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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조와 김홍도의 독특한 그림읽기
▶ 서양화법으로 그린 용주사의 탱화
김홍도(1745-1806경)는 영조.정조.순조까지 약 62 년간 살았다. 그는 7,8세의 나이에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으로부터 서화공부를, 문학가 이용휴(李用休 1708-1782)로 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미 10대 말부터 도화서 화원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773(영조49)년 (29세)에는 영조어진(英祖御眞) 및 세손(世孫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데 동참화사로 참여하였다. 김홍도는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린 이듬해에는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공을 인정받아 벼슬 직을 하사 받는데 충청도 연풍 지역의 현감(縣監) 자리였다.
단원(檀園)은 모름지기 풍속화, 산수화, 화조, 사군자, 초상화, 기록화 및 불화와 판화 등 모든 장르를 포함한 조선회화에 있어 한국적 특성을 살리면서 독특한 자신의 화풍을 개척한 위대한 천재화가였다. 그리고 시.서.화.악(詩書畵樂 시,글씨,그림,음악)등 여러 방면에 고루 소질이 풍부하며 풍채도 좋고 무난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이러한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는 그의 예술적 천재성에도 있었지만 정조를 중심으로 한 문화적 역량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 바로 국왕 직속의 ‘대조화원(待詔畵員)’으로 일상 업무보다 어명에 따른 특정 그림을 그린 예가 많았는데 임금이 30년 간 중요한 그림을 도맡아 그리게 하였다.
김홍도는 불과 29살의 나이에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어용화사로 뽑혔다. 그리고 3번이나 임금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용화사는 최고의 영예이지만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임금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터럭하나라도 다르게 그려서는 안된다’는 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하여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여 주된 사상은 성리학(性理學)이다. 이로 인해 불교문화는 퇴조하고 겸손(謙遜)과 소박(素朴)의 유교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회화(繪畵)는 영조와 정조시대에 회화(繪畵)가 가장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겸재 정선(1676-1759)이 발전시킨 실제 경승(景勝)현장에 직접 나가서 그림을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가 생겨났고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중심으로 유행된 풍속화(風俗畵)에서 특히 한국적인 특색을 되찾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정조는 특히 청나라에 김홍도등의 사신을 보내어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명암(明暗)과 투시원근법(透視遠近法)의 서양화 기법을 배워 오도록 1602년 초에 처음으로 연경(북경)에 세워진 4대 천주당(천주교 성당)을 보도록 한 것으로 당시 획기적인 일이었다.
? 용주사(경기도 화성시 소재)의 삼세여래체탱 (三世如來體幀)
- 김홍도. 삼세여래체탱 (三世如來體幀), 용주사,1790년
-<탱화의 부분도> 석가모니의 협시(脇侍)인 보현보살이 명암화법으로 그려진 적색 천의(天衣)를 걸친 화려한 전신상의 얼굴부분
ㅇ용주사의 후불탱화는 서양화법을 적용하여 그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불화이다. 용주사(龍珠寺)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서 이곳에 궁궐을 지은 것이다. 특히 정조는 왕의 친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하여 묘를 수원읍의 현융원(顯隆園)에 옮겼다.
그런 후,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왕실 별묘(別廟)의 건축양식을 더불어 가지게 된 것이다.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의 사찰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법당에 1790년에 제작된 용주사의 후불탱화가 있다.
크기가 가로 3.5m, 세로 4.4m의 대형으로 비단에 그려진 이 불화는 절에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다. <석가모니 본존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있어 <삼세여래체탱>이라 부른다. 그런데 특히 하단 중앙에 축원문이 쓰여 있다. 왕과 왕의 어머니인 자궁(자궁(慈宮) 혜경궁 홍씨), 왕비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한 것으로 후불탱화가 왕실을 위해 조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 동양적 탱화 제작에 중국 연경의 천주당 성화(聖畵)의 서양화 기법을 적용
정조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의 불화를 제작하기 전에 김홍도가 청나라 천주성당의 성화를 보고 오기를 명하였다. 청나라는 당시 1605년부터 마테오 리치(Mateo Ricci)가 천주당을 북경(당시 연경)에 지었는데 조선에서 다녀가는 사신들은 반드시 이 곳을 들리는 것이 필수 코스였다.
