가.
파블로 네루다의
“‘밤은 별이 많다. 별들은 파랗게 / 떨고 있다, 멀리서, 파랗게.’ 라고 쓸까? /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 밤하늘은 하늘에서 돌며 노래하는데, / 나는 이 밤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 / 문득 그녀가 없다는 생각. 문득 그녀를 잃었다는 느낌. / 황량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황량한 밤”
과 같은 상실감에 가득 찬 구절이라든가,
쉼보르스카의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실습 없이 죽는다 / 어떤 하루도 되풀이 되지 않고 / 서로 닮은 두 밤도 없다. /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 하나같은 두 눈 맞춤도 없다. / 풀잎에 이슬이 지듯 시구 하나 영혼에 떨어진다.”
와 같은 시구들은 시인의 현재를 안고 독자의 현재 위에 스며들거나 떨어진다.
그러므로 시는 언제나 영원한 현재이고 너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불멸이기도 하다.
이상은 전근대적 봉건 생활에서 근대로 탈출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근대적 파시즘의 물결 속에서 탈근대를 꿈꾸기도 했던 모더니스트이자 탈근대주의자이기도 했으니, 그는 얼마나 앞서서 태어났던가.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기묘혈을 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이상, <절벽> 전문
이렇게 이상의 <절벽>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모순의 향기 속에 산다는 것의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띄어쓰기도 하지 않은 문장의 어지러운 행렬 속에 시간의 혼란과 자의식의 혼미가 현란하게 연속무늬를 그린다. 보이지 않는 꽃과 보이지 않는 묘혈 사이에 향기가 흐른다.
꽃만 있다면! 묘혈만 있다면! 그런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꽃의 향기 속에 묘혈을 파고 그 묘혈 속에 향기가 흐른다는 것이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다. 잊어버릴 수도 다시 나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절벽-궁지의 아포리아-, 절벽(絶壁)이란 문자 그대로 벽조차 끊어진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아닌가.
시 <절벽>은 그런 어지러운 내면의 위기를 보여 준다. 보이지 않는 꽃향기가 어디에선가 흘러오고 그 향기 속에 묘혈을 파고 눕고자 하나 또 다시 흘러오는 향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 묘혈을 파는 시적 자아의 모습은 오늘, 여기를 사는 나의 자아와 동일시되어 떠오른다.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의 양가적 모순이 인간의 실존이라면, 이렇게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 혼재되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아포리아 속 삶의 현기증이 바로 나의 삶이자 ‘절벽’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 시는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현재성을 부여하며 현재 내 자아의 주체할 수 없는 분열과 혼미의 주체성을 드러나게 한다. 꽃과 묘혈 사이에 향기가 있다. 그 공간 속에서는 완전히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이 시에는 또한 묘한 음성적 묘미가 있다.
향기-묘혈로 이어지는 ‘ㅎ’ 음의 반복과 ‘ㅎ’ 음의 연속적 되풀이가 만드는 기표적 차원의 의미 중첩과 혼란이다. 사실 향기는 (보이지 않는) 꽃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향기-묘혈과 같은 ‘ㅎ’ 음의 연속적 반복으로 인해 이상하게도 향기가 꽃이 아니라 묘혈과 더 가까운 것으로 감지된다.
묘혈-향기에 나타나는 음의 친연성(親緣性)으로 말미암아 의미의 친연성이 일어나는 기의적 차원의 착란이 아포리아의 막다른 현기증을 더 배가시키고 이상 시의 매력을 한층 더 풍부하게 한다.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 만개한다.나는거기묘혈을 판다.”라는 이 갈 길 모르는 아포리아는 멜랑콜리를 낳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분리할 수 없는 이중 의식, 모순 의식은 반어를 낳는다.
키르케고르는 아이러니를 무한한 부정성의 에너지로 보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항 대립 중 그 어느 것도 긍정하지 않는 데에 아이러니의 무한한 보류가 있고, 그것이 아이러니스트에게 무한한 자유와 열광을 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아이러니 속의 궁극의 궁지가 바로 ‘절벽’이며, 궁지에 내몰린 자의 자유는 바로 그 궁지의 멜랑콜리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드러날 수 있다.
