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에 관한 시 (외 1편)
이근화
어쩌다 김밥에 관한 시를 쓰게 되었다
어쩌다 김밥을 먹게 되는 날이 있는 것처럼
김밥하면 천국이 떠오르고
천 원이나 천오백 원으로 어떻게 김밥을 말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김밥 둘둘 잘도 마는 조선족 아줌마들 월급이나 제대로 주는지
그러나 김밥에 관한 시를 먼저 써야 하는데
김밥하면 나는 친구 현숙이가 떠오른다
김밥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더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밥 때문은 아니고
살다 보면 그렇다 김밥 옆구리가 터지듯
그냥 얻어터지는 날도 있고
어제도 오늘도 만났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만날 수 없게 된다
죽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김밥 마는 여자를 좋아하던 평론가 형도 못 보게 되었다
같이 동물원도 가고 했는데 좋은 사람이었는데
김밥에 관한 시보다 김밥이 나는 더 좋다
파는 김밥은 잘 못 먹고
집에서 누가 좀 말아줬으면
첫아이를 갖고 앉은자리에서
김밥을 일곱 줄인가 여덟 줄을 먹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믿지 못할 일은 그것뿐이 아니다
빈곤한 내 상상력에 활력을 주려는 듯
아이가 침을 흘리고 또 흘리고 침은 참 맑다
김밥 같은 건 이제 말아 먹을 여유도 없지만
김밥에 관한 시를 써야 한다
쓰다 보니 멸추김밥처럼 웃긴다
내가 뭐 김밥에 관해 아는 게 있나 먹을 줄만 알지
먹을 줄 아는 게 다 아는 건가
요즘엔 초밥을 더 많이 먹는다
남편이랑 회전초밥집 가서 사만 오천 원어치나 먹어 치웠다
너무하다
사만 오천 원이면 김밥이 적어도 열여덟 줄인데
너무하다
그러고도 배가 썩 부르지 않았다
김밥 열여덟 줄이면 배가 터졌을 텐데
층층이 쌓인 접시만 원망했다
엄마 옆에 앉아
계란도 깨주고 깨소금도 뿌려주던 때가 있었다
꼬투리 먹으면서 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나 했는데
김밥 마는 날이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던 엄마는
이제 다 늙어서 일곱 시 여덟 시까지 자도 된다
김밥이 그립듯 엄마가 그리우면
속이 정말 아플 것이다
그럴 것이다
김밥이 없으면 소풍도 그렇고 동물원도 그렇고 기차도 그렇다
생애 최초로 공들여 만 심심하고 뚱뚱한 김밥은
그 애가 참 잘 먹었는데
이제 김밥집 없는 곳에서 아들딸 낳고 잘 사는지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으면 어떡하는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간간한 김밥이었으면 좋겠는데
알록달록하고 가지런하고 고소한 김밥이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하루에 이백 줄 한 줄에 십오 초면 되는
달인의 김밥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천국의 김밥 그리운 김밥 없는 김밥 영원한 단무지
김밥에 관한 시를 먼저 써야 하는데
김밥보다 김밥이 먼저 나를 이끈다
금 팔러 간 이야기
내게도 금은 있다
동전보다 빛나고 지폐보다 무거운 금이 있다
서랍에 처박혀 무거운 목소리를 내는 금이 있다
금값이 치솟고 고가매입 전단지와 안내판이 걸리니
공연히 그걸 꺼내 보았다
집안 경제도 못 챙기는 나는
유럽 경제나 미국 증시 같은 건 알 수 없다
동네 금방 아저씨 얼굴도 가물가물
가물치처럼 길쭉하고 기름졌던가
쌀을 안치기도 귀찮은 날
동네 칼국수 집에 들렀다가 가물치와 마주쳤다
이십이만 오천 원
한때는 이십오만 원까지 쳐줬단다
미끈한 정보 사이로 그의 눈빛이 빛났던가
나의 눈빛이 가물치처럼 찢어졌던가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설렁설렁 살고 싶은데
여행을 갈까 적금을 들까 코트를 살까
비스듬히 내리는 비가 오늘 내 서랍을 적신다
칼국수 속 드문드문 박힌 조개도
아까 잠깐 웃었던 것 같다
—시집 『차가운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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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 1976년 서울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고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