김홍도가 그린 이 불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화법인 [투시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을 보면, 이마와 뺨 등에 조명이 들어간 것처럼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사천왕상을 보면 명암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런 예는 전통불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시대에 그려진 다른 불화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한 것으로 아래는 화엄사의 탱화로 국보로 지정된 몇개 안되는 그림과 대조하면 차이를 알 수 있다.
-화엄사의 영산회괘불탱(華嚴寺 靈山會掛佛幀) 국보 301호, 1653년 제작
? 정조의 서구학문에 대한 시각
정조시대는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 등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진산(珍山)사건(1791년)이 발생하여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정조는 정학(正學)을 신장하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와 함께 극형은 두 사람에만 한정하고 천주교를 탄압으로까지 발전시키지 않았다. 자신의 측근 가운데 천주교를 가까이 한 사람들이 많았고 이를 공격하는 신하와 더불어 양측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위기를 넘겼고 보다 새로운 발전을 다지려는 배려가 있었다.
일례로 즉 정조는 신하들이 간언하여 다산 정약용이 당시 배척하였던 서학을 한다고 징계를 상소였을 때에도 천주교 즉 서학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자 다음의 순조와 헌조시대에는 당시 서학의 중심인 즉 천주교가 엄청난 박해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순교자가 속출한 상황이 진행되었다. 서양의 역사학자는 이러한 조선의 박해 사례를 로마시대의 카톨릭 박해보다 더욱 심하였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의 사상적 중심은 주자학 즉 유교이었으나 정조와 같이 부모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과감히 이단적인 용주사라는 불교의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더구나 탱화제작에는 천주교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시대에 중국 연경의 천주성당에 파견하여 서양적인 미술기법을 도입하려 한 것이다.
이와같이 용주사는 건물부터 갖가지 소장된 유물에 까지 모두 유고와 불교 및 천주교의 혼합된 사상이 스며있다. 그리고 건축, 서예, 회화, 조각, 공예 등 모든 문화예술의 장르를 고도의 수준으로 표현하면서 조선의 당시 세련된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종합적 집합체로서 한층 중요성을 지닌다.
귀중한 소장품으로 정조가 짓고 친필로 쓴 <화산 용주사 봉불기복게(花山 龍珠寺 奉佛祈福偈)>, 정조의 효심을 담아 단원 김홍도가 변상도(불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것)를 그렸다는 <불설대보 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과 병풍,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부부의 위패를 모셨던 <목조감실> 등이 같이 있다.
? 중국 연경(북경)의 천주교 성당
-북경 4대 성당중 하나인 <남당성당>과 내부, 1605년 명조시대, 마테 오리치가 건립
정조는 당시 최고의 측근인 김홍도와 이명기에게 탱화 제작의 계획수립을 지시한다.그리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산소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고 나서 바로 두 사람을 중국 연경의 천주당에 있는 성화를 보고 오게 했다.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바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키는 불교성화이다.
즉 북경에 있는 천주당의 기독교 성화에 버금가는 조선의 불교 성화를 그리기 위해서 미리부터 계획하고 특별한 지시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김홍도가 불화제작을 총감독한 것은 국가공식 문서인 수원지령등록에 명시되고 있다.
또한 정조의 일기본인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좌의정 이성원 (1725 영조 1∼1790 정조 14)이 아뢰기를 김홍도와 이명기를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데려가야 하는데 마땅한 직책이 없습니다. 이에 김홍도를 군관자격으로 이명기를 추가정원으로 데려가고자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후불탱화를 그리기 몇 달 전 정조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김홍도를 별도직책까지 마련해 보낸 것이다.
당시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은 지금의 북경으로 여기로부터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고 있어 이를 주도한 것은 그 곳의 천주교 신부들이었다.
천주당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면서 연경을 찾은 조선 사람들에 큰 이목을 끌었다. 그중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천주당 성화는 당연히 볼거리로 사신들을 통해 정조에게도 알려졌던 것이다.
정조은 김홍도를 하여금 불화를 그리기 위하여 천주교 성당을 방문하게 하였으며 동양화인 불화에 혁신적으로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게 한 것으로 명실공히 개혁정치를 펼친 철인군주(鐵人君主)와 더불어 예인군주(藝人君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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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헐 그거 생각나 바람의화원에서 배수빈이 그림이 졸렬하다!!! 라고 한거
정조 내 사랑
(쫌따봐야징 히히) 여시야 나 정조랑 김홍도 진짜 짱좋아...너무좋아..ㅠㅜㅜ고마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