이상은 타자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타자는 보이지 않는 타자이고 알 수 없는 타자이고 향기가 만개하는 매혹의 타자이지만 결국 양가적으로 묘혈을 파야 할 죽음의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벽’의 상황에 대해 노래하지만 백석(白石)은 벽을 넘어서 자기 구원과 승화를 꿈꾼다. 이상의 <절벽> 못지 않게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도 식민지 시대인이 맞게 되는 생존의 위기를 잘 보여 준다. 식민지 시대 우리 시는 그러한 절벽 의식과 벽 앞에서의 순명 의식, 혹은 절명 의식을 많이 노래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다 ‘식민’이라는 뿌리 뽑힌 상황에서 유랑할 수밖에 없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을 살아야만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디아스포라적 주체의 유랑 의식과 슬픔과 생존의 벽을 노래한 시인은 단연 백석이다.
백석의 ‘흰 바람벽’은 보다 더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로서 시적 자아의 상실감과 따뜻함이 필요한 어느 쓸쓸함에 대해 쓴다. 백석은 추위 속에 바람을 간신히 막아 주는 바람벽에서 지금은 헤어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어머니, 연인 등 그리운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시적 자아를 향해 있지 않으며 각기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삶이란 자기 상황 속에서 사랑의 노동이다. 시적 자아는 그들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들에게 위로를 얻을 수가 없고 그들의 시선과 사랑에서 지금 소외되어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전문
춥고 지친 어느 날, 외로운 생각이 드는 시간, 시적 자아가 마주하고 있는 ‘흰 바람벽’은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이나 거울처럼 그 위에 따뜻한 상상계의 영상을 펼친다. 마치 영화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바람벽에서 시적 자아는 지금은 헤어져 멀리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연인의 모습을 바라본다. 영상은 덧없지만, 그러나 가난한 어머니는 추운 물속에 손을 담그고 무와 배추를 씻고 있고 전에 연인이었던 어여쁜 사람은 벌써 아이까지 생겨 지아비와 함께 대구국을 끓여 놓고 먹고 있다. 춥고도 따스한 장면이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랑의 노동을 하고 있는데 시적 자아만 그들을 그리워할 뿐 그들은 시적 자아를 마주 바라볼 수 없다. 그들의 시선은 어긋나 있으며 그 어긋남이 시적 자아의 쓸쓸함의 각도이다.
그렇게 그리운 사람들에게서 소외를 느낀 화자는 상상계적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글자의 차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라는 글자가 지나가면서 시적 자아의 정신은 거울 단계와도 같은 상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문자의, 상징계의 차원으로 올라선다. 그러한 문자들의 세계는 주체를 상징 사회로 진입시키고 그 상징 세계에서 자기 위치를 확립시켜 준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말은 그리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소외감을 느끼고 쓸쓸함이 더 깊어진 시적 자아에게 상상의 위로 대신에 상징적인 힘을 준다.
그러한 상징적 힘은 시적 자아를 하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하늘의 귀중한 존재로 새로 자리 잡게 한다. 진정한 치유와 위로를 주는 ‘흰 바람벽’은 사랑하는 추억 속의 어머니나 연인이 아니라 하늘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시적 자아는 흰 바람벽 앞에서 승화되며 새로운 자아의 위치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상징 세계에서 시적 자아는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가난하고 높고 쓸쓸하지만 귀하고 하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의 새벽을 맞게 되는 것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시인이 궁극적으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어머니나 연인 등이 아니라 하늘의 사랑이다. 그것을 흰 바람벽 위에 나타난 문자의 상징적 차원을 통해 확인하면서 시적 자아는 새로운 존재의 새벽을 열게 된다. 이렇게 식민지 시대에 존재의 위기에 대해 노래했던 두 편의 시를 통하여 아포리아적 존재의 현기증으로서의 절벽(이상)과 바람벽을 지나가는 글자로 만난 ‘하늘의 힘’에 의해 깨닫게 되는 존재의 새벽(백석)에 대해 기술해 보았다.
어떤 벽은 존재의 절벽이 되고 어떤 벽은 존재의 새벽이 된다. 그중 어떤 시가 더 위대하고 더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절벽과 바람벽과 새벽이라는 우리말이 너무나 절묘하게 어떤 유사성과 차이를 간직하고 또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아름답지 않은가?
김승희 시인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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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詩文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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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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