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월 23일 라오스의 캄타이 시파돈 대통령이 한국에 국빈방문한다는 뉴스를 들은
엄마는 다음날 아침부터 잡채 만들기로 분주해졌다.
옆집 개성댁, 뒷집 똘이네, 사거리 건너 매주집, 봉천 이발관 홍여사등 일명 잡채파
들이 우리집으로 집결한 것은 그 날 오후였다.
물론 나에게도 임무가 주어졌다.
일명 당면 사오기.
<아저씨 해태 당면 230봉지 주세요>라고 외치니 아저씨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무슨 당면을 그렇게.....집에 무슨 일 있니?>
<라오스 대통령이 4월 23일 우리나라에 국빈방문 한데요>
아저씨가 파리채로 잠자리를 잡으며 <아는 사람이니?> 라고 다시 물었고 나는
말 없이 말보로 한 보루를 슬쩍 훔쳐 나왔다.
2.
당면을 무치던 엄마가 나를 부엌 문턱에 앉혀 놓고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
<지금부터 엄마말 잘 들어...>
엄마가 이렇게 심각한 것은 일찍히 본적이 없다.
<너 아버지 오시면 잘해야 된다>
아빠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빠가 오신다니 통 모를 일이다.
<사실 너희 아빠 안 죽었어, 엄마가 처녀때 라오스에 고추장 팔러
갔다가 너희 아버지 만나서 널 임신했다. 엄마는 장사가 안되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너희 아버지는 남은 고추장으로 정치를 시작해서
대통령이 된거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멋진 이야기였다.
<엄마 그러면 나도 다니엘 헤니처럼 튀기야?>
엄마는 3초 정도 고민하더니 <뭐 그런 셈이지...>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사실이라면 나도 일종의 전두환 아들이고, 박상아는 아니더라도 김태희 정도는
거뜬하단 말이 아닌가?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3.
오픈 리무진을 탄 라오스 대통령이 스쳐 지나가기로 한 교보문고 앞에서
나와 주희가 서있다.
나는 잡채가 가득 든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고, 주희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었다.
껌을 짝짝 씹는 주희에게 뭐라 란다.
<야 우리 아버지 앞에서 껌 씹지말았으면 해...결혼 승락 받기도 전에 막 되먹은 애로
오해 받으면 곤란하쟈나>
주희가 쏘아 붙친다.
<너는 담배나 피지마.....근데 진짜 웃긴다...너 진짜 라오스 튀기야?>
나는 잡채통을 이고 있는 한쪽 손을 다른 쪽 손과잽싸게 바꾸며 담배를 입에
문다.
<그런가봐.......정말 낭만적이지 않니?>
주희는 피식 웃으며 <어쩐지 동남아틱하더라....> 라고 말한다.
4.
엄마는 라오스 쿰타친친 강가에서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 인사를 나눴다고 했다.
붉은 빛 석양을 등지고 떠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눈물로 남긴 한마디는 이것이었다고 하는데.
<고추장을 다 팔고 한국으로 당신을 찾으러 가는 날, 나를 위해 노란 잡채를 하늘
높이 날려주시오.....멀리서 보고 당신인줄 알리라..당신의 잡채가 무척이나 그리울 것이오....안녕>
어머니는 나에게 잡채를 하늘 높이 날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5.
오토바이 퍼레이드가 지나가고, 파란 경찰차 12대가 지나가고, 리무진 3대가 지나간 뒤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작고 까맸고, 머리에는 이슬람 삼각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픈카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희와 나는 잡채 양동이를 아버지를 향해 힘껏 던졌고, 잡채 속 피망, 양파, 고기가 형형색색
오픈카 위 하늘을 물들였다.
놀란 경찰들이 우리를 향해 곤봉을 흔들며 뛰어왔지만, 하늘 속 잡채를 본 아버지는 라오스어로 무언가
소리쳤다.
<캄캄 탄탄 칙칙 폭폭 랑불탄>
나중에 전해들은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외치 그 한마디는 <아들아, 아빠가 왔다>였다고 한다.
6.
오픈카에서 내린 아버지는 나의 이마에 키스하고 작은 나무 상자를 하나 선물해주고 갔다.
집에 와 열어보니, 고추장 한 병이 들어 있었다.
고추장을 본 엄마는 이것은 오래전부터 약속된 그들 사이의 또 다른 사랑의 징표라고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씨발, 내 선물은?....>
나는 절망했다.
7.
아버지가 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쳤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전해들었다.
한국과 라오스는 관세장벽을 허물고 고추장을 비롯한 공산품을 자유롭게 수출입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밤 나는 라오스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사랑해요. 고추장은 잘 먹을게요..>
<엄마를 많이 사랑하시나봐요? 좋아보여요 두 분>이라고도 적었다.
아버지가 다녀가신 그 해 봄, 나는 어른이 되었다.
첫댓글 재 밌 어 용 ~
huhuhu
크흑. 이 재미난 걸 이제